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1) - 남부 아프리카를 피로 물들인 기나긴 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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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9회 작성일 16-02-0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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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대영제국의 군대가 야만인들에게 패할 수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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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스 드리프트 전투(Battle of Rorke’s Drift)에서 줄루족 대부대에 맞서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영국군.



1879년 1월 22일. 아프리카 남부의 나탈(Natal) 지방.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영국군 본대는 이산들와나(Isandlwana)에서 거의 전멸했다.

수십 명의 생존자들만이 이곳 부족이 음진야티(“들소”)라고 부르는 강가에 있는 작은 선교 기지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전투의 생존자들과 이곳에 있는 민간인들을 합쳐보았자 약 400명 정도. 밖에는 4000명 규모의 줄루족 임피(사단)가 초소를 포위하고 있었다.

처음에 줄루족 사단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연히 이 기지의 책임자가 된 차드 소위(Lt. John Chard), 브롬헤드 소위(Lt. Gonville Bromhead), 그리고 보급관인 돌턴(James Dalton)은 기지에 모인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는 16km 떨어진 소도시 헬프메카르(Helpmekaar)까지 이동하여 구원 부대와 합류하느냐, 아니면 기지에 남아 싸우느냐였다.

이들은 부상자들과 보급품을 모두 수레에 싣고 후방으로 이동하기에는 줄루족 임피의 이동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보호 장벽도 없는 개활지에서 줄루족 대부대에게 따라잡힐 가능성이 많았고, 그리되면 몰살이 뻔한 상황이었다.

차드와 브롬헤드는 초소 주위에 장애물을 쌓아 최대한 요새화시키고 움직일 수 없는 중상자를 제외한 모든 인원에게 전투준비를 명령하였다.

1월 22일 오후 4시, 줄루족 임피는 예정대로 나타났고 영국인들은 로크스-드리프트(Rorke’s Drift)라고 불리운 곳에서 줄루족의 공격을 기다렸다.

이산들와나에서 뜻밖의 패배를 당하고 강가의 작은 초소로 쫓겨온 병사들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병사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대영제국의 군대가 야만인들에게 패하고 궁지에 몰릴 수가 있는 거지?”



남부 아프리카의 터줏대감



그러나 로크스-드리프트에 모인 줄루족들은 야만인들이 아니었다. 줄루족은 남부 아프리카의 거대 집단인 반투(Bantu) 계열의 민족이다.

반투족은 이미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나타나기 수천 년 전부터 남부 아프리카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그곳에서 살아왔다.

이들은 농경과 목축, 교역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해왔고, 피그미(Pygmy)나 산(San)족 등 채집 부족이나 수렵 부족을 야만인이라 천시하였다.

피그미들이나 산족은 식량이 부족할 때 반투족들의 농지로 와서 일을 해주고 그 대가로 식량을 얻어갔는데, 시일이 지남에 따라 종속의 정도가 심해졌다.

반투족이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농노(農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반투의 세력은 절대적이었고, 피그미나 산족 등의 집단은 반투인들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반투의 일부 집단은 13세기에 짐바브웨 왕국, 14세기에 콩고 왕국 등 아프리카 역사에서 손꼽히는 대국(大國)들을 건설하였다.

즉, 이들은 영화에서 희화화된 ‘토인’이 아닌, 아프리카에서는 나름대로의 문명인들인 것이다. ‘반투’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이란 뜻이다.

국가이건 군장(君長) 사회 간 부족이건 간에 스스로를 ‘인간’이라 칭하는 모든 집단은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반투인들이 세운 국가가 아프리카 전체를 통일하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사하라 이남은 이렇듯 반투인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다.

소위 ‘블랙 아프리카’의 역사는 곧 반투인들의 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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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경 줄루족의 생활 모습. 그들은 씨족 단위의 마을을 이루어 살았으며 크랄(Kraal)을 중심으로 농경과 목축에 종사했다.



줄루족은 이렇게 남부 아프리카를 주름잡고 있었던 거대 집단인 반투인 가운데 응구니(Nguni)족에서 나왔다. 응구니족은 현재 남아프리카 동부와 남부을 지배하던 반투 계열의 거대 어족(語族) 집단이었다.

강가와 건조한 초원 지대를 중심으로 소규모 농경과 목축에 종사하던 이들은 대개 한 씨족 단위의 마을을 이루어 살았고, 이를 크랄(kraal)이라 불렀다.

크랄은 자급자족을 하는 소규모의 경제 단위로서 남자들은 도구를 만들며 소를 치고 집과 소 우리의 담장을 수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여자들은 농사와 채집, 가사를 맡는다. 가부장의 권위는 엄격하게 유지되었으며 이는 식사를 비롯한 모든 일상에서 적용되었다.

