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과달카날 전투 (3) -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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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3회 작성일 16-02-0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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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사단의 총공격



10월 24일 오후 마루야마의 부대는 드디어 미군의 룽가 곶 방어선의 남쪽에 도착, 전개를 끝내고 공격에 들어갔다. 이틀간 여러 번의 정면 돌파를 꾀했지만 큰 병력 손실만 입고 실패하였다.

이곳에서 방어하던 미 해병은 루이스 체스티 풀러가 지휘하는 7 연대 1대대와 로버트 홀 중령이 지휘하는 미 육군 164연대의 1대대였다.

이들은 37mm 직사포들의 산탄을 비롯, 박격포와 자동화기의 화력을 총동원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막았다.

몇 개의 작은 일본군 부대들이 미 방어선을 뚫고 룽가 방어구역내에 들어왔으나 2,3일내에 모두 소탕되고 말았다.

1,500여명의 마루야마 부대원이 전사한 반면 미 해병들은 60명만 전사했다. 한편 이 전투들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은 핸더슨 비행장을 공습한 일본기 14기를 격추했고 경순양함 한 척을 격침하였다.

양동작전으로 실시되었던 비행장 서쪽 공격의 스미요시 부대도 큰 피해만 입고 후퇴에 급급해야 했다.

양방향의 전투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은 뒤에야 하쿠다케 사령관은 26일 08:00에 공격 작전의 전면 중지와 후퇴를 명령하였다.

마루야마 부대 생존자의 절반은 마카니카우 계곡의 위쪽으로 철수했고 쇼지 도시나리 대좌의 230연대는 해병 룽가 방어 구역의 동쪽에 있는 코리 곶으로 이동하였다.

마루야마의 2사단은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너무 컸고 보급도 없는데다가 열대의 풍토병까지 덮쳐 전투력이 급감하였다. 더 이상의 공격작전은 꿈도 못 꾸고 소극적인 방어 태세에만 급급해야 했다.



산타 크루즈 해전



과달카날의 육상전이 대치상태에 들어갔을 때 바다에서 한 해전이 터졌다.

과달카날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구하려면 미 해군부터 격멸해야한다는 원론적인 결론을 내린 야마모토는 항모부대를 진격시켜 미군 항모부대와 해전을 벌였다. 10월 26일 격돌한 산타 크루즈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미 항모 호넷이 격침하고 엔터프라이스가 대파된 미 해군의 패전으로 끝이 났다.

전술적으로 일본이 이겼지만 일본 항모 부대는 항공기와 전투기 손실이 엄청나서 다시는 과달카날 공방전중에 도전장을 내밀지 못했다.



미군의 반격



핸더슨 비행장 방어에 성공하여 승기를 잡은 해병 사단장 밴더그리프 장군은 공세의 폭을 넓혔다.

그는 그간 능력이 인정된 메릿 에드슨 연대장에게 해병 6개대대와 육군 1개대대를 주어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마타니카우 강 서쪽 지역을 토벌 작전에 내보냈다. 진격의 최종 목포는 코쿰보나 마을이었다. 이곳은 크루즈 곶 서쪽에 있었다.

에드슨 중령의 부대에 맞선 일본군은 나카구마 노마스 대좌의 4 보병연대였다. 인원 손실이 대거 발생했던 부대로서 실제 병력은 정규 연대 병력의 휠씬 아래를 밑돌았다.

미군의 공격 작전은 11월 1일부터 개시되었다. 11월 3일 크루즈 곶의 일본군 방어망을 힘들게 뚫은 미군은 코쿰보나의 점령을 바로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일본군 사단의 증파



그러나 그 시각 다른 미군 부대가 룽가강의 동쪽 코리 곶에서 새로 상륙한 일본군과 조우해서 격전을 벌였다.

새로 나타난 일본군을 경계한 밴더그리프 사단장은 11월 4일 마타니카우 작전을 중지시키고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400명이 전사한 반면 미군은 71명이 전사했다.

코리 곶에 새로 출현한 부대는 전투 피해로 약체화된 쇼지 대좌의 부대를 증원할 목적으로 11월 3일 새벽 구축함편으로 급파된 6개 중대 병력이었다.

