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크림전쟁 (3) - 다른 전장, 다른 참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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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8회 작성일 16-02-0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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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클라바 전투에서 부상당한 환자들을 배로 이송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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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크림전쟁 개요

전쟁 주체


러시아
vs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 사르디니아

전쟁 시기


1853~1856

전쟁터


크림반도와 흑해, 백해, 발트해, 동유럽 등등

주요 전투


시노페 해전, 알마 전투, 발라클라바 전투, 세바스토폴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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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에서 태평양까지



이 전쟁은 크림 반도를 주 전장으로 치러졌으며 따라서 ‘크림전쟁’이라는 이름도 붙었지만, 전장은 세계 각지에 펼쳐져 있었다.

먼저 전쟁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된 다뉴브 공국에서는 튀르크군이 어느 곳에서보다 잘 싸웠다.

1853년 11월의 올테니챠 전투는 크림전쟁 최초의 격돌이었는데, 오마르 파샤(Omar Pasha)의 튀르크군이 단네베르크(Peter Andreivich Dannenberg)가 이끌던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이후 칼라파트 포위전과 카라칼 전투 등에서 튀르크군은 승리를 거듭했고, 러시아군은 1854년 상반기까지 여러 차례 다뉴브강을 넘어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공략했으나 혁혁한 전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이슬람에게서 우리를 해방해줄 러시아군’으로 환영하고 지원해주리라 믿어왔던 현지의 그리스 정교도들의 태도가 미지근해지고,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군이 도착했으며, 오스트리아가 당장 공세를 멈추지 않으면 무력 개입하겠다는 통보를 연달아 해오는 상황이 되자, 결국 1854년 7월에 러시아군은 다뉴브 공국에서 철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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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테니챠 전투에서 승리한 튀르크군.



한편 러시아는 캅카스 산맥 방향으로 전쟁 발발 전부터 튀르크의 지배 영역을 침공해들어오고 있었는데, 그들을 먼저 가로막고 나선 것은 체첸과 키르기스 등의 토착민들이었다.

러시아는 그들과 사이가 나빴던 그루지야와 카헤티 등의 토착민들을 활용하여 공략해나갔다. 러시아가 그루지야 지역을 점령하고 아르메니아로 손을 뻗치던 시점인 1853년 가을부터는 주로 튀르크군과 러시아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해 11월의 아칼티시 전투와 12월의 바시카디클라 전투에서 튀르크군을 참패시킨 러시아군은 1854년 초에 아르메니아를 석권하고 튀르크 본토까지 넘볼 계획을 세웠다.

1854년부터 1855년까지 러시아의 공세는 아르메니아의 대표 도시인 카르스에 집중되었으며, 1855년 11월에 마침내 그 도시의 항복을 받아냈다.

파리 조약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전역에서 러시아는 내내 승세를 유지했으나, 토착민들의 반란이 잇달고 지형적 문제 등으로 보급이 어려웠으므로 예상했던 것보다 진격의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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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스를 포위 공격하는 러시아군.



영국과 프랑스는 흑해 상륙군으로 러시아를 치고 올라가게 하는 대신, 별도의 병력을 발트해로 진입시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략하려 했다.

1854년 4월과 8월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군항 크론시타트를 공격했는데, 이에 맞설 러시아의 발트 함대는 항구에 숨은 채 맞서 싸우지 못했다.

연합함대 쪽이 수적으로 앞서는 데다가, 러시아가 1820년대 이래 지속해온 함포의 혁신, 즉 갑판 파손이나 인명 살상을 주목적으로 하는 포탄(砲彈, solid shot) 대신 적함을 말 그대로 파괴하여 격침시키려는 목적의 폭탄(爆彈, shell)으로의 혁신에 영국, 프랑스만큼 성공하지 못해서(하지만 그만큼의 성공으로도 시노페 해전에서 튀르크 함대를 박살낼 수 있었다.

이보다 약간 앞선 아편전쟁에서 영국 해군이 청국 해군을 유린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감히 자웅을 결하러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합함대의 위력적인 함포 사격으로도 크론시타트나 다른 러시아 군항들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의 상륙을 막았던 요인 중 하나로 러시아 측의 신무기가 있었는데, 바로 알프레드 노벨의 아버지인 임마누엘 노벨이 발명한 신형 기뢰였다.

결국 연합함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따금 러시아의 군항들을 두들겨 부수면서 러시아의 해외무역로를 차단하는 선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는 못 되었으나 러시아에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안겼다.

연합함대는 또한 1854년 가을에 발트 해 동쪽의 백해로 진입해 콜라, 솔로프키, 아르한겔스크 등을 공략하고 1855년 봄에는 크림 반도와 흑해 사이의 아조프해에서도 활동했으나 그리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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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파블롭스트 요새를 수성하기 위해 놓인 대포.



