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과달카날 전투 (2) - 핸더슨 비행장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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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3회 작성일 16-02-0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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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특급의 구축함 보급



한편 일본은 이치키 지대의 전멸에 이어서 본대인 가와구치소장의 35여단을 파견하였다. 그 선견대인 가와구치 지대[支隊]는 여단 소속 124연대를 기간으로 한 4,000병력이었다.

8월 23일 트럭 섬에 집결한 가와구치 여단은 일단 라바울로 수송되었다. 그곳에서 여단은 속도 빠른 구축함을 타고 쇼트랜드 군도를 거쳐 과달카날로 직행하기로 하였다.

동 솔로몬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다나카 라이조 장군은 속도 느린 수송선으로 과달카날에 대한 수송 작전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하고 병력 수송에 구축함의 사용을 건의하였다.

오로지 쾌속의 구축함만이 하루 밤 안에 과달카날에 접근해서 병력을 상륙시키고 밝기 전 미군의 항공 공격권 밖으로 탈출을 할 수가 있었다.

일본 해군 구축함만으로 행해진 과달카날 보급 작전은 곧 미군들에게 ‘도쿄 특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반면 일본군은 자신들의 작전을 자조적으로 ‘생쥐 수송’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의 작전은 오로지 인원과 약간의 보급품만을 수송할 따름이지 중장비나 차량, 실탄이나 식품 같은 것의 여유있는 보급은 불가능했다.

전투 임무의 구축함을 보급품 수송에 사용하는 것도 큰 낭비였으며 일본 해군의 전투력에 큰 구멍을 뚫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연합군의 소극적인 야간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밤에는 솔로몬 군대 해역은 일본이 주도력을 쥐고 공세를 가할 수가 있었지만 주간에는 핸더슨 비행장 항공대의 삼엄한 초계활동으로 과달카날 인근 해역 200마일 안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이런 낮과 밤의 주도권 상황은 과달카날 전투가 계속되는 몇 달간 계속되었다.



일본군의 1차 총공격- 가와구치 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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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구치 소장- 과달카날 작전중 해임되었다.



8월 23일부터 9월 4일까지 일본 해군은 속도 빠른 경순양함과 구축함, 그리고 초계정으로 가와구치 여단 주력 포함해서 약 5,000명의 병력을 타이부 곶에 야간 상륙시켰다.

8월 31일 여단장 가와구치 소장은 사령부 요원과 함께 타이부 곶에 상륙하였다. 일본 육군이 자랑하는 발동정 부대가 룽가 해병 방어 구역의 서쪽 해안에 가와구치 여단 소속 1,000명의 병력을 내려놓았다.

9월 7일 상륙을 완료한 가와구치는 최초의 공격 명령을 내렸다. "9월12일 20:00 과달카날 비행장 공격을 개시하라." 공격 작전은 그의 상륙한 여단 병력을 세 개의 방향에서 핸더슨 비행장으로 전진하여 공격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군의 장기인 ‘야간 기습’에 그 성공의 핵심을 두었다. 오카아키대좌가 이끄는 좌익대(124연대 2대대)가 서쪽에서, 이치키 연대 잔존 부대를 이끄는 구마 우익대가 동쪽에서, 가와구치가 3,000명의 중앙대가 남쪽에서 정면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9월 7일 가와구치의 부대원 대부분은 타이부 곶을 떠나 해안선을 타고 룽가 반도로 침투하였다. 250명의 병참을 지키는 후방 부대를 빼놓고 가와구치 부대 전원이 공격에 참가하는 총공세였다.



미군의 사전 탐지



한편 미군도 일본군 대부대가 상륙한 낌새를 채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가와구치 상륙 해안에 배치되었던 호주인 해안 감시원 마틴 클레멘스는 원주민 정보원으로부터 타이부 곶에 가까운 타심보코 부락에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신설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미 해병대에 통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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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슨 중령의 타심보코 마을 기습



메릿 에드슨 대대장은 이를 기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9월 8일 선박으로 타이부 곶을 급습한 에드슨 대대는 타심보코 부락을 쉽게 점령하였다.

