전쟁과역사 크림전쟁 (2) - 흑해와 크림 반도에서의 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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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7회 작성일 16-02-0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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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클라바 전투에서 격돌하는 원정군과 러시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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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크림전쟁 개요

전쟁 주체


러시아
vs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 사르디니아

전쟁 시기


1853~1856

전쟁터


크림반도와 흑해, 백해, 발트해, 동유럽 등등

주요 전투


시노페 해전, 알마 전투, 발라클라바 전투, 세바스토폴 포위전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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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의 반면교사



크림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한 외교사학자들의 입장은 엇갈린다.

종교 문제가 도화선이 된 점에 주목하여 ‘19세기의 종교전쟁’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고, 러시아의 꾸준한 남하 정책이 가져온 필연적 결과라고 보기도 하며, 외교적으로 해결될 일이 영국의 과도한 반러시아 감정이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견해, 막 정권을 잡은 입장에서 대외적으로 ‘한 건’을 해내 면목을 세우려던 나폴레옹 3세의 속셈이 빚은 전쟁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

이에 반해 전쟁사학자들의 견해는 거의 완전히 일치하는데, 이 전쟁이야말로 근대 전쟁사에 보기 드문 교훈을 남겼다는, 바로 “전쟁을 이따위로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견해이다.

영국군이나 러시아군이나 프랑스군이나 전략 기획, 병력 지휘, 군사 행정, 병참, 의료 지원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이었다.

첫 번째 실수는 1853년 11월에 있었다. 튀르크는 러시아의 흑해 함대로부터 흑해의 해상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해군력을 동원했는데, 영국의 스트래드퍼드 대사가 우기는 바람에 주력 전함을 뺀 상태로 출항시켰다.

이들은 러시아의 파벨 나키모프(Pavel Nakhimov) 제독이 이끄는 흑해 함대와 정면충돌했고, 결과는 단 1척 만이 간신히 도망치고 전 함대가 격멸당하는 대패였다.

기세등등한 흑해 함대는 튀르크 해군을 무찌른 것에 만족하지 않고 튀르크의 군항인 시노페로 내달았다. 그리고 항구 어귀에 유유히 닻을 내린 뒤 함포 포문을 모두 열고는, 포탄이 떨어질 때까지 포격을 거듭하여 항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시노페 해전으로 러시아는 튀르크 해군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며 서전을 장식했지만, 사실 이 해전에서 더 큰 실수를 저지른 쪽은 튀르크가 아니라 러시아였다.

굳이 무저항 상태의 시노페 항까지 무차별 공격한 일이 영국과 프랑스의 반러시아 감정을 한껏 자극했던 것이다.

두 나라의 언론은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학살이다”, “러시아인들은 여자와 어린이만 있는 민가에까지 포탄을 퍼부었다”, “러시아의 야만성은 기독교 국가의 수치다” 등의 기사를 연일 내보냈으며, 이는 그때까지 정말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것인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것인가를 놓고 망설이고 있던 두 나라 정부의 결단을 촉구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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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의 시노페 해전. 전투는 러시아의 승리였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참여를 촉구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과 프랑스는 해군을 동원해 흑해에서 러시아 해군에 대항하고 나아가 크림 반도를 공략하도록 했다.

그러나 흑해에 도착한 두 나라의 원정군은 낭패를 보았는데, 정박 예정이던 지역의 바다 수심이 너무 낮아서 배를 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기초적인 정보도 챙기지 않은 채 정부의 명령을 받고 덜컥 낯선 바다로 들어온 원정군 병사들은 이번에는 추위와 기아에 시달려야 했다.

훌륭한 정부 나리들이 ‘크림 반도는 러시아의 휴양지’라는 말만 듣고 결정했던지 하복 차림으로 겨울에 접어드는 러시아 땅에 가도록 한 데다, 병력이 소비할 군량과 의약품의 대부분은 육로로 후송한다고 했는데, 이 후송대가 지리를 잘 몰라 갈팡질팡하며 도무지 목표한 날에 도착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병력이 모여, 연합군은 1854년 9월에 크림 반도에 상륙하여 세바스토폴 요새를 향해 진격해들어갔다.

