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2) - 백인들이 상대한 것은 통일한 강력한 군사 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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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7회 작성일 16-02-0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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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족, 줄루 왕국으로 통합되다



보어인들이 영국이 지배하게 된 케이프를 탈출하여 나탈(Natal) 지역으로 몰려들고 있을 때, 줄루는 남부 아프리카 최강의 군사 세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이 당시의 줄루를 언급할 때 이들 세력을 ‘부족’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족’은 인류학의 사회 발전 이론에서 등장하는 “국가 이전”의 단계 중 하나이다.

그러나 보어인과 영국 등의 백인 세력과 충돌한 줄루 집단은 이미 부족과 군장사회 단계를 넘어 국왕에 의하여 통치되는 확실한 국가를 세운 상태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줄루 집단을 이야기할 때는 ‘줄루족’이 아닌 ‘줄루 왕국’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모든 국가가 그렇듯이, 줄루 왕국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개의 군장사회로 나누어졌던 줄루족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다.

줄루 집단이 왕국으로 통합되는 데 있어 초석을 놓은 것은 딩기스와요(Dingiswayo)라는 인물이다. 그는 줄루 집단 중 음테트와(Mtetwa)족 추장 조베(Jobe)의 아들이었다.

의심이 많았던 조베는 자신의 아들들이 추장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는 생각에 늘상 두려움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딩기스와요의 형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고, 딩기스와요는 멀리 도주함으로써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곳곳을 방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딩기스와요는 백인들의 마을에 드나들면서 그들의 무기와 생활 방식에 대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음테트와로 돌아와 추장이 된 딩기스와요는 포르투갈인들이 세웠지만 이후 영국 소유의 항구가 된 델라고아(Delagoa)와의 교역을 시작하여 부족의 생산품을 근대적인 물품들과 교환하였다.

아울러 소규모 단위로만 존재하던 전사들을 수백 명 이상의 대부대로 그 편제를 바꾸고, 대부대를 지휘할 지휘관들도 양성하였다. 또한 전사들의 모임이었던 전단(戰團)들을 공식적인 군대로 변모시켰다.

이렇게 양성한 대부대들을 중심으로 딩기스와요는 주변 부족들을 하나둘씩 정복해나갔다. 1810년대에 이르러서는 움폴로지(Umfolozi) 강 서쪽과 남쪽의 모든 부족들을 통합하였다.

비록 정복군주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개명군주였던 딩기스와요는 전투보다는 외교와 협상을 선호하는 편이었으며 무력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그의 부대는 무자비한 공격을 펼치기로 유명했다.



줄루 왕국을 대표하는 전사의 탄생



모든 건국 과정이 그렇듯, 딩기스와요의 통합 작업에 잡음이 없던 것은 아니어서 여러 부족들의 반대가 있었고, 그 중에는 부텔레지(Butelezi)라는 강한 부족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딩기스와요에게 반기를 들었고, 반란 소식을 접한 딩기스와요는 새로이 편성된 대부대를 이끌고 부텔레지족의 크랄로 향했다. 딩기스와요가 부텔레지의 영역에 도착했을 때, 부텔레지족의 추장 풍가셰 역시 전사들을 이끌고 싸우러 나왔다.

딩기스와요는 그가 거느린 대부대의 수적 우위를 과시하면서 전령을 보내 풍가셰에게 항복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풍가셰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그들 부족의 최고 전사를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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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1824년)에 유럽 화가가 그린 샤카의 초상. 큰 키에 다부진 몸, 긴 창(아세가이)과 방패를 든 용맹한 전사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 당시 줄루족 집단 간에는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가장 싸움을 잘하는 전사를 내보내 1대 1의 싸움을 벌이게 하는, 소위 ‘챔피언(Champion)’ 대결의 관습이 아직 남아 있었다.

줄루족 챔피언 간의 대결은 서로 창과 방패를 들고 가까이 다가가면서 창을 하나씩 던지는 것이었는데, 대개는 접근전이 벌어지기 전에 한쪽이 부상을 입거나 도주를 함으로써 승부가 결정되는 식이었다.

부텔레지족을 대표하는 최고 전사는 항복을 종용하는 딩기스와요의 전령에게 걸쭉한 욕설을 퍼부었다.