일본군들은 모두 근처 정글로 도망쳤다. 이곳이 바로 가와구치 부대가 내륙으로 진공하면서 남겨놓고 난 보급 기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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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정글의 미 해병



타심보코 부락에서 에드슨의 부대는 가와구치 여단이 비축한 엄청난 양의 식량과 군수 보급품 그리고 탄약과 의약품등을 노획하였다.

에드슨 부대는 중요 서류와 개인 수송이 가능한 물품만 남기고 그 노획 물자들을 모두 파괴하고 귀환하였다. 서류 문서를 검토한 결과 약 3,000명의 일본군이 상륙하였고 현재 공격을 위해서 이동 중임이 밝혀졌다.



에드슨 능선의 혈전



에드슨 대대장은 해병 1 사단 작전장교 제랄드 C. 토마스 중령과 토의 끝에 일본군이 핸더슨 비행장을 공격 목표로 이동할 때의 그 통로와 매복 지점을 예측해냈다.

그것은 핸더슨 비행장 남쪽에 있는 폭 1,000미터의 능선으로서 룽가 강과 평행으로 달리고 있는 지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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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슨 능선



이 능선에는 그 때까지 병력 배치가 없었던, 방어적으로 빈 곳이었다. 9월 11일 에드슨 대대의 840명 병력은 이 능선에 지급 배치되어 참호를 파고 방어선을 쳤다.

그날 밤에 일본군이 나타났다. 가와구치 중앙대인 1개 대대가 룽가 강과 능선 사이를 공격해서 해병 1개 중대를 능선 위로 철수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다음 날의 야간 공격을 위해서 그날 밤은 공격을 중단하고 물러났다. 다음날 저녁, 가와구치 소장의 3,000병력이 경포 지원 아래 에드슨 대대의 방어선에 몰려왔다. 공격은 해가 지자마자 시작되었다.

가와구치 여단 다무라 소좌의 아오바 연대 소속 병력 일부가 능선의 서쪽 에드슨 대대 우측을 쳤고 일시적으로 돌파에 성공하였다.

돌파구를 뚫은 일본군은 더 전진했지만 능선 북쪽에 배치된 해병들에게 저지당했다. 가와구치 여단의 2대대 두 개 중대가 능선 남쪽에서 돌격해서 해병들을 능선 중앙에 있는 123고지라는 곳으로 밀어냈다.

이 고지 일대에서 해병들은 포병의 지원을 받아 밤새 격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여러 번 총검 돌격을 해왔다.

일본군의 일부 돌격은 해병 진지를 뚫고 들어와 육박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지형의 우세와 화력의 우세로 일본군은 결국 이 고지 점거에 실패했다.

능선을 통과해서 비행장 외곽 일본 건설회사 창고까지 진출한 부대도 있었지만 이 돌파도 봉쇄되었다. 구마 대대나 오카 대대도 룽가 방어선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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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슨 능선에서 전사한 일본군



다음날 가와구치는 남은 일본군을 이끌고 서쪽 마타니카우 계곡에 있는 오카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서 정글 속을 닷새나 걸어야했다.

이 전투후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극심한 기아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후에 에드슨 능선이라 불린 이 능선 전투에서 에드슨 대대는 104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나 가와구치 여단은 850명을 잃어야 했다.



가와구치 여단 패배의 여파



다음 날인 9월 15일 가와구치는 해병들에게 패배했던 사실을 라바울의 하쿠다케 중장에게 보고했고 하쿠다게는 이 충격적인 사실을 일본의 대본영에 다시 알렸다.

대본영의 회의에서 일본 육군과 해군은 비로소 과달카날이 태평양 전쟁의 중대한 분기점이 될 전략적 지역이 되고 있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다.

하쿠다케는 점점 중요성이 부각된 과달카날과 한창 격전이 진행되고 있는 뉴기니 섬 양쪽에서 승리할만한 병력과 물자를 보낼 수가 없다고 보고 대본영의 재가를 얻어 보르네오 섬에서의 공세를 중단시키고 과달카날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결과 뉴기니 섬의 오웬 스탠리 산맥의 코코다 고개를 넘어 힘든 진격을 계속해서 전략 요충지 포트 모르스비의 30마일 안에까지 진공하였던 일본군은 ‘과달카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공세를 중단하고 철수하라는 긴급 지시를 받고 철수했다.

덕분에 미국과 호주군의 전략 요충지 포트 모르스비가 살아날 수가 있었다.



