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과달카날 전투 - 일본 항공력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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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1회 작성일 16-02-0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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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투는 1942년 8월 7일부터 다음해인 1943년 2월 7일까지 6개월간 솔로몬 군도의 동남단 과달카날 섬의 육지와 바다에서 있었던 전투다. 과달카날은 일본군이 점령했었던 점령지역의 최 외곽 전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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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도



과달카날의 육지에서 세 개의 주요 전투가 있었고 주변 해역에서 일곱 번의 해전이 있었다. 해전의 다섯 번은 야전이었고 두 번은 항모전이었지만 여기서는 육상전만 다루기로 한다.

그 전해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에 진주만 기습을 당하여 태평양 전쟁에 돌입했던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은 말라야, 필리핀, 동인도[인도네시아] 등을 빼앗기고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은 불리해진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미국과 호주의 차단 작전과 뉴칼레도니아 피지, 사모아 섬까지 점령하는 FS 작전을 입안했다.

일본은 5월에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남방 전선의 주요 기지 라바울보다 더 남쪽에 항공 기지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반면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웨이에서 일본 해군에게 통격을 가하는 대승을 거둔 뒤에 다음 달 7월 남태평야에서 부터 최초의 대반격을 개시하는 방침을 세우고 실행할 작전에 워치타워(감시탑) 작전이라는 작전명을 부여한다.



과달카날 전투의 시작



일본은 1942년 5월에 과달카날 인근 툴라기 섬과 플로리다 섬, 그리고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여 이 도서 지역을 미국과 호주의 해상로를 위협하고 호주를 공습할 전방 항공 기지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일본 해군은 먼저 과달카날 인근 툴라기 섬에 수상 정찰기 기지부터 건설해서 가동했고 이어서 7월에는 과달카날 섬 룽가 곶에 해군 대좌 몬젠이 사령관인 11, 13 두 개의 설영대를 파견하여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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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가 곶에 있는 핸더슨 비행장- 훨씬 뒤의 풍경이다.



툴라기 섬에 900명의 일본 해군 병력이 주둔했었고 7월초에는 과달카날 섬에서 2,200 명의 조선인 노동자를 포함한 2,800명의 규모의 설영대가 작업에 스피드를 내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과달카날 섬의 룽가 곶에 비행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설영대는 밤낮없이 공사를 진행해서 미군이 상륙하기 직전인 8월 5일에는 활주로 제 1 기 공사를 완료했다. 거의 완성 된 것이다.

일본 해군은 비행장 건설이 완료되면 60기의 폭격기와 45기의 전투기를 전개할 계획이었다.



미 해병대의 공격 이동



과달카날 공격은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의 지휘아래 해군과 해병대가 참가하기로 하였다. 과달카날 상륙작전의 주역이 될 미 해병 1사단은 이미 5월에 미 본토에서 뉴질랜드로 이동하여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단장은 맹장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소장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해병 1사단은 8년 뒤 한국전에 참전하여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탈환, 그리고 장진호 탈출의 영웅적인 전투를 전개한 부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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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에 상륙하는 해병대



미군의 상륙 작전에 지원을 해줄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들은 과달카날 섬에 가까운 피지 섬, 사모아 섬, 뉴헤브리디스 제도, 또 뉴칼레도니아 섬 등지로 증원되었다.

뉴헤브리디스 제도가 과달카날 공략작전의 총 사령부가 자리할 곳이었다. 일본은 무선 감청으로 미군의 대병력들이 이 지역에 증파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저 단순히 호주나 뉴기니의 포트 모르스비 방어를 강화하고 있는 병력이라고 추측했을 따름이었다.

과달카날 침공에 동원한 미 호주 군함들은 75척으로서, 이 함대는 7월 26일 피지 섬에 총 집결하여 침공 연습을 하고 상륙 연습으로 손발을 맞추어 본 뒤에 닷새 뒤인 7월 31일 드디어 워치타워 작전의 항해에 올랐다.