멀리 태평양에서도 전쟁이 있었다. 연합함대는 캄차카 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공격했는데, 1854년 9월에는 상륙하여 이 요새를 점령하려던 영국과 프랑스 병력이 치명적인 반격을 당해 퇴각했다.

그러나 1855년 초에 그들이 전력을 보강하여 다시 공격해오자, 요새 수비대는 달아나버렸다.

연합함대는 사할린의 일부와 쿠릴 열도의 섬들도 한때 점령했는데, 이는 전쟁의 승패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우리 해군력으로는 저 땅을 지킬 수 없다’는 인식을 러시아 정부에 심어줌으로써 나중에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해 버리는 결정에 기여했다.

오랫동안 독립을, 또는 통일을 염원해온 두 유럽 민족도 이 전쟁에 참여했는데, 희비가 엇갈렸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주역인 사르디니아-피에몬테는 영국의 후원 약속에 따라 1855년 1월에 1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참전했다. 그들은 세바스토폴 공방전에 참여하여 제법 훌륭한 무훈을 세웠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통일 노력은 상당한 힘을 얻게 되었다.

반면 독립 후 얼마 되지 않은 그리스는 튀르크에게서 찾지 못한 옛 땅을 찾을 기회로 여기고 러시아 편에 서서 참전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의 입김이 강했던 정부는 공식적인 참전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의용병대가 조직되었다.

그들은 다뉴브 공국 전선에서 싸웠으며, 일부는 세바스토폴 공방전에도 참여해 일찍이 자국의 독립을 성취시켜 주었던 영국, 프랑스 군대와 싸웠다.

크레타,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등에서도 그리스계 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며, 전쟁 결과에 따라 그리스인들의 희생은 아무 대가를 얻지 못했다.



전쟁이 낳은 진정한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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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경의 나이팅게일.



이 전쟁은 전쟁 영웅을 거의 낳지 못한 반면, 민간 영역에서 탁월한 인물들을 선보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국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일 것이다.

1820년에 영국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17세 때부터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역할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으며(공공부조의 개념이 아직 미약했고, 간호사가 잡역부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하던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이고 도발적인 생각이었다), 크림전쟁이 발발할 때에는 런던 할리 가의 요양소를 맡아서 운영하고 있었다.

크림 반도에서 벌어진 알마 전투와 그 직후 부상병과 병든 병사들을 돌볼 야전병원이 처음으로 세워졌다는 소식을 접한 그녀는 자신이 간호사들을 이끌고 전쟁터로 가겠다고 자원했으며, 그녀와 오래 교류하며 그녀의 진가를 잘 알고 있던 시드니 허버트가 마침 관련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덕에, 38명의 간호사를 이끌고 1854년 11월 4일에 콘스탄티노플의 교외인 스쿠타리에 마련된 야전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라클라바 전투가 벌어진 열흘 뒤였다. 그 어이없는 전투의 희생자들은 현지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다음 200명이 한 조가 되어 배편으로 스쿠타리까지 이송되어 오고 있었다.

이송에는 2~3주가 걸렸는데, 환자들을 실어 나르는 배에는 아무런 의료 시설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담요나 침상도 별로 없었다. 환자들은 천 명에 75명 꼴로 이 항해 도중에 목숨을 잃어버리곤 했다. 시체는 바다에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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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타리 야전병원. 나이팅게일은 탁월한 행정 능력과 불굴의 의지로 이곳을 바꿔나갔다.



그렇게 해서 천신만고 찾아간 병원은 또 다른 절망이었다. 탁상행정으로 허겁지겁 지어진 스쿠타리 병원은 하필이면 하수구 위에 지어졌으며, 정신을 잃을 정도의 악취가 하루 종일 떠나지 않았다.

파리, 거미, 지네, 구더기 따위는 사방에 득실거렸다. 이렇게 악취와 세균과 해충은 넘쳐나는 반면 의약품, 침구, 의복, 세면도구, 연료 등은 부족하거나 아예 없었다.

건강한 사람도 지내다 보면 환자가 될 판인 건물에 팔다리가 잘리거나 콜레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침상도 없이 널브러져 지냈다.

나이팅게일과 그녀의 간호사들도 이 믿기지 않는 환경에 경악했으나, 그녀는 천사 같은 자애로움보다는 불굴의 의지와 탁월한 행정 능력으로 난국을 극복해갔다.