이것도 실수였다. 원정군은 기후도 나쁘고 보급도 딸리는 상황에서 되도록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좋았으며, 따라서 우크라이나를 종단해 북상하여 러시아의 심장부를 곧바로 노리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견고하기로 정평이 있는 세바스토폴을 상대로 겨울 한철을 꼬박 견디는 긴 공방전을 선택했으니, 전쟁을 어렵게 수행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했다.



알마에서 발라클라바까지



러시아군은 세바스토폴로 향하는 원정군을 알마 강에서 막아섰으나, 6만의 원정군에 비해 3만 5천으로 병력에서 뒤졌으므로, 야전으로 자웅을 결정하기보다는 고지에 머물면서 대포를 최대한 활용해 원정군의 발목을 잡고자 했다.

러시아군을 공격하려 고지를 오르는 사이에 영국군은 대열이 꼬여버려 어지러운 상태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영국군에는 노련한 소총수가 많았고 새로 도입한 선조탄(Minié ball)이 사격의 정확성을 늘려주었기에 러시아군을 후퇴시킬 수 있었다.

원정군은 세 차례에 걸쳐 러시아군을 공격하여 고지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세바스토폴로 가는 길에는 걸림돌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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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 전투에서 진격하는 영국군.



이후 약 1년 동안 원정군은 세바스토폴 수비대와 씨름하고, 러시아군은 몇 차례 그들의 뒤통수를 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면서 지지부진하면서도 유혈이 낭자한 세월을 보냈다.

러시아군의 시도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시도는 1854년 10월 말에 있었다. 알마 전투에서 패배한 멘시코프(Prince Menshikov) 장군이 세바스토폴을 내버려두고 크림 반도 최남단의 발라클라바를 손에 넣기 위해 남진했던 것이다.

당연히 세바스토폴 포위군을 직격해올 것이라고 여겼던 원정군 지도부는 허를 찔렸고, 발라클라바는 원정군의 지원 병력과 보급물자가 도착하는 항구도시였기에 그곳을 지키느냐, 못하느냐는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것임을 깨달았다.

원정군은 뒤늦게 전열을 정비했으나, 동원할 수 있는 원정군 병력은 4천 5백 남짓인 데 비해 러시아군은 2만 5천에 달했다.

게다가 이제 전개될 발라클라바 전투는 전쟁사상 보기 드문 실수의 연속으로 엮어질 터였다. 비록 그 실수를 어느 정도 보충할 용맹함도 나타나겠지만.



“이런 건 전쟁이 아냐!”



전투의 성패는 세바스토폴에서부터 크림 반도 남단을 가로지르는 보론조프 도로, 그 중간에 발라클라바로 가는 지점에 해당되는 코즈웨이 고지 부분을 원정군이 막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원정군은 그 고지에 여섯 곳의 요새를 지어 방어 중이었다.

그런데 1854년 10월 25일 아침에 시작된 1만 명 가량의 러시아군 선제공격에 그 중 네 곳이 맥없이 점령당해버렸다.

총사령관인 영국의 래글런 경(Lord Raglan)이 적의 공격을 ‘페인트’라고 판단하고는, 고작 천 명의 튀르크군만이 맡고 있던 요새 수비 병력을 보강하지 않고 두었기 때문이었다.

튀르크군은 일방적인 살육을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버렸으며, 코즈웨이 고지대 전체가 러시아군에게 넘어가는 일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래글런의 다음 명령은 그런 전망을 가중시켰다. 기병대에게 현 위치에서 벗어나 동쪽의 아직 점령되지 않은 요새들의 수비를 “보강”하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서 보론조프 도로를 횡단하여 곧바로 발라클라바로 들이닥칠 수 있도록 러시아군에게 문을 활짝 열어두라는 소리였고, 기병대가 그렇게 움직인다면 따로 명령을 받지 않은 550명의 하이랜더(스코틀랜드인) 연대를 1만의 적의 목구멍에 던져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병대 사령관 루컨 경(Lord Lucan)은 ‘이런 거지 같은 명령이 어디 있나’고 욕지거리를 뱉었으나, ‘명령은 명령이니까’ 하며 곧바로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이 천재일우의 기회에 러시아군이 정찰대만 보냈다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전열을 정비해서 단숨에 보론조프 도로를 넘었겠지만, 그들은 그저 네 곳의 요새를 점령했으니 또 다음 요새를 차지하자는 생각만 가지고, 남겨진 하이랜더들 앞으로 천천히 접근해왔다.