함대 사령관은 산호해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했던 기동함대 주역 사령관인 플렛처 중장이었고 상륙 함대 사령관은 리치몬드 K 터너 소장이었다. 상륙 주역 해병 1사단의 총병력은 16,000명으로서 대다수 장병들은 훈련소를 갓 나온 신병들이었다.

소총도 2 차 대전의 미군 상징이 된 M1 소총이 아니라 1차 세계 대전 때 사용하던 구형 스프링필드 소총이었다. 실탄도 단지 10일분만 지급되었다. 전체적인 병참 계획조차 90일 분의 보급이 필요하였지만 60%정도인 60일분만 준비했을 따름이다.



툴라기 섬 기습



연합군 함대가 과달카날 섬에 항해해 가면서 일기가 점점 나빠져 상륙 전날인 8월 6일 밤과 8월 7일 아침에는 일본 해군 초계기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과달카날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상륙 공격 부대는 둘로 나뉘어서 편성되었다. 상륙 작전은 툴라기, 과달카날 섬 두 개의 목표를 한꺼번에 공격하는 것이었다. 두 개의 상륙 공격은 8월 7일 04:00에 거의 동시에 감행되었다.

툴라기 섬과 인근 작은 섬들인 가부투 섬, 그리고 타남보고 섬, 세 섬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은 정확히 889명이었다.

상륙 강습 전에 전투함들의 일제 포격과 함재기들의 공격은 툴라기 섬의 수상 정찰기 15기를 먼저 격파했다. 이어서 3,000명의 해병들이 상륙 공격을 하였다.

일본군은 맹렬히 저항했지만 툴라기 섬은 상륙 작전 개시 당일 점령당했다. 나머지 작은 두 섬은 그 다음 날 점령되었다.

미군의 전면적인 첫 반격을 맞은 세 섬의 일본군은 사실상 생존자가 없을 정도로 맹렬히 저항했었다. 미 해병도 작전중에 122명이 전사했다.



과달카날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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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니카우 강을 정찰하는 해병들



비슷한 시각에 과날카날 섬에도 해병의 상륙이 있었다. 상륙 지점은 과날카날의 코리곶과 룽가곶 사이 해변이었다.

투입된 해병 병력은 해병 1 사단 주력인 11,000명이었다. 작은 섬인 툴라기의 저항이 적극적인데 비해서 더 큰 섬인 과달카날의 저항은 기대 이하로 미미했다.

해병들은 저항 없이 진격하여 첫날 목표인 비행장에서 1km 떨어진 선에서 야영한 뒤에 다음 날도 빽빽한 밀림과 싸우며 진격 오후 16:00에 비행장을 점령했다.

과달카날 설영대 사령관 몬젠대좌 이하 설영대와 경비 병력들은 미 해군의 포격과 폭격에 놀라서 장비 식량등의 보급품을 모두 버리고 5km 떨어진 마타니카우 강변으로 도주하여 방어선을 폈다.

이들이 버리고 도주한 유류품에는 35량의 트럭과 전파 탐지기 2대,제빙 시설, 식량, 연료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군의 폭격에 일본군 13명의 전사했는데 설영대는 사체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일본의 해공[海空]반격



7일 상륙 작전 당일과 다음날 먼 북동쪽 라바울에서 일본 해군 폭격기들과 전투기들이 긴급 출격하였다. 일본기들은 500마일이라는 전에 날아보지 못한 장거리를 날아 과달카날 상륙 부대를 공습했으나 성과는 크지 않았다. 수송선 한 척을 격침했을 따름이다.

첫 날의 출격에서 일본 격추왕 사카이 사부로가 처음 만난 미 해군기들을 상대로 잘 싸웠지만 중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는 바다에 뜬 미 상륙 부대를 보고 이 전쟁은 진 전쟁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첫날 일본은 36기를 잃었고 미군은 14기를 잃었다. 일본 해군은 연속해서 출격했다.