난공불락으로 강화된 해병 방어 구역



과달카날에 집중하기로 한 하쿠다케는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증파하여 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한편 과달카날 가와구치의 부대가 마타니카우 계곡으로 철수한 후에 미군들은 다시 룽가 반도의 핸더슨 비행장 방어망을 한층 더 다듬으며 강화했다.

9월 14일 해병 1 사단장 밴더빌트 장군은 툴라기 섬에 잔류하였던 해병 2연대의 3대대를 과달카날로 이동시켜 배치하였다.

월 18일 연합군 수송선단은 해병 7연대와 추가 병력을 합친 4,157명의 병력을 과달카날에 상륙시키고 이들과 함께 137대의 차량과 의약품, 연료, 탄약, 식량, 그리고 공병 장비들이 양륙하였다.

밴더빌트 사단장은 이들 병력과 장비로서 핸더슨 비행장 주변에 더욱 더 단단하게 방어망을 구축할 수가 있었다.

이제 미 해병은 헨드슨 비행장의 항공대의 지원이 더해지면 일본군이 군단 병력, 즉 하쿠다케의 17군 전체가 일시에 몰려와도 격퇴할 만큼 막강해졌다.

방어망 증가와 더불어 인사 이동도 단행하여 그간 전투 능력이 의심되는 지휘관들을 모두 보직 이동하고 그 자리에 전투에서 인상적인 능력을 보인 젊은 장교들로 임명하여 무형의 전투력을 보강했다.

신임 연대장중에는 에드슨 능선에서 잘 싸워서 5연대장으로 승진한 에드슨 중령도 있었다.

9월 14일에서 27일까지는 과달카날의 악천후로 일본군의 공습이 없었다. 이 기간을 이용하여 일본은 85기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라바울로 증파했고 미군도 23기의 전투기와 공격기를 핸더슨 비행장에 증파했다.

9월 20일에는 일본군이 라바울에 117기의 전투용 항공기를 보유하였지만 미군은 핸더슨 비행장에 71기의 전투용 항공기를 주둔하고 있었다. 이 불안한 휴전은 날씨가 맑아진 9월 27일 일본의 폭격기들이 과달카날 공격을 재개함으로서 깨졌다.



일본군의 병력 증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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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다케 중장



일본은 이치키 지대와 가와구치 여단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즉시 핸더슨 비행장을 재탈환할 병력 증파에 착수하였다.

9월 11일 가와구치의 아오바 4연대 1대대 주력이 과달카날 섬 서쪽 끝, 핸더슨 비행장 넘어 가와구치의 반대편 해안에 상륙하였다.

1대대는 상륙이 늦어서 가와구치의 공격 작전에 참여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 부대는 마타니카우 계곡의 일본군과 연결이 되어서 가와구치의 미래 전투력이 되었다.

구축함대들의 도쿄 특급은 14,20,21,24일 연달아서 필요한 식량과 탄약을 공급했고 더해서 아오바 연대에서 후방에 남아있던 1대대 장병 280명의 병력까지 카밈보 해안에 상륙시켰다.

한편 라바울의 17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2 보병사단과 38 보병사단을 뽑아 과달카날로 증파하기로 하고 이 사단들을 9월 13일 라바울로 집결시켰다.

17군은 10월 20일로 예정된 핸더슨 비행장 점령 작전에 이 두 개 사단에서 17,500명의 병력을 동원할 계획을 수립중이었다.

10월 초 마루야마중장이 지휘하는 2사단은 과달카날로 이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하쿠다케 사령관을 포함한 하쿠다케 17군 사령부와 같이 과달카날로 이동하였다.

이 사단의 작전 계획은 핸더슨 비행장을 돌파하여 가와구치 여단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미일 양군의 마지막 결전 준비



가와구치 군이 밀집한 마타니카우 계곡과 핸더슨 비행장 사이에 아직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일본군들이 있었다. 일단 유사시에는 위협이 될만한 존재들이었다.

해병 사단장 벤더그리프 장군은 이들을 소탕하기로 하였다. 일본 낙오병 소탕 작전의 첫 시작은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세 개의 해병 대대를 동원하여 실시되었다.