일본군 출현의 정보를 보고받은 밴더그리프 사단장은 허만 하네켄 중령의 1 개대대 병력을 코리 곶으로 보냈다. 일본군의 새 병력은 미군과 한판 벌여 하네켄 대대를 비행장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화가 난 밴더빌트는 후퇴한 하네켄 대대에 풀러 중령의 해병 대대와 육군 164연대의 두 개 보병 대대를 합친 대병력으로 다시 코리 곶을 공격하게 명령하였다. 증강된 미군이 그 곳에 도착할 무렵 쇼지의 부대도 코리 곶에 도착했다.

미군은 가바가 개천 일대에서 포위 섬멸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은 사령부의 지시로서 코쿰보나로 긴급 이동하여 포위의 위협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11월 12일 미군은 탈출한 쇼지의 부대원들을 제외한 새로 상륙한 부대를 모두 포위하여 전멸시켰다. 일본군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하여 거의 전사하고 말았다.

코리 곶에서 미군은 쇼지가 유기하고 달아난 많은 중장비들을 노획하였다. 한편 미군은 핸더슨 비행장이 있는 룽가 곶에서 40마일 거리에 있는 아오라 만 해안에 비행장 한 개를 더 증설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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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라 만에 상륙한 칼슨 대대



에반스 칼슨 중령 지휘하의 2 강습대대의 2개 중대가 이 비행장 건설에 착수한 해군 공병대 500명 병력을 경비하기 위해서 선박 편으로 이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일부 보병도 증가된 해병들은 비행장 공사 해군 인원이 도착하는 현장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본군의 방해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힘들게 착수했던 이 공사는 11월 말에 부적당한 지형의 문제가 제기되어서 포기하였다.

1월 5일 공사에 별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밴더그리프는 그의 강습 대대원들을 다시 지휘하여 룽가 곶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도보 복귀라는 특명을 동반하고 있었다.

룽가곶과 아오라 만을 출발하여 룽가곶까지 도보로 수색하면서 코리 곶에서 도주한 2-3,000명 추정 쇼지 부대의 패잔병들을 토벌하라는 어려운 임무 부여 명령이었다.

칼슨의 대대는 29일간 수색과 전투를 반복하며 귀환하였다. 이 기간 몇 번의 전투를 겪었는데 미군은 500여명의 일본군을 섬멸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며 전투력 감소를 겪던 쇼지의 부대는 칼슨 강습부대의 집요한 수색과 토벌에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어 마타니카우로 돌아가는 중간 지점인 룽가 강변에 도달한 11월 중순에는 그의 부대원은 1,300명 정도만 남아있었다.

쇼지가 마타니카우 서쪽의 17군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의 단지 7-800명의 부대원만이 쇼지와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겨우 살아 돌아온 쇼지 부대는 마타니카우 상류와 오스텐 산에 방어선을 치고 있던 일본군들에게 분산 배속되어 방어 임무를 하게 했다,

도쿄 특급은 11월 5,7,9일에 새 병력을 실어 와서 과달카날의 병력을 증강시켰다. 이 부대는 일본군 사노 다다아키[佐野 忠義] 중장이 지휘하는 38사단의 선견대였다.

38 사단 사령부는 11월 10일 과달카날에 상륙하였고 사단 주력은 11월 14일 수송을 개시하였다. 28 연대 병력을 포함한 38사단이었다.

새 병력은 크루즈 곶과 마타니카우 일대에 방어선을 치고 미군에게 대항했다. 무장과 영양 상태가 비교적 좋은 이들은 11월 10일과 18일 격렬한 전투를 치루며 미군들의 진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군과 일본군은 크루즈 곶 서쪽에서 다음 6주간을 대치했다. 과달카날의 17군은 해군에게 비상 요청을 하였다.

11월중에 핸더슨 비행장을 반드시 탈환하겠으니 추가 병력과 보급품을 보내달라는 말이었다.

야마모토 사령관은 11척의 수송선으로 아직 투입하지 못한 38 보병사단의 7,000명 병력과 탄약 식량을 싣고 라바울을 출항하여 과달카날로 직행하게 하였다.

두 척의 전함, 기리시마와 히에이가 일본군 상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하루 전에 핸더슨 비행장을 포격할 임무를 안고 출동했다.

미국의 정보 당국은 일본의 비행장 공격 준비가 활발한 낌새를 채고 11월 11일, 2개 대대의 병력과 대규모의 물자를 과달카날로 증파했다.