이렇듯 크랄 단위로 자급자족이 이루어지지만, 일반적으로 인근 큰 군장의 세력하에 속하며 동시에 세력권 내의 다른 크랄들과 네트워크를 이룬다.

아울러 각 크랄의 남자들은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시기(우쿠-톰바)가 지나 청소년으로 성장하면(대략 14세~19세) 자신의 크랄을 떠나 대인(大人)이나 인근 군장의 큰 크랄(Great Kraal)에서 ‘복무’하면서 다른 크랄 출신 청소년들과의 유대를 형성하고 집단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큰 크랄은 이후 외부인들에 의하여 군사 크랄(Military kraal)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러한 군사 크랄에서 야생동물과 싸우거나 다른 부족과 싸우기 위한 훈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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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줄루족의 크랄. 크랄을 통해서 줄루의 전사들은 야생동물과 싸우거나 다른 부족과의 전투를 거치며 거칠게 단련되었다.



군사 크랄에서 훈련받는 청년 전사들은 군장의 근위대ㆍ경찰ㆍ군대 노릇을 겸하였다. 암살이라던가 기타 위협으로부터 군장을 보호하고, 부족 내의 범죄자나 불평분자를 체포, 또는 경우에 따라 주살(誅殺)하기도 한다.

아울러 자신의 군장이 다른 군장과 문제가 생겨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을 경우, 군장의 군대로서 다른 군장 세력과의 전쟁에 나섰다.

물론 군장 세력권 내의 크랄 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고 이 경우 전투가 벌어졌지만, 이는 사상자가 적고 포로가 많았으며 포로들은 대개 소를 몸값으로 지불함으로써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군장 세력과 싸울 때는 중요한 재산인 소를 얻기 위한 약탈과 파괴가 심하였으며 부시맨과 같은 다른 종족들과 싸울 경우에는 한 촌락을 전멸시키고 완전히 불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럽인들이 남부 아프리카에 도착하기 전에도 줄루 전사들은 이미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상당히 거칠게 단련되어 있었다.



스멀스멀 들어오는 백인들



아프리카를 다룬 영화는 많지만, 그중에 리처드 버턴(Richard Burton), 로저 무어(Roger Moore), 리처드 해리스(Richard Harris), 하디 크루거(Hardy Kruger) 등이 출연한 1978년 영국 영화 <지옥의 특전대(원제: Wild Geese)>란 특이한 영화가 있다.

영화는 한 부패한 은행가가 용병들을 고용하여 쿠데타로 죽게 된 아프리카 모 국가의 대통령을 구출하게 하는데, 그가 오히려 쿠데타 세력과 손을 잡고 중간에 용병들을 배신하는 바람에 용병들이 스스로 싸워서 그곳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극중 인물 중 남아공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는 피터 코엣치(Pieter Coetzee)가 흑인 대통령을 업고 걸어가던 중 대통령이 “너희 백인들 어쩌고……”라고 불평을 하자 그는 대통령을 나무 옆에 내려놓고는 쏘아붙인다.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대대로 살아왔다고. 나도 너희 흑인(kaffer)들만치나 아프리카 사람이야!”

피터 코엣치의 발언은 관점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의 말대로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자리 잡은 역사가 오래된 것은 사실이다.

반투인들이 지배하고 있던 남부 아프리카에 유럽인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15세기, 포르투갈인들이 아시아로 가는 뱃길을 찾으려고 나섰을 때였다.

포르투갈인들은 마침내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돌아 인도로 향하는 항해로를 개척하였고 아프리카 곳곳에 거점을 남겼다.

최초로 남아프리카 해안을 항해한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o Diaz, 1450?~1500)가 크리스마스에 남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지나쳤다고 하여 포르투갈어로 크리스마스를 뜻하는 ‘나탈(Natal)’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는 그 지역의 지명으로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포르투갈인들이 일단 길을 뚫어놓자 그 뒤를 따라 봇물 터지듯이 유럽인들이 밀려들면서 수천 년간 남부 아프리카에서 지배적인 부족으로 자리잡았던 반투인들의 위세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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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케이프타운의 모습. 케이프 식민지는 유럽에서 백인 이민자들을 대규모로 받아들였고, 그 가운데 케이프타운은 남아공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응구니(줄루)가 지배하고 있던 현재의 남아프리카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백인들은 네덜란드인들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이 희망봉을 따라 인도양을 거쳐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한 후 수많은 무역선들이 이 항로를 오가고 있었지만, 길고 험한 항해 중에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중간 기항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에 1652년에 네덜란드인 얀 반-라이빅(Jan van Reibeeck)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합작하여 세 척의 배에 사람들을 태우고 희망봉 근처에 도착하여 정착지와 항구를 건설하였다.