“이 개잡놈아! 네 이빨 빠진 주인에게 가서 나하고 싸울 만한 놈을 보내라고 해라. 너같이 시끄러운 강아지새끼 말고!”

이에 딩기스와요 측에서 한 청년이 나와 부텔리지 전사와 맞섰다. 부텔레지의 전사는 관습대로 그의 창을 던지면서 달려왔다.

그런데 음테트와의 전사는 창을 던지는 대신 방패로 창을 막으면서 계속 다가왔다.

부텔레지 전사가 마지막 창을 던졌을 때, 음테트와의 전사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달려오더니 부텔레지 전사의 방패를 자신의 방패로 쳐서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상대의 왼쪽 옆구리가 노출되자 짧은 창을 들어 그대로 찔러넣었다. 부텔레지의 전사는 상체를 관통당하는 치명상을 입고 그대로 쓰려져 죽었다.

이를 신호로 딩기스와요 측에서 50여 명의 전사가 내달았고, 자신들의 최고 전사가 죽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부텔레지족 전사들은 그대로 도망하여 크랄 속으로 숨었다.

딩기스와요는 부텔레지의 크랄을 포위하고 다시 한번 항복을 종용하였고 결국 추장인 풍가셰는 딩기스와요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

이 키 크고 체격 좋은 청년은 줄루 사회에서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전투 방식으로 승리를 일구어냈고, 이날의 싸움으로 국왕 딩기스와요의 지대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샤카(Shaka, 1787?~1828)였다.



샤카 줄루의 성장 과정



샤카는 1787 또는 1788년에 응구니족의 한 지파인 엘랑게니(Elangeni)족의 추장인 센장가코나(Senzangakhona)와 인근 추장의 딸인 난디(Nandi)라는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결혼한 부부 사이가 아니었다.

응구니족의 남녀 청년들 사이에서는 ‘아마 흘레이 은드렐라(길에서의 즐거움)’라고 불리는 야합(野合) 풍습이 있었다.

성적(性的) 에너지가 왕성한 시기에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센장가코나와 난디가 만났고, 이로써 난디는 결혼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샤카를 임신하게 되었다.

이럴 경우 대개는 남자 쪽에서 소 3마리를 여자의 가족에게 보냄으로써 보상을 하지만, 샤카의 외조부는 난디와 샤카를 그의 생부(生父)의 부족으로 보냈다.

그러나 샤카의 아버지는 난디를 일시적인 야합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았기에 샤카를 아들로 대하지 않았고, 얼마 후 아버지의 마을에서 쫓겨난 그는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크랄로 돌아오게 된다.

소년 샤카는 다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소를 치는 일을 맡았는데, 남들보다 월등하게 일을 잘하는 바람에 그의 친척 형들로부터 질투의 대상이 되어 온갖 모욕과 괴롭힘을 받아야 했다.

이럴 때마다 어머니 난디는 아들에게 ‘너는 위대한 추장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아들의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그 경위야 어찌되었건 간에 사생아를 낳게 된 난디는 친정 크랄에서도 알게 모르게 천대를 받았고, 이를 견디다 못해 결국은 다른 크랄로 옮기게 된다.

한 번은 난디가 샤카를 보다 나은 환경으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그의 생부의 공작으로 인하여 그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16세 때 샤카는 그의 고모가 살고 있는 음테트와 군장 조베의 예하 소추장(小酋長)인 응고마네의 크랄에 가게 되었는데, 응고마네는 이 모자(母子)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샤카는 응고마네를 대부(代父)로 여기면서 마침내 안정된 환경에 정착하게 된다.



생활이 곧 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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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크랄. 줄루의 군사 크랄은 이것보다 규모는 작았으나,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세계 제국을 이루었던 몽골의 기마 군단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있다. 바로 몽골인들의 생활 자체가 곧 군사훈련이기 때문에 정착 국가의 군대처럼 별도의 격리와 훈련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줄루 왕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청소년들이 일정 기간 대(大)크랄에서 공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정식 훈련이 있다기보다는 대크랄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곧 훈련이었다.

건조한 남부 아프리카의 기후는 마냥 덥지만은 않다. 오히려 남반구의 겨울에 해당하는 6~9월에는 쌀쌀해지는데, 대크랄의 청소년들은 이런 쌀쌀한 아침에 일어나 소들을 몰아 방목지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야외에 머무르며 소들을 쫓아다니면서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을 막고, 소들을 노리는 자칼과 하이에나와 같은 들짐승들과 싸워야 한다.