불결한 시설과 도구를 바꾸고, 모자라는 필수품을 끌어왔으며, 주먹구구식인 병원 행정을 정리하고, 무례하거나 제멋대로인 직원들에게 규율을 심으며, 절망에 빠진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녀가 스쿠타리에 온 지 일곱 달 만에, 환자 사망률은 100명당 42명에서 1000명당 22명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그녀 한 사람만의 노력의 결과는 결코 아니었고, 메리 시콜(Mary Seacole) 같은 헌신적인 간호사들이 이룬 업적을 그녀가 어느 정도 가로챈 면마저 있었으나, 간호사의 일과 보건 행정의 역사가 그녀 이전과 이후로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평화조약이 체결된 지 넉 달 만인 1856년 7월에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래글런 같은 용렬한 장군들이 청문회에 서는 와중에 ‘크림 전쟁의 진정한 영웅’으로 영국인들의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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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의 레프 톨스토이.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인물이 크림전쟁의 포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생이었으며, 백작의 아들이었다.

대학생 시절의 그는 고매한 이상과 퇴폐적인 쾌락 모두에 강렬히 이끌렸으며, 자신의 고뇌하는 영혼을 전장의 포연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관조하는 작가의 창작 활동 속에서 안정시키려 했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사관후보생이 된 그는 이듬해에 캅카스 전역에 참전하여 체첸 병사들과 싸웠으며, 이때 처녀작인 자전소설 [유년시절]을 내놓는다.

그리고 곧 크림전쟁의 한복판으로 나아가 세바스토폴을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그 경험으로 쓴 [세바스토폴 이야기]는 그를 일약 문단의 기린아로 끌어올렸는데, 그가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실적이면서도 명상적이었다.

젊은이 특유의 명예욕이나 낭만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비참하고 잔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으면서도, 그 가운데서도 삶이 있고, 자연이 있고, 뭔지 알 수 없는 섭리의 작용이 있음이 보일 듯 말 듯 느껴진다.

톨스토이에게 전쟁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할 비극이지만, 또한 그 속에 던져진 사람들이 조국애, 신앙, 자부심 등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영웅적인 드라마이기도 했다.

그런 시각과 문제의식은 당시의 시대적 조류와 잘 맞았으며, 그는 장차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위대한 문호로, 또한 사상가로 추앙받게 된다.

또한 사진과 전신(電信)이라는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문명의 이기를 처음으로 취재에 사용, 보다 빠르고 생생하게 본국에 전할 수 있었던 윌리엄 하워드 러셀(William Howard Russell, 1820~1907)도 있다.

아일랜드 태생 영국인인 그는 [타임스] 기자로 크림전쟁에 종군하며 발라클라바 전투를 비롯한 현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취재했으며, 그 덕분에 오늘날 이 전쟁의 비참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그 가운데 꽃핀 영웅적인 정신 등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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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 수술의 아버지”로 불린 니콜라이 피로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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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전쟁 종군기자로 활약한 윌리엄 하워드 러셀.



또 영국에 나이팅게일이 있었다면 러시아에는 니콜라이 피로고프(Nikolay Pirogov, 1810~1881)가 있었는데, 우크라이나 태생의 그는 의료 기구를 들고 전쟁터를 뛰어다니며 긴급한 조치가 필요한 부상병들에게 마취를 한 다음(그때까지도 외과 수술에서 일반적이 아니었다) 능숙하고 침착하게 시술하여, “야전 수술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전쟁 후에도 외과 기술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러시아의 의학 수준을 적어도 외과 부문에서는 세계 최고로 만들었다.

그리고 발라클라바에서 경기병대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카디건은 무훈과는 다른 쪽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남겼다. 그가 즐겨 입었던 털실 스웨터가 나중에 유행하면서 오늘날의 ‘카디건’이 된 것이다.

참고문헌


  • William Howard Russell, [The War, From the Landing at Gallipoli to the Death of Lord Ragla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 David Wedgwood Benn, "The Crimean War and Its Lessons for Today"([International affairs]. vol. 88 no. 2. 2012)
  • Brian James, "Allies in Disarray: the Mystery of Why the Crimean War Ended so Suddenly, With Few of the Allies' War Aims Achieved"([History Today] vol. 58 no. 3, 2008)
  • 레프 톨스토이, [세바스토폴리 이야기: 전쟁 소설집](인디북, 2004)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삼지원, 1985)
  •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 마르틴 반 크레펠트, [보급전의 역사](플래닛미디어, 2010)
  • 에릭 두르슈미트,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세종서적, 2001)
  • 리튼 스트레이치, [빅토리아 시대의 명사들](경희대학교출판부, 2003)
  •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 원태재, “크리미아 전쟁과 영국 군사개혁” [사학지] 23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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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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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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