사보 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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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이 있었던 사보섬 해상



미 기동함대 사령관 플렛쳐 중장은 이틀간의 일본 항공대 공격을 겪고 자기 항모 부대가 일본 항공대에게 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상륙 3일만인 8월 8일 공격 거리 밖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항모의 엄호가 불가능하자 상륙 함대 사령관 터너 제독도 보급품의 절반밖에 하역되지 않은 형편에 수송선단과 호위함대를 같이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8일 야간 철야 작업은 최대한의 보급품과 중장비를 양륙하고 9일 아침 철수하고 말았다.

바로 그날 밤 상륙함대를 호위하던 연합군 순양함들은 사보 섬 해역에서 라바울에서 긴급 출동한 일본 미카와 중장 지휘하의 일본 순양함 7척의 야습을 받았다.

세 척의 미국 순양함과 한 척의 호주 순양함이 격침되고 한 척의 미 순양함과 두 척의 구축함이 대파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후에 사보 섬 해전이라 불리는 해전이다.

다음날 주간에 예견되는 미 해군의 항공 공격을 두려워한 미카와 제독은 공격 후 더 확대 타격을 중지하고 함대를 뒤돌렸다. 터너 제독은 크게 놀라 전 함선을 8월 9일 까지 전 과달카날 해역에서 철수시켰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륙 해병



이미 상륙한 해병대는 해상에서의 보급과 화력 엄호없이 남겨진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과달카날에 상륙한 해병들은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건설 중인 비행장 주변에 방어 진지를 만들고 방어선내에 이미 상륙한 보급물자를 옮겨놓고 일본군이 미완성으로 남겨두고 도망친 비행장의 완성 공사에 집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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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 몇 주 뒤의 핸더슨 비행장



보급 물자 운반과 정리에만 나흘이 걸렸다. 비행장 공사는 해병에 의해 비행장이 완전히 확보되는 대로 바로 개시하였다. 비행장은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다.

해병들은 대부분의 건설 장비를 도망친 일본군이 남겨 놓은 것을 그냥 사용했다. 공사 중인 8월 12일, 과달카날의 비행장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뇌격기대를 이끌고 일본 기동 함대에 저공으로 육박하다가 전사한 해병 소령 로프톤 R. 핸더슨 소령의 이름을 추모해서 핸더슨 비행장이라 명명되었다.

상륙 열흘이 안 된 8월 18일 비행장은 가동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 비행장은 과달카날 방어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양륙[揚陸]한 식량이 부족한 해병들은 단지 5일분의 식량만이 있을 뿐이었다. 해병들은 폭격에 놀라 식량을 버리고 도망친 일본군의 식량을 활용하여 14일분의 식량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식량을 아끼기 위해서 하루 두 끼씩만 배식하여야 했다. 시설과 환경등이 불비하여 일부 해병들은 열대병에 감염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은 더 비참한 환경에 있었다. 몇몇 한국인 징용 노동자들이 미군에게 항복했지만 대부분의 조선인과 일본군은 미 해병 방어진의 서쪽 마타니카우 강 서쪽 강변에 방어선을 치고 코코넛등으로 겨우 연명하는 실정이었다.



해병 정보대의 전멸과 보복 작전-1차 마타니카우 전투



8월 8일 라바울에서 달려온 일본 구축함 한 척이 야음을 이용해 113명의 해군 육전대 증원 병력을 마타니카우 강변에 내려놓고 되돌아갔다.

8월 12일 사단 정보 참모 프랭크 괴테지 중령이 지휘하는 25명의 정찰대가 룽가 방어 지역의 서쪽에 수색 상륙을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정보대원으로서 정찰의 주 임무와 함께 보조 임무로서 항복하려고 하는 일단의 일본군을 접촉하는 것이었다.

포로가 된 일본군이 동료들 중에 항복하고자 하는 병사들이 많다고 허위로 자백한 정보를 그대로 믿었던 것이 해병들을 잠복에 걸리게 하였다.

상륙하자마자 정찰대는 잠복해있던 일본 육전대에게 공격을 당해 거의 전원이 전사했다. 8월 19일 사단장 밴더빌트 장군은 보복 작전을 단행하였다.