이 정착지는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대 도시 케이프타운으로 발전한다.

1687년 프랑스에서 루이 14세의 퐁텐블로 칙령(Édit de Fontainebleau)으로 인하여 신교도 위그노(Huguenots)들이 종교적 자유를 박탈당하게 되자 많은 수의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탈출하여 남아프리카에 정착하였고, 남아프리카의 백인 인구는 급격히 늘기 시작한다(참고로 남아공 출신 여배우 샤를리즈 테론은 이때 정착한 위그노 프랑스인의 후손이다).

라이빅이 세운 네덜란드령 케이프 식민지(Kaapkolonie)는 이때 프랑스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면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이들이 정착해 대대손손 살면서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의 후손이 태어나게 되고, 이들은 현재 유럽계 아프리카인 중 최대 집단인 아프리칸스(Afrikaans)의 뿌리가 된다.



케이프 식민지 백인들의 대이동과 기나긴 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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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의 케이프 식민지 지도. 원래는 네덜란드령이었으나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영국이 지배하게 되었다.



케이프 식민지의 인구는 백인과 혼혈인의 수를 합쳐 한때 4만 명을 넘었으나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지배권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1795년에 프랑스가 케이프 식민지의 모국인 네덜란드를 점령하면서 인도 항로를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한 영국이 군대를 상륙시켜 뮈젠베르크 전투(Battle of Muizenberg)에서 식민지 민병대를 격파하고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한 것이다.

나폴레옹 정부와 영국간 관계가 호전되면서 케이프 식민지는 잠시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에 따라 네덜란드의 후신인 바타비아 공화국(Bataafsche Republiek)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면서 영국은 1806년 케이프 식민지를 재점령하였고,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Battle of Leipzig)에서 연합군에게 패한 후 네덜란드 정부는 1814년 영국-네덜란드 조약에 서명하면서 케이프 식민지를 공식적으로 영국에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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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화가 페르니프(Jacobus Hendrik Pierneef)가 1938년 그린 <대이주(The Great Trek)>. 보어인들의 대이주를 묘사한 작품이다.



이후 1820년의 대대적인 이주를 시작으로 영국인들의 대규모 이민이 시작되었고 네덜란드어가 영어로 대체되었다. 아울러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1833년 케이프 식민지에서의 노예해방 역시 이루어졌다.

케이프 식민지의 네덜란드계 백인들은 영어의 강요와 함께 그들의 농장 운영에 필요한 노예들을 ‘박탈’당한 데 불만을 품고 아프리카 내륙으로 대대적인 이주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른바 대이주(Die Groot Trek, (英) The Great Trek)이다.

물론 네덜란드인들이 전부 이주한 것은 아니었고 많은 수가 남았는데, 케이프 식민지에 남은 네덜란드인들은 소위 ‘케이프 더치(Cape Dutch)’로 불리게 되었으며 반대로 내륙으로의 이주를 택한 네덜란드 농민들은 ‘보어(Boer)’라고 불리게 되었다. 보어는 네덜란드어로 ‘농부’라는 뜻이다.

보어인들의 관점에서 대이주는 영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삶을 지키려는 움직임이었지만, 동시에 백인들이 흑인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대이주가 일어나기 불과 10년 전, 수많은 군장들이 나누어 다스리던 있던 응구니족의 영역에 샤카(Shaka)라는 대영웅이 등장하여 ‘줄루’족의 이름 아래 하나의 통일된 왕국을 세웠다. 비록 샤카는 암살되었지만, 줄루족은 샤카의 정복 활동으로 인하여 그 역사를 통틀어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보어인들과 새로이 강력한 군사 국가로서 통합된 줄루족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향후 70년간 남부 아프리카를 피로 물들이는 기나긴 전쟁이 시작된다.

참고문헌ㆍ자료


  • E.A. Ritter, [Shaka Zulu:The Rise of the Zulu Empire]
  • Brian M. Du Toit, [The Boers in East Africa: Ethnicity and Identity]
  • James O. Gump, [The Dust Rose like Smoke: The Subjugation of the Zulu and the Sioux]
  • Louis Creswicke, [South Africa and the Transvaal War]
  • G.W. Eybers (ed.), [Selected Constitutional Documents Illustrating South African History, 1795-1910]
  • 김성남, [전쟁 세계사]
  • www.sahistory.org.z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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