그때, 죽음을 각오한 하이랜더들은 믿기 힘든 용맹함을 보여주었다. 달아나거나 바짝 엎드려 있는 대신, 일제히 전진하여 하나의 횡대를 이루고 미친 듯이 사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예상보다 쉽게 요새들을 점령한 덕에 여유만만하게 진군하던 러시아군은 당황했고, 붉은 제복의 하이랜더들이 선두의 아군 기병대를 쓸어버린 다음 총검을 잡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것을 보자, 그만 겁에 질려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하이랜더들 뒤에 적 병력이 얼마나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하나도 없었는데도!) 후퇴만이 답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이랜더들은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 붉은 군복 차림으로 소수 병력이 횡대를 이룬 모양에서)”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사에서 손꼽을 만한 용맹한 전사들로 길이 기억되어, 약 백 년 뒤 태평양전쟁 상황에서도 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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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제복을 입은 하이랜더들이 구축한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



래글런의 재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동쪽의 요새로 가서 고전하고 있는 튀르크군을 도우라고 중기병대에게 명령한 것인데, ‘고전하고 있는 튀르크군’은 그때 이미 발라클라바 근처까지 도망가 있었다.

그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려면 적군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 고지로 치고 올라가야 했는데, 중기병대를 이끌던 스칼렛(James Scarlett) 장군은 역시 묵묵히 ‘거지 같은 명령’을 받아들였다.

오전 아홉 시 반, 씬 레드 라인이 스무 배나 많은 러시아군을 격퇴시킨 직후, 스칼렛도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칼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돌진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식으로 베고 부딪치고 쏘고 들이받으며 밀어붙이자, 11시경부터 러시아군은 지리멸렬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카디건(Cardigan)이 이끌던 경기병대까지 합류해서 공격했다면 러시아군은 치명타를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팔짱만 끼고 있었다.

“경기병대는 적이 공격해오지 않는 한 자리를 지켜라”는, 마치 래글런만 거지 같은 명령을 내릴 특권이 있는 게 아니라는 듯한 루컨의 명령 때문이었다.

래글런도 질 수 없었다. 루컨에게 보낸 그의 세 번째 명령은 “여세를 몰아 적을 공격하여 요새들을 탈환하라. 지원할 보병대가 있다”였는데, 받아쓰는 과정에서 오탈자가 생기면서 “여세를 몰아 적을 공격하여 요새들을 탈환하라. 지원할 보병대가 있다면”처럼 되어 버렸다.

루컨이 주위를 아무리 돌아봐도 보병대라고는 없었고, 따라서 적군이 요새로 돌아가 전열을 정비할 때까지 넋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날의 마지막 코미디가 나왔다. 하이랜더와 중기병대의 분전으로 러시아군은 코스웨이 동쪽의 요새 점령 병력과 북서쪽의 멘시코프 본진으로 분단되어 있었다(그 분전이 없었더라면, 또는 러시아군이 좀 더 상황 파악이 빨랐다면 두 병력이 합세하여 원정군을 쉽게 쓸어버렸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서야 전장 가까이에 납신(그때까지는 한참이나 떨어진 본부에서 지도나 보며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래글런이 마침 점령된 코스웨이 요새의 영국군 대포들을 러시아군이 옮기는 것을 보고는 “저들이 나의 대포를 가져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즉각 전진하여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그 명령을 전할 전령은 레슬리(Leslie) 대위와 놀란(Nolan) 대위였다. 이들이 말을 달려 경기병대 본부에 있는 루컨에게 그 명령을 전했을 때, 루컨은 대포라니 무슨 대포를 말하는 거냐고 반문했다.

그의 위치상 시야에 들어오는 대포는 래글런이 말한 코스웨이의 영국군 대포가 아니라 북서쪽 러시아군 본진의 대포였던 것이다.

놀란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루컨에게 그만 화가 나서 “저거요! 저 대포들 말입니다!”라고 러시아군 대포들을 가리키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야말로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같은 명령, “적의 사격 연습을 위해 총알받이 노릇을 해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명령인 셈이었다. 본진의 러시아군은 3만이 넘었고,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50문이 넘는 대포를 겨누고 있었다.