자칼 정도면 다행이지만 때때로 표범과 사자 등 위험한 맹수들과 맞서야 할 경우도 있다.

맹수들이 나타날 경우 발빠른 누군가가 크랄로 돌아가 어른들에게 알리는 동안, 남은 소년들은 어른들이 나타날 때까지 사나운 맹수로부터 마을의 재산인 소들을 지켜야 했다.

줄루족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위험한 일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으며, 군장이 일주일이나 2주일에 한 번씩 소를 잡아 군사 크랄의 청소년들을 먹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급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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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 전사를 스케치한 그림. 줄루의 소년들은 크랄에서의 훈련을 통해 전투에 필요한 능력을 갈고 닦으며 전사로 거듭나는 법을 배웠다.



아울러 소년들은 여가 시간이면 막대기를 들고 일종의 봉술을 익혔다. 물론 서로의 손을 치는 것과 찌르는 동작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이는 실제 전투에서 적들이 휘두르는 곤봉을 막는 좋은 훈련이 되었다.

아울러 ‘우쿠-구아자-인세마’라는 놀이가 있었는데, 덩굴을 둥글게 말아 ‘인세마’라는 일종의 공을 만든 후 이를 내리막에서 굴린다.

그리고 청년들이 손에 쥐고 있는 나무창을 던져 빠른 속도로 구르는 인세마 덩어리를 맞추는 것이었다. 물론 불규칙하게 구르고 튀는 인세마를 맞추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놀이를 통하여 실제로 전투에서 필요한 능력을 키웠다. 딩기스와요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아 대국을 건설하는 샤카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샤카는 스스로의 존재를 여러 차례 부각시켰다. 그는 앞서 언급한 인세마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청년이 되었을 때는 인세마를 세 번 굴리면 두 번은 꾸준히 맞출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줄루족 목동들은 편을 갈라 모의 전투를 벌이고는 하였는데 그때마다 샤카가 지휘하는 부대가 승리를 거두었고, 자연히 다른 팀의 리더들이 샤카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그는 자신이 속한 군사 크랄의 1인자가 되었다.

아울러 줄루 왕국에서 샤카와 관련하여 구전(口傳)되던 또 다른 영웅담이 있다. 샤카가 19세 때 소를 치는 도중 표범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이럴 경우 대개의 청소년들은 무리를 지어 표범을 구석진 곳이나 나무 위로 몰고 어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나 이때 샤카와 함께 소를 치고 있던 소년들의 수가 많지 않아 표범을 나무 위로 모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지만, 불안하게 포위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표범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내려오려 하자, 공격이 임박했다고 느낀 샤카는 어른들을 기다릴 새 없이 공격에 나섰다. 그는 잠시 뒤로 물러서더니 인세마에 창을 던지던 실력으로 나무 위의 표범을 향해 창을 날렸다.

샤카는 표범의 심장을 노렸지만 창은 표범의 배 뒤쪽에 맞았다. 꽤 큰 상처를 입히기는 하였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화가 난 표범은 당장 나무에서 내려와 샤카를 향해 달려들었고, 샤카는 과감히 창을 내던지고 곤봉으로 무기를 바꾼 다음 표범이 달려드는 순간 그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

불과 19세에 표범을 때려죽일 정도로 용력과 담력이 뛰어났던 샤카는 키 190cm의 당당한 체격을 지닌 전사로 성장하였고, 신임 국왕인 딩기스와요에게 용사가 필요했던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 상대 전사를 처치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키 큰 용사의 활약을 눈 여겨 본 딩기스와요는 그를 왕궁에 불러들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는데, 그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샤카의 영민함에 놀랐다.

딩기스와요는 샤카에게 큰 소 열 마리를 하사하고 100인 부대의 대장으로 삼아 심복으로 만들어 가까이 두었다.



딩기스와요의 최고 전사로 활약하다



샤카의 용맹스런 활약으로 딩기스와요에게 복속된 부텔레지 부족에서는 이날 5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 전사자들 중에는 바쿠자라는 엘랑게니 부족의 청년이 있었다.

엘랑게니 부족은 부텔레지 부족 밑의 하위 부족으로, 당시 엘랑게니의 추장은 여전히 센장가코나, 즉 샤카의 생부(生父)였다.