그는 1사단 5연대1)의 3개 중대를 동원하였다. 한 개 중대는 해안선 서쪽으로 전진 마타니카우 강 하구의 모래톱을 건너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제 2의 중대는 강의 1,000미터 내륙에 있는 마카니카우 마을에 있는 일본군을 급습하였다.

일본군은 저격병까지 동원해서 맹렬히 저항을 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오후에 철수하였다. 세 번째 중대는 상륙 보트로서 더 서쪽 배후의 코쿰부나 마을을 습격하여 마카니카우 마을에서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 5 연대는 인천 상륙 뒤에 서울 탈환 작전 때 한국 해병대와 함께 중앙청을 점령한 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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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상륙



두 개 마을을 성공적으로 점령하였던 3개 해병 중대는 일본군 65명을 죽이고 철수했다. 이 전투는 마타니카우 강의 1차 전투로 불린다. 이후 이 강 언저리에서 몇 번의 전투가 있었다.



CACTUS 항공대의 활동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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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tus 항공대의 F 4 F 와일드 캣 편대



8월 20일 미 해군의 호위 경항모 롱 아이랜드가 두 대 비행단의 해병 항공기를 핸더슨 비행장으로 수송해왔다. 한 개 비행단 기종은 19기의 F4F 와일드 캣이고 또 다른 비행단 기종은 12기의 SBD 돈트레스 급강하 폭격기였다.

최전선에서 일본군을 맞서 싸운 이 최초 전개 해병 비행단들은 태평양 전사에서 캑터스 항공대라는 영웅적인 전투 기록의 수훈 부대가 된다. Cactus란 선인장을 말하는데 과달카날을 뜻하는 미군의 암호명이었다.

해병 항공대는 도착 다음 날부터 매일 계속되는 일본 폭격기들을 요격하는 임무로 출동하기 시작하였다. 8월 22일에는 미 육군 항공대가 파견한 5기의 P-400기 에어라코브라기들과 조종사들이 핸더슨 비행장에 도착하여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치키 지대의 상륙



과달카날의 미군 상륙에 대한 일본군 대본영의 첫 대응은 라바울의 17군 사령관 하쿠다케 하루키치 중장에게 과달카날을 신속히 탈환하라는 지시로 시작되었다.

당시 17군의 과달카날의 북서쪽 보르네오 섬에서 미 호 연합군과 힘든 전투를 하고 있어서 파견할 여유 병력이 별로 없었다.

여유병력이란 팔라우에 있는 가와구치 기요다케 소장이 지휘하는 35 보병여단뿐 이었지만 그 산하 연대는 필리핀과 보르네오 증파중에 있있다.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급해진 17군은 괌 섬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대본영 직할 이치키 기요나오대좌의 28연대 일부 병력을 과달카날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의 연대 병력뿐만 아니라 해군 요코스카 5 특별 육전대가 별도 제 2 파로서 조금의 시차를 두고 출항하였다.

그 외 17군 산하로서 사방에 흩어진 부대들을 점차 연합함대 사령부가 있던 트럭 섬과 육군의 방면군 사령부가 있던 라바울을 거쳐 과달카날에 증파되는 이동에 들어갔다.



일루 강의 참패



일본군의 반격 부대로서 8월 19일 01:00에 과달카날에 최초로 도착한 이치키 지대는 연대 선발 부대로서 917명의 병력이었다.

포는 단지 보병포 2문에 공용화기로서 기관총만 장비한 수준으로 병사들은 실탄 250발과 7일분의 식량만 지급받았을 뿐이다.

이들 병력은 일본 구축함으로 수송되어 룽가 해병 방어 구역에서 동쪽에 있는 타이부 곶에 도착했다. 상륙 행동은 물론 미군의 공습을 우려해서 19일 밤 자정 지나서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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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 강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