이에 맞서 루컨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천 명도 안 되었다. 루컨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역시, 명령은 명령이니까! 카디건의 경기병대에게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테르모필레의 300 스파르타군도 이보다는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싸웠다고 할 수 있을 터. 그래도 영국군 병사들은 수십 배나 되는 적군과 싸우려고 질서정연하게 전진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프랑스군의 보스케(Bosquet) 장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장엄한 광경이군. 하지만 이런 건 전쟁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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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순간,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는 경기병대.



최초의 희생자는 잘못된 명령을 전한 놀란 대위였다. 그는 별안간 전진하고 있는 아군 앞쪽으로 말을 몰고 뛰어나왔는데, 뭐라고 계속 외쳤지만 대포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뒤늦게 깨닫고 멈추라고, 자살 공격을 그만두라고 말리려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따르라!’였을까?

아무튼 그는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러시아군의 총탄과 포탄이 새까맣게 날아들면서, 묵묵히 전진하는 영국군들을 차례차례 때려잡기 시작했다.

루컨 스스로는 중기병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르다가 ‘더 이상 희생을 늘릴 필요는 없어서’ 정지하고는 자신의 명령을 따라 사지로 들어가는 경기병대에 등을 돌리고 후퇴했다.

경기병대는 러시아군조차 눈뜨고 못 볼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며 전진했다. 그러다가 그중 일부가 기적적으로 적 포병대 가까이까지 육박했지만, 고스란히 대포밥이 되는 것을 보고, 결국 후퇴했다.

후퇴하는 동안에도 적탄은 계속 날아들었다. 전진에서 후퇴까지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600명이 좀 넘는 경기병대 중 300명 가량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고, 6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335마리의 말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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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토폴을 점령하는 프랑스군.



그들도 씬 레드 라인이나 스칼렛의 중기병대만큼 노련하고 용감했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한 러시아군은 뜻밖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선발대가 아니라 잘 정비된 본진이었고, ‘전진하라는 명령만 들었지, 돌격하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다’고 고집하던 카디건 덕분에(그는 자기 부하들보다 조금 일찍 퇴각한 덕분에, 살아남았다) 느릿느릿 전진하느라 쉬운 사격 표적이 됨으로써, 훗날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게 될 크림 반도의 골짜기에 차례차례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대시인인 알프레드 테니슨은 [경기병대의 진격]에서 그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위로했다.

상대편에 약 먹고 전쟁하는 듯한 사령관과 부하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지휘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발라클라바를 점령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바스토폴에 대한 원정군의 포위망을 끝내 깨트리지도 못했다.

1854년 10월에서 1855년 9월까지, 이 요새의 성벽 사이에서 사람들은 끝없이 서로를 죽였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동상으로 죽어갔다. 결국 지키는 쪽이 조금 더 일찍 지쳤으며, 당시 포병사관으로 현장에서 싸우며 모든 것을 지켜본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가 [세바스토폴 이야기]에서 적은 대로의 날이 왔다.



이렇게 여러 달 동안 예사롭지 않은 용기와 노력으로 지켜졌던 세바스토폴, 이렇게 여러 달 동안 싸늘한 시체로 바뀌는 영웅들을 지켜보았던 세바스토폴, 이렇게 여러 달 동안 공포로, 증오로, 끝내는 정복자의 환희로 가득 차게 된 세바스토폴.

그 세바스토폴의 능보에는 이제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죽었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모든 것이 처참했다.


참고문헌


  • William Howard Russell, [The War, From the Landing at Gallipoli to the Death of Lord Ragla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 David Wedgwood Benn, "The Crimean War and Its Lessons for Today"([International affairs]. vol. 88 no. 2. 2012)
  • Brian James, "Allies in Disarray: the Mystery of Why the Crimean War Ended so Suddenly, With Few of the Allies' War Aims Achieved"([History Today] vol. 58 no. 3, 2008)
  • 레프 톨스토이, [세바스토폴리 이야기: 전쟁 소설집](인디북, 2004)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삼지원, 1985)
  •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 마르틴 반 크레펠트, [보급전의 역사](플래닛미디어, 2010)
  • 에릭 두르슈미트,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세종서적, 2001)
  • 리튼 스트레이치, [빅토리아 시대의 명사들](경희대학교출판부, 2003)
  •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 원태재, “크리미아 전쟁과 영국 군사개혁” [사학지] 23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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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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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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