공교롭게도 바쿠자는 샤카의 생부인 센장가코나의 아들이었고 상위 부족인 부텔레지의 크랄에서 ‘봉사’ 중이었다. 샤카는 본의 아니게 전투 중에 그의 이복동생을 죽인 것이다.

음테트와 부족에 의해 자기 아들이 죽었음에도 딩기스와요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던 센장가코나는 딩기스와요에게 복종을 맹세한다.

단순히 야합의 상대라며 난디를 매몰차게 거절했던 센장가코나는 난디의 아들 샤카가 딩기스와요의 심복이 되자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게 된다.

샤카에게 센장가코나는 자신과 어머니를 내쫓아 고생을 하게 한 장본인이었고, 당연히 생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딩기스와요의 최고 전사가 된 후 음테트와의 선봉장이 되어 이곳저곳 전투를 하러 돌아다니던 샤카는 이제 일랑게니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후 주변의 군소 부족은 모두 딩기스와요에게 정복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샤카는 이 와중에 주변 마을의 소를 약탈하고 있던 거인과 맞섰다 한다.

이 거인은 요술을 부려 그를 상대하는 자들을 홀림은 물론 체격이 몹시 크고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싸웠기 때문에 그와 상대하여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샤카는 이 거인을 죽임으로써 부족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덜어주었고, 그 공으로 왕에게 40마리의 소를 하사받고 대부대의 지휘관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샤카가 생부에 대한 원한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1816년에 센장가코나가 사망하자 엘랑게니의 추장 자리는 또 다른 이복동생인 시구자나(Sigujana)에게 돌아간다. 그러자 샤카는 딩기스와요의 동의를 얻어 시구자나를 암살하고 엘랑게니 부족의 추장이 되었다.



새로운 전투 방식으로 정복왕이 된 샤카



딩기스와요는 군사 지휘자이자 리더로서 샤카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그는 결국 음테트와가 줄루의 부족들을 통일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딩기스와요의 새로운 영토 북쪽으로 은드완드웨(ndwandwe)라는 막강한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딩기스와요의 음테트와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암살자들을 보내 1817년에 새로 정복한 영지를 돌아보고 왕궁으로 돌아오고 있던 딩기스와요의 행렬을 급습하여 그를 암살하였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놓은 부대들로 하여금 딩기스와요의 왕국을 침공하도록 지시하였다. 구심점을 잃은 음테트와 전사들은 영토의 대부분을 잃고 후퇴를 거듭하였다.

위기에 처해있던 음테트와를 구한 것은 다름아닌 샤카였다. 샤카는 은드완드웨의 침공으로 지리멸렬하고 있던 음테트와의 전사들을 규합했다. 그리고 자신이 구상해온 방식으로 부대를 재정비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음테트와을 비롯한 줄루 부족들은 ‘아세가이(assegai)’라고 불리는 긴 창을 쓰고 있었다.

사실 아세가이는 아프리카어가 아니라 아랍어 ‘아즈-즈가야’에서 나온 말로, 아프리카는 물론 북아프리카 무슬림 전사들도 쓰던 창이다.

그러나 샤카는 ‘이클와(iklwa)’ 또는 ‘이크와(ixwa)’라는 짧은 창을 만들어 전사들에게 긴 창인 아세가이를 버리고 짧은 창을 주무기로 삼도록 했다.

이클와는 의성어로서 적의 몸에 박힌 창을 빼는 소리에서 나온 단어이다. 이클와는 던지는 것이 아니라 적에게 가까이 가서 찌르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창날의 길이가 길고 자루가 짧았기 때문에 검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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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가이를 들고 있는 현대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병사. 아세가이는 던지기에는 좋은 무기였으나 접근전에는 불리하였다.





샤카는 긴 창 대신 짧은 창 이클와(이크와)를 사용하여 줄루의 병사들을 돌격ㆍ접근전을 위한 군대로 변모시켰다. 또한 병사들이 맨발로 다니게 함으로써 기동성을 크게 높였다.