이치키 지대의 상륙 지점은 해병의 방위 외곽선에서 약 9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그의 상륙 지점에서 반대되는 룽가 해병 방어지역 서쪽에 8월 16일 요코스카 제 5 특별 육전대 선견 부대가 미리 상륙해서 핸더슨 비행장에서 도주했던 설영대와 조우했지만 이치키 지대의 비행장 건너 반대편에서 있었던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치키 지대는 상륙후 거점을 만들고 이틀 뒤에 밀림을 뚫고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출발전부터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 해병의 규모가 단지 2,000명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 해병 부대의 규모를 잘못 판단한 이치키 대좌는 미군들이 일루 강이라 부르는 작은 하천 선에 배치된 해병대를 정면 공격해서 돌파하고 비행장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핸더슨 비행장에서 도망친 해군 설영대가 방어선을 치고 있는 비행장 서쪽 방면이 아니라 반대쪽 동쪽 방면 선이었으니만큼 해병들의 방어태세도 조금은 느슨하리라고 쉽게 짐작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미군의 호주군이 관할하는 해안 감시원[coast watcher]으로부터 18일 이치키 지대의 상륙을 보고받고 중간인 일루 강에 강력한 방어선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미군들이 M-3 전차 세대와 포병부대, 그리고 자동 화력을 집대성해서 집중시켜 놓은 죽음의 강이었다.

8월 21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일본군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미군은 아직 어두운 새벽에 강을 건너는 일본군에게 불의 비를 쏟았다.

이치키는 물론 일본 병사 어느 누구도 전혀 경험하지 못한 맹렬한 화력의 응전이었다. 일부 간부들이 적의 화력에 놀라 일단 후퇴 후 재공격을 건의했지만 이치키는 완강히 거부하고 맹공 계속을 명령하였다.

일본 보병의 장기이기도 하지만 전근대적인 총검 돌격이 현대의 자동화기 앞에 그 문제점을 노출하는 순간이었다.

명령에 의해 화력을 무릅쓰고 연달아 강 속에 들어간 일본군은 화력으로부터 엄폐할 방법이 없었고 총상을 입으면 익사를 피할 수가 없어서 인명 피해율이 매우 높았다. 무모한 공격은 돈좌되었다.

아침이 되자 해병들은 더 이상 공격의 여력을 잃고 도피하여 피신하고 있던 일본군들을 추격하였다.

정글 사이의 추격전에서 치열한 화력이 빗발치며 일본군을 쓰러뜨렸다. 장갑 상륙 차량까지 동원한 미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내의 일본군을 사살했다.

연대장 이치키 대좌가 할복 자결을 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의 전사 경위는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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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키 대좌



이 전투에서 이치키 지대는 그 존재가 소멸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전날 밤 해안에 상륙한 917명의 이치키 지대원 중에서 미군의 불같은 화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미군에게 포로가 된 15명을 제외하고 단지 128명이었다.

생존자 128명 중 100명은 이치키가 해안에 남겨놓고 온 지원 병력이었다. 생존자들은 상륙했던 타이부 곶으로 돌아가서 라바울의 17군 사령부에 이치키 지대의 대패배와 이치키의 전사들을 타전하고 증원병과 차후 부대 행동에 대한 지시를 기다렸다.

일루 강 전투는 일본군의 참패로 끝났지만 이미 17군이 파견한 더 많은 후속 병력들이 이미 과달카날로 항해중이었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부가 있는 트럭 섬에서 출항한 이치키의 28 연대 잔여병력 1,400명과 해군 요코스카 제 5 육전대 병력 500명을 승선시킨 세 척이 수송선이 과달카날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 세 척의 수송선은 다나카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13 척의 구축함들로 구성된 함대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이 함대는 이치키 지대가 전멸하다시피한 전투가 있었던 날로부터 불과 사흘 뒤인 과달카날에 병력을 상륙시킬 예정이었다. 목표는 물론 일본군이 건설중에 미 해병에 빼앗긴 핸더슨 비행장의 탈환이었다.



동 솔로몬 해전



이 함대의 최대의 적은 미군의 항공력이었다. 연합함대 사령관은 나구모 중장의 기동부대에게 현장으로 달려가서 항공지원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한후에 새로 편성한 나구모 부대는 세 척의 항모가 있었다. 나구모 기동 부대는 21일 트럭 섬을 출항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플렛쳐 중장이 지휘하는 세 척의 항공모함이 과달카날로 이동해왔다. 두 항모 부대는 8월 24일과 25일에 걸쳐 격돌했다.