하지만 마타니카우 계곡 서쪽으로 전진한 해병 부대는 오카아키 노스께 대좌 부대에게 격퇴당한 것은 물론 마타니카우 서쪽에 있는 크루즈 곶에서는 해병 세 개 중대가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고 구축함의 포격 지원을 얻어 탈출할 수가 있었다.

10월 6일과 9일 사이에도 미군의 토벌 작전이 또 있었다. 1차 작전보다 더 큰 해병 병력이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서 막 도착한 일본군 마루야마 2사단장 마루야마 마사오 소장의 2 사단 소속 연대를 기습해서 다수를 사살하고 패주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이 두 번째 해병 작전에 큰 피해를 입고 마타니카우 동쪽의 진지를 버리고 서쪽으로 후퇴했다.

해병들이 가한 두 번의 선제공격은 병력까지 증파하여 핸더슨 비행장 탈환의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것이었다.

10월 9일에서 11 밤사이, 해병 2연대 1대대는 룽가 교두보에서 동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아오라 만의 구라부수와 코이로투마리아 사이에 설치 된 두 개의 일본군 전초기지를 공격해서 35명의 일본군을 죽였지만 해병들도 17명의 해병 전사자와 전투에 참여하였던 세 명의 미 해군 요원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미 해병과 육군은 일본군이 큰 공세를 취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워싱턴에 건의하여 병력 증파의 재가를 받았다.

이번에 과달카날에 증파되는 부대는 해병이 아니라 육군이었다. 10월 8일 아메리칼 사단의 164연대 병력 2,837명이 대기하고 있던 뉴칼레도니아에서 승선했다. 이들의 도착 예정일은 10월 13일경이었다.



케이프 에스퍼란스 해전



이 수송선단을 노만 스콧 소장이 지휘하는 미국 64 기동 함대 네 척의 순양함들과 다섯 척의 구축함들이 호위하였다. 일본도 비슷한 시기인 728명의 병력과 포병과 탄약을 수송할 예정이었다.

병력의 후송에 두 척의 수상기 모함과 6척의 구축함이 동원되었다. 과달카날 도착 예정은 10월 10일 이었다.

수송 함대와는 별도로 일본 해군의 아리토모 고토 제독이 지휘하는 세 척의 순양함과 두 척의 구축함이 핸더슨 비행장을 고폭탄으로 포격하는 임무를 띠고 출동하였다.

공교롭게도 미일 함대는 10 월 11일 자정에 과달카날 근해에서 조우하여 격렬한 해전을 벌였다. 해전에서 일본 순양함 한 척과 구축함 한 척이 격침되고 순양함 한 척이 대파되었지만 미군도 구축함 한 척이 격침되었고 순양함 한 척과 구축함 한 척이 대파되었다.

후에 케이프 에스퍼란스 해전이라고 불리는 해전이다. 아리토모 제독은 중상을 입고 다음날 10 월 12일 사망하였다.

그러나 과달카날 수송부대는 스콧 함대에게 들키지 않고 병력과 보급품을 모두 양륙할 수가 있었다.

한번 성공에 고무된 일본 해군은 현지의 목마른 병력 증파요청에 크게 도박을 하기로 한다. 쾌속의 구축함이 아닌 저속의 수송선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대량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13일, 16, 230연대의 4,500명 병력과 중포 그리고 1 개 중대의 탱크를 적재한 6척의 수송선이 8 척의 구축함 호위를 받으며 쇼트란드 섬을 출발해 과달카날로 향했다.



핸더슨 비행장 포격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는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전함 공고와 하루나로 하여금 핸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게 하였다. 10월 14일, 과달카날 근해로 침투한 양 전함은 핸더슨 비행장을 주포로서 포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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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하루나



두 전함은 과달카날 전역동안 일본 해군이 거둔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다. 16,000미터로 접근한 두 척의 전함들은 비행장 지역에 973발의 14인치 고폭탄을 마구 퍼부었다.

포격으로 비행장 활주로와 항공대 보유 연료 전량, 그리고 90기의 항공기중에 48기를 파괴하였고 6명의 조종사 포함 41명을 전사하게 했다. 한 시간 23분 동안 포격을 완료한 두 척의 전함들은 트럭 섬으로 철수해버렸다.

