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크림전쟁 (4) - 끝나는 것과 계속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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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8회 작성일 16-02-0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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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전쟁 동안 격침된 배들을 기리기 위한 세바스토폴 해안의 기념비. <출처: (cc) Art-top at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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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크림전쟁 개요

전쟁 주체


러시아
vs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 사르디니아

전쟁 시기


1853~1856

전쟁터


크림반도와 흑해, 백해, 발트해, 동유럽 등등

주요 전투


시노페 해전, 알마 전투, 발라클라바 전투, 세바스토폴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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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강화회의



세바스토폴의 함락은 사실상 종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캅카스를 제외하면 크림 반도를 비롯한 전 전역에서 연합군에게 밀리고, 외교적으로 점점 더 고립되며, 경제난까지 직면한 러시아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의지가 없었다.

프랑스 역시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정부에서 국민까지 두루 퍼져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주동이 되어 ‘평화조약 사전 절충안’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영국이 어느 정도의 수정을 가한 내용을 러시아가 무조건 수락함으로써 평화협정의 길이 열렸다.

1856년 2월 25일부터 3월 30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의 결과 체결된 파리 조약에 따라 흑해에는 군항을 만들거나 군함이 항해하는 일이 금지되었으며, 다뉴브 강도 자유 통행토록 개방되었다.

또 핀란드 만의 올란드 섬도 비무장화되었는데, 그것은 유사시에는 영국 등이 이 섬을 발판으로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밖의 영토 조항은 튀르크의 독립과 기존 영토를 보전한다는 조항을 기본으로 하여 대체로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되었다.

러시아는 캅카스에서 철수했으며, 다뉴브 공국의 독립(튀르크의 명목상 주권 유지)을 허용하는 대신 그 일부인 베사라비아 북부에 대한 영유권을 유지했다.

연합군이 점령했던 러시아의 극동 영토도 반환되었다. 전쟁의 첫 번째 불씨였던 성지 관할권에 대해서는, 러시아가 전통적인 독점적 관할권을 포기하고 유럽 각국과 공유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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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의 파리 강화회의.



그러나 이런 결과는 전쟁의 치열함에 비해 모두에게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의 보호자’라는 체면을 잃었을 뿐더러, 흑해와 올란드의 비무장으로 자국 해군은 지중해로 나가지 못하는 반면 언제든 외국 해군이 발트해로 진입해 올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영국도 본래 폴란드와 캅카스를 독립시켜 러시아의 팽창에 대해 보다 확실한 완충지대를 확보하려 했으나 러시아는 물론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등도 반대하는 마당에 뜻을 관철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전쟁을 주도하며 상당한 명예는 얻었으나 실질적으로 얻은 영토나 배상금 등은 없었고, 오스트리아는 이로써 러시아와의 오랜 우호 관계를 잃어버리고 한동안 확실한 동맹국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감수해야 했다.

영국 등이 좀 더 러시아를 밀어붙이지 않고 전쟁을 그만둔 까닭이 가끔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되는데, 그에 대한 설명 중 하나는 당시 영국이 프랑스를 의심하고 있었고, 러시아를 완전히 격파해버리면 나폴레옹 3세에게 나폴레옹 1세처럼 설칠 기회를 줄지 모른다고 염려했다는 것이다.

결국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는 국제정치의 현실이 크림전쟁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전쟁 이후



크림전쟁은 그때까지에 비해 현저히 늘어난 사망자 수가 먼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전쟁의 사망자 수는 약 60만 명이었다.

약 13년이 걸린 나폴레옹 전쟁에서 350만 명이 죽은 데 비해, 3년이 걸렸다지만 전쟁이 본격적이었던 기간은 1년이 조금 더 되는 크림전쟁의 사망률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었다.

무기 능력의 상승과 병력의 대규모화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총 사망자 중에서 전사자의 수는 어느 나라나 10퍼센트에서 30퍼센트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병사(病死) 또는 부상의 악화로 죽은 사람들임을 보면 새삼 나이팅게일이나 피로고프의 활동이 얼마나 의미 깊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전투원에 대한 의료 지원 체계 개선과 부상자 및 질환자 처우 개선에 대한 국제 협력, 보건 서비스에 대한 국가의 노력 증대 등이 화두로 떠올랐다.

이 전쟁 직후에 일어난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앙리 뒤낭(Jean-Henri Dunant, 1828~1910)이 적십자와 제네바 협정을 제창하게 된 것은 같은 맥락에 있다.

윌리엄 하워드 러셀 등의 전쟁 르포나 톨스토이 등의 전쟁문학은 일반 국민이 전쟁의 실체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토록 했으며, 반전 운동, 평화 사상의 뿌리가 내려지도록 했다.