일본의 항공 공격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과달카날에 도착한 미함대는 병력과 물자를 대부분 양륙하였다.



1차 과달카날 해전



아베의 전함 함대가 오는 것을 미리 탐지한 미 해군은 사보섬과 과달카날 중간 해협에 잠복했다가 이들을 공격했다.

해전은 지근거리에서 벌어져서 일본군도 큰 타격을 입었지만 미 해군도 사령관 갤라한 제독과 스캇 제독이 전사했고 여러 척의 전투함이 손실되었다.

해전은 일본이 이겼지만 전함 히에이가 대파되어 과달카날 포격 작전은 취소되었다. 대파된 히에이는 힘들게 돌아가다가 다음 날 미군기에게 격침당했다.



일본군 사단의 마지막 증원 시도



핸더슨 비행장 포격에 실패한 야마모토 제독은 병력 수송의 선단과 호위함대에게 쇼트랜드 섬에서 하루를 대기하다가 과달카날로 직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아베가 실패한 핸더슨 비행장 포격을 곤도 노부다케 중장에게 명령하여 다시 함대를 구성해서 15일 다시 시도하게 하였다.

11월 14일 새벽 02:00 미카와 군이치 제독의 순양함 부대가 과달카날 핸더슨 비행장에 야간 포격을 가해서 성공했다.

하지만 핸더슨 비행장이 입은 피해는 적었고 여전히 가동이 되는 상태였다.

미카와 부대가 포격임무를 완수하고 날이 새기 전에 라바울로 철수하자 11척의 수송선단은 핸더슨 비행장이 기능 불능으로 판단하여 대담하게 육박 접근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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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송선의 해안선 육박 상륙



선단은 14일 하루 종일 주간 항해를 해서 과달카날로 접근해갔다. 이것은 핸더슨 비행장 항공대의 공격권에 들어선 것이다.

미군 항공대는 집요하게 철수하는 미카와 부대와 접근하는 다나카의 수송선단을 동시에 공격해서 순양함 한 척과 수송선단 11척중에 7 척을 격침하였다.

그러나 다나카는 밤이 되자 남은 네 척의 수송선을 계속 과달카날로 직행시켰다. 그날 밤 곤도의 야간 포격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이를 믿은 것이었다.



2 차 과달카날 해전



이날 야간 포격을 위해 침투하던 곤도 함대의 전함 기리시마는 급히 사보 해협에 달려와 대기하고 있던 리 소장의 미 전함 와싱턴에게 일제 사격을 받고 14일 자정 무렵에 격침되었다.

미국과 일본 함대의 차이인 레이더의 유무가 이런 참담한 피해를 일본군에게 안겼다.

이 해전에 곤도의 부대는 구축함 한 척을 잃은 대신 미 구축함 세 척을 격침하는 선전을 했지만 기리시마의 격침으로 핸더슨 비행장 포격 임무를 중단하고 철수하였다.



실패한 38사단의 상륙 시도



곤도의 부대가 철수해버리자 15일 04시 과달카날 타싸파롱가 해변에 도착한 네 척의 수송선들을 해변에 돌격하여 좌초시키고 양륙을 시도하였다.

빠른 하역을 완수하기 위해서 배들을 희생한 것이다. 미군의 항공력은 그런 극단적인 수송 작전도 용납하지 않았다.

6시쯤 미 초계기가 이 해변의 일본 수송선들을 발견했다. 곧 공중 공격이 가해져서 화물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네 척의 수송선 모두가 격침되었다. 38사단 병력중에 단지 2,000-3,000명 정도만 상륙하였다.



고개드는 과달카날 철수



과달카날의 일본군 지휘부는 병력과 보급품 부족으로 11월의 핸더슨 비행장 탈환 작전을 포기해야 했다.

이때부터 대본영의 육군과 해군 간부들 사이에 각각 과달카날에서 철수하여야 한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서로가 체면을 지키느라 이를 공론화하지 못했다.

11월 26일 이마무라 히토시 대장이 라바울에 부임해왔다. 그의 지휘하에 제 8 방면군이 라바울에 사령부를 두고 신설되었고 하쿠다케의 17군과 뉴기니의 18군도 그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신임 이마무라의 지휘방침의 최고 중요한 것은 과달카날의 탈환 작전의 계속이었다. 하지만 미군이 뉴기니 인근 비행장이 있던 부나 섬에 공격하자 이마무라는 방침을 바꾸었다.