비행장이 입은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요원들은 활주로 하나를 가동상태로 복구했고 에스피리투 산토에 배치 된 17기의 SBD와 20기의 와일드캣들이 전력 보완을 위해 핸더슨 비행장으로 급파되었다.



일본 수송 함대의 해안 돌격 양륙



일본 수송선단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탐지한 핸더슨 비행장의 항공대는 두 번이나 수송함대를 공격했지만 함선 파괴에는 실패하였다.

일본의 수송선단은 10월 15일 야간에 과달카날 타사파롱가 해변에 도착하여 병력을 상륙시키고 적재한 막대한 화물을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화물의 양륙 작업은 그 양이 너무 많아서 다음 날 주간에도 계속되었다.

핸더슨 비행장의 공격기들이 연속으로 날아올라 공격했지만 수송선의 세 척만 격침했을 뿐이다. 나머지 세 척은 그날 밤 모든 짐을 다 부리고 과달카날을 떠났다.

리스크가 큰 수송 작전이었고 세 척의 화물선을 잃었지만 일본은 파견 병력 전원과 화물의 3분의 2를 수송했다. 14일과 15일 밤에도 일본 순양함들이 비행장을 포격했으나 피해는 경미하여 서너기의 항공기만 격파되었다.



일본군의 2차 총공격



일본은 10월 1일에서 10월 17일까지 악전고투하여 15,000명의 병력을 과달카날 파견에 성공하여 과달카날에는 하쿠다케 중장 17군 휘하 20,000명의 병력이 핸더슨 비행장을 탈환하고 미군들을 과달카날에서 몰아낼 공격을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은 공격 작전 수립 단계에서 해안선에 배치된 미군 방어선은 돌파가 힘들 것이라고 보았다. 일본군은 대신 주력을 핸더슨 비행장 남쪽에 배치하고 공격하기로 하였다.

일본군 2사단은 마루야마 마사오 중장의 지휘아래 3개 연대 -연대당 3개 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2사단 병력들은 정글을 뚫고 도보로 이동 핸더슨 비행장 남쪽 룽가강 동쪽 강변에서 전개한 후에 공격을 개시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공격 날짜는 10월 22일 야간으로 결정되었다가 상황이 어렵게 되자 23일로 바뀌었다.

미군의 주의를 주공격에서 돌리기 위해서 17군의 중포병과 5개 대대의 보병[2,900명]이 서쪽 해안선에서 양동작전을 겸한 선제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 있는 미군의 병력이 많아 봐야 만 명 남짓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과달카날에 전개한 미군 병력은 23,000명이 넘었었다.

마루야마의 2사단 병력이 룽가 해병 방어 구역를 남쪽에서 공격하기 위해서 기동로가 필요하였다.

일본 공병 1개 중대가 과달카날에서 가장 험한 지형, 습지와 정글, 수 없이 작은 개천을 뚫기 위해서 24km의 통로를 만들었다. 이는 나중에 마루야마 통로라고 불리게 되었다.

16일과 18일 사이 마루야마의 부대는 미군의 남쪽에 접근하기 위한 이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글은 무척이나 험해서 이들의 이동을 방해하였다.

공격개시일인 23일에도 부대는 여전히 이동 중에 있었다. 공격 예정일인 23일 저녁까지 전개가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하쿠다케 사령관은 공격 개시일을 하루를 연기하여 24일 19:00로 변경하였다.



스미요시 지대의 양동 작전 실패



미군은 마루야마 부대가 남쪽에서 은밀히 접근하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한편 핸더슨 비행장 서쪽에서 양동 작전을 개시하기로 한 스미요시 지대는 작전이 24일로 연기되었다는 통보는 받았으나 이미 정글 깊숙이 파고 들어간 예하 부대들에게 작전 변경 명령을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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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멸한 일본군 전차 부대



그의 부대들, 4연대의 두 개 대대와 제 1 독립 전차 중대의 9량의 전차들은 23일 저녁에 예정된 공격선인 마타니카우 하구에 전개를 끝내고 명령받은 공격 시간에 미군 방어진지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진지에 있던 미 해병들은 포병 화력과 박격포, 그리고 자동화기를 퍼부어 전차 9량을 모두 파괴하고 일본군에게 막대한 인적 손실을 보게 하였다. 반면에 방어중이던 해병들은 가벼운 피해만을 입었을 뿐이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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