여기에는 무책임하고 몰인정한 정치, 군사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도 한몫했으며, 이는 영국 등에서 대대적인 군사행정 개혁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군사 통신과 병참 문제의 중요성도 새삼 부각되어, 통신에 전기를, 병력 수송에 철도를 사용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군사기술적으로는 위력이 커진 화포에 맞서 선체를 철갑으로 입히는 방식이 정착되었다.

크림전쟁은 또한 러시아의 개혁을 가져왔다.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해 파리 조약을 맺은 알렉산드르 2세(Nikolaevich Aleksandr Ⅱ, 1818~1881)는 1861년에 농노 해방령을 내리고, 지방행정 개혁, 사법제도 개혁, 병역제도 개혁 등을 꾸준히 추진했다.

이는 땅만 넓고 사람만 많은 러시아의 한계를 크림전쟁으로 깨달은 상황에서 새롭게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서구의 자유주의와 합리주의를 본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차르 독재 체제와 러시아 정교의 권위를 높이려는 개혁 자체의 모순 속에 1881년 알렉산드르가 암살되자, 러시아는 탄압과 반동, 그에 맞서는 반란과 혁명의 길로 줄달음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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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의 농노해방 칙령을 낭독하는 정부 관리 앞에 모여든 러시아 촌민들.



튀르크는 명색이 전승국이었음에도 러시아에게서 조금의 이권도 획득하지 못했으며, 튀르크의 보전을 인정받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튀르크가 이를 뼈아픈 개혁의 계기로 삼고 절치부심했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탄지마트 개혁을 추진했던 압둘 메지드(Abdul majid)가 1861년에 죽자 술탄의 자리는 무사안일과 반개혁 정책으로 일관한 압둘 아지즈(Abdul aziz)에게 돌아갔다. 절치부심한 쪽은 오히려 러시아여서, 1877년에 다시 한 번 전쟁을 걸어오자(러시아-튀르크 전쟁) 튀르크는 크림전쟁 때보다도 형편없는 모습으로 밀리기만 했다. 이에 다시 영국이 개입하여 그럭저럭 수습은 되었으나,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독립시키고 불가리아를 반독립시킨다는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일찍이 유럽을 벌벌 떨게 했던 오스만튀르크는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상실과 쇠퇴의 모습만을 보였고, 미래의 터키는 무능한 술탄 정부를 보다 못해 일어난 청년튀르크당과 그 정신을 받든 케말 파샤(Kemal Pasha, 1881~1938)의 손에 맡게지게 되었다.

이 유럽을 뒤흔든 전쟁에서 유독 아무 역할이 없었던 강대국은 프로이센이었다. 그래서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불청객 취급도 받았지만, 이 나라는 크림전쟁의 교훈을 냉철히 받아들여 어느 나라보다도 체계적인 군제 개혁을 이루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외교적 고립을 최대한 활용하여, 먼저 오스트리아를(1866), 그리고 프랑스를(1870~1871) 쓰러트리고 마침내 ‘통일 독일제국’ 건설에 성공한다.

이렇게 크림전쟁은 19세기 중반의 서구 세계를 크게 뒤흔들면서, 여러 나라와 여러 분야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러나 그 전쟁터였던 크림 반도는 짙푸른 흑해의 물결에 씻기며, 장대하고 아름다운 태양의 빛을 받으며, 오늘날도 변함없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어쩌면 사소한 의견 대립으로 전쟁을 부르고, 국가의 위신이나 지도자 개인의 야심 때문에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주저 없이 위험에 던져버리는 바보들도 여전히 있다.

참고문헌


  • William Howard Russell, [The War, From the Landing at Gallipoli to the Death of Lord Ragla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 David Wedgwood Benn, "The Crimean War and Its Lessons for Today"([International affairs]. vol. 88 no. 2. 2012)
  • Brian James, "Allies in Disarray: the Mystery of Why the Crimean War Ended so Suddenly, With Few of the Allies' War Aims Achieved"([History Today] vol. 58 no. 3, 2008)
  • 레프 톨스토이, [세바스토폴리 이야기: 전쟁 소설집](인디북, 2004)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삼지원, 1985)
  •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 마르틴 반 크레펠트, [보급전의 역사](플래닛미디어, 2010)
  • 에릭 두르슈미트,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세종서적, 2001)
  • 리튼 스트레이치, [빅토리아 시대의 명사들](경희대학교출판부, 2003)
  •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 원태재, “크리미아 전쟁과 영국 군사개혁” [사학지] 23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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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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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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