그 다음 샤카는 병사들에게 가죽으로 만든 샌들을 버리고 맨발로 다닐 것을 명령했다. 신발을 지고 다니거나 끈에 살가죽이 까지는 것을 막고 병사들로 하여금 빨리 움직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전사들에게 실전 훈련을 시킨 것이다. 크랄에서 생활하면서 익히는 것에다 무자비한 전투 훈련을 더하였다. 이를 통하여 강한 전사들을 길러내려 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마찬가지로, 줄루족 소년들은 6살 때 군대에 들어가 식량을 날라주는 일을 담당하는 것으로 그들의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조금 크면 정식으로 싸우는 법을 배웠다.

오직 훈련과 전투에만 집중을 해야 했고, 이 때문에 젊은 전사들에게는 결혼은 물론 연애도 금지되었다. 줄루의 전사들은 40살이 넘어 은퇴할 때가 되어서야 결혼하고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군대에 들어간 소년들은 약 17세에서 20세 사이에 정식으로 전사가 되었다. 줄루족의 군대는 그 역할과 나이에 따라 나뉘어졌다. 샤카는 청년기의 경험을 토대로 ‘쇠뿔’이라고 불린 전술 대형을 개발하였다.

이 대형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양옆에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뿔’을 이루었다. 이 젊은이들은 빠른 발을 이용하여 적군의 양옆으로 돌아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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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뿔 모양을 한 줄루의 전술 대형. 기동력이 좋은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적군을 둘러싸 적의 측면을 공격하고, 경험이 많은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병사들이 주력부대를 이루었다. 30대 후반~40대 초반의 노련한 전사들은 예비대로 투입되어 적에게 마지막 타격을 입히는 역할을 맡았다.



대형의 가운데를 이루는, ‘쇠뿔’ 진형의 ‘몸통’에 해당하는 부분이 주력부대였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베테랑들로 이루어진 이들은 ‘뿔’이 적의 측면을 치는 동안, 적을 정면에서 공격하여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만약 적의 대형이 무너지거나 아니면 무너지지 않고 완강히 버틸 경우에는 30대 후반에서 40대의 노련한 전사들로 이루어진 ‘엉치’ 부분이 투입되었다. 현대의 전술로 말하자면 ‘예비대’라 볼 수 있다. 무너진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거나 완강하게 버티는 적에게 마지막 타격을 입혀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어린 청년들이 하스타티(hastati), 20~30대가 프린키페(principes), 35세가 넘는 노장들이 트리아리(triarii)로 포진하는 것과 유사한 연령 등급 제도를 바탕으로 군대를 재정비한 것이다.

줄루 왕국의 군대는 현대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연대, 군단, 군의 세 개 체제로 나뉘어 있었으며 지휘의 핵심은 약 400에서 4000명을 지휘하는 ‘은두나(Nduna)’들이었다.

지금의 군대로 말하자면 중대장~대대장 정도의 역할을 하는 은두나들은 부대원들과 같이 전투를 하면서 상급 지휘관들로부터 명령을 받아 작전을 수행하였다. 부대들은 ‘임피’라고 불렸고, 임피마다 그들의 지역이나 동물 이름을 딴 이름이 있었다.

사실 은두나란 줄루 말로 ‘장(長)’을 통칭하는 단어였다. 어떤 특정 계급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군대의 지휘관을 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부대의 장도 어찌되었건 ‘은두나’였기에 외부인들 사이에서는 군대 지휘관을 뜻하는 단어로 굳어진 것이다.

샤카는 이런 새로운 시스템을 바탕으로 군대를 정비한 후, 딩기스와요를 죽인 은드완드웨와 싸우러 나섰다. 2년 간의 전쟁 끝에 결국 은드완드웨를 멸망시키고 1819년에 그 영토를 흡수한다.

이제 지금의 나탈 지역은 모두 ‘줄루’라는 집단의 기치 아래 통일되었고, 새로이 이 지역에 진입하고 있던 백인들은 부족 집단이 아닌 통일된 강력한 군사 집단 ‘줄루’와 싸우게 된다.

참고자료

  • E.A. Ritter, [Shaka Zulu:The Rise of the Zulu Empire]
  • Brian M. Du Toit, [The Boers in East Africa: Ethnicity and Identity]
  • James O. Gump, [The Dust Rose like Smoke: The Subjugation of the Zulu and the Sioux]
  • Louis Creswicke, [South Africa and the Transvaal War]
  • G.W. Eybers (ed.), [Selected Constitutional Documents Illustrating South African History, 1795-1910]
  • 김성남, [전쟁 세계사]
  • www.sahistory.org.z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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