동 솔로몬 해전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해전에서 양쪽 다 피해를 입고 철수하게 되었다. 미군은 항모 엔터프라이즈가 대파되었다. 일본은 경항모 류조와 수송선 한 척을 잃었고 수송선 여러 척이 큰 피해를 입었다.



격화되는 과달카날 상공의 항공전



과달카날 방어를 위해서 중요한 육상 항공력 강화는 신속히 진행되었다. 8월말에는 핸더슨 비행장에서 작전하는 미군기는 64기가 되었다.

9월 3일 해병 제 1 전투 비행단장 로이 S. 가이거 준장이 전투 비행단 지휘부 인원들과 같이 도착하여 핸더슨 비행장에 전개한 해병 해군 육군의 항공 부대를 모두 통합 지휘했었다.

본격적인 과달카날의 항공전의 막이 올랐다. 과달카날의 일본군을 패주 시키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등 공신인 캑터스 항공대가 이제 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일본군 섬멸의 항공전 서막을 올렸다.

라바울에서 날아오는 일본 항공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의 공습은 매일 반복되었다. 사실 라바울과 과달카날의 거리는 500마일이나 넘어서 제로 전투기에게는 거의 한계의 출격거리였었다.

무리한 출격을 되풀이 하였고 핸더슨 비행장의 항공력은 나날이 증강되어 일본 항공기들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8월 26일에서 9월 5일 사이 격추 된 미군기 15기였지만 일본기는 19기였다. 왕복 8시간이나 걸리는 장거리 비행이었고 그 왕복 비행거리가 1,120마일이나 되다보니 특히 단발 전투기인 제로기에게 무리한 출격이었다.

더구나 일본 폭격대가 거쳐 날아가야 하는 라바울과 과달카날 섬의 중간 부겐빌 섬과 뉴조지아 섬등에 배치한 호주인 해안 감시원들의 활동이 정보의 위력을 발휘 과달카날의 미군들은 미리 알고 준비를 할 수가 있었다.

일본 해군의 항공기 소모와 조종사 감소는 극심해져갔다. 과달카날 상공의 제공권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비관론이 일본 조종사들 사이에 일기 시작했다.

과달카날의 하늘과 바다에서 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해병 1 사단장 밴더그리프트 소장은 핸더슨 비행장이 있는 룽가 방어지역의 방어를 강화하는 노력에 심혈을 기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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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더슨 비행장 주변의 강화된 미 해병 방어구역[ 룽가 페리메터]



21일과 10월 3일 사이 밴더빌트 사단장은 툴라기와 가부투 섬에 상륙해서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점령하고 있었던 에드슨 중령의 1 낙하산 대대를 포함해서 3개 대대 1,500명의 병력을 핸더슨 비행장 방어를 위해 이동 배치하였다.



코쿰부나 부락 공격



재배치된 병력중의 한 개 대대는 8월 27일 마타니카우강 서쪽 코쿰부나 부락 부근에 상륙하였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19일 행해졌던 첫 번째 마타니카우 강 하구 급습처럼 이곳의 코쿰부나 부락을 기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번의 성공적인 기습과 달리 이번에는 별로 성과가 없었다. 험한 정글과 고온의 악조건 속에 일본군의 간헐적인 저항과 극복하며 전진해간 해병은 다음날 아침 목표를 점령했으나 일본군은 모두 철수한 뒤였다.

해병들은 아무 성과없이 보트 편으로 부대로 복귀하여야 했다. 저항하던 일본군 20명이 전사했고 해병 3명이 전사했다.

작은 미군 해군 선박들이 룽가 해변에 도착하여 식량과 실탄 등 필수품을 양륙하였고 9월 1일에는 392명의 토목 엔지니어들을 싣고 와서 핸더슨 비행장을 더 확장하고 개선하는 공사를 가능케 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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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5.30.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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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5 연대는 인천 상륙 뒤에 서울 탈환 작전 때 한국 해병대와 함께 중앙청을 점령한 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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