부나가 점령당하면 라바울이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 될 수가 있었다. 그는 과달카날의 탈환은 물론 핸더슨 비행장 공격도 모두 연기하였다. 그는 과달카날이 속한 솔로몬 제도의 작전보다 뉴기니 작전에 몰두하기로 하였다.



아귀도(餓鬼島)가 되어가는 과달카날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계속적인 보급 차질로 식량 의약품 실탄부족에서 오는 질병과 영양부족에 시달렸다. 식량에 대한 군기마저도 실종하여 식량 보급소가 약탈당하기도 하고 개인의 피습을 받기도 하였다.

나날이 강화되는 연합군의 해공군 전력으로 구축함에 의한 보급도 힘들어지자 11월 후반에는 잠수함들을 동원해서 식량을 공급했으나 물론 턱없이 부족하였다.

일본은 중부 솔로몬 군도 섬 여기저기에 비밀 발동정 기지를 만들고 이 기지들을 거쳐 발동정들을 과달카날로 왕래시키는 수송 작전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것도 막강한 연합군의 항공력과 미해군 PT 정들의 방해 때문에 실패하였다.

과달카날은 후에 일본인이 기술한대로 아귀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11월 26일 과달카날의 17군 사령부는 이마무라 방면군 사령관에게 과달카날 군에 곧 파국적인 식량 기근이 온다고 보고하였다.

일선의 일부 부대는 6-7일 동안 아무 보급도 받지 못했었고 후방 부대는 기존 지급 식량의 삼분지 일만 받아야 했다.

되든 안 되든 이제는 해상 전투임무에 투입되어야 할 구축함들에게 다시 식량 배달의 임무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타싸파롱가 해전



과달카날 수송을 책임진 8함대 사령과 다나카 라이조 소장은 구축함들의 생존성을 높이고 수송의 성공률을 높이려면 수송을 담당하는 구축함들의 과달카날 해변 정박 시간을 최단시간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하역의 최단시간내 완수를 목적으로 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큰 드럼통들을 깨끗이 청소하여 이 안에 식량이나 의약품등을 적당히 넣고 이것들을 밧줄로 연결하여 과달카날 해변에 투하하면 둥둥 떠 있는 드럼통을 과달카날 일본군들이 회수하는 것이었다.

드럼통 해상 수송 작전은 11월 30일 야간에 첫 실행이 있었다. 6척의 구축함이 8척의 구축함 호위를 받으며 이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첫 수송 목표는 200개에서 240개의 드럼통을 해중에 투하하는 것이었다.

미 해군의 할제 중장은 이 작전을 통신 감청으로 파악하고 카를턴 H 라이트 소장 지휘 하에 네 척의 순양함과 네 척의 구축함을 이 해역에 파견하였다. 이때도 미 함대의 레이더가 큰 역할을 했다.

미 함대는 다나카의 드럼 수송 함대를 원거리에서 발견하고 어뢰를 발사했으나 타이밍을 놓쳐버려 명중탄을 얻지 못했다.

어뢰 명중에 실패한 미 함대는 포문을 일제히 열어 일본 함대 선두 구축함을 명중시켜 격침시켰다.

그러나 이 해전중에 일본군의 구축함들은 어뢰로 반격하여 미 해군 순양함 노샘프턴을 격침시키고 순양함 미네아포리스와 뉴올린스 펜사콜라를 대파시켰다.

해전의 와중에 다나카는 공들인 드럼통 투입 수송 작전을 취소하고 급히 철수했다

12월 7일까지 하쿠다케의 부대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연합군의 항공 공격으로 매일 50명의 장병을 잃어갔다.

다나카는 12월 3일, 7일 11일 계속 보급을 시도했으나 별다르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야간 작전에서 미국의 작은 어뢰정에 일본 구축함 한 척이 격침되는 드문 일도 발생했다.



과달카날의 철수 결정



일본해군과 육군은 눈치만 보다가 상황히 참담해지자 먼저 해군이 12월 12일 과달카날 철수를 제안하였다.

대본영은 라바울의 이마무라 8방면군 사령관에게 사나다 조이치로 대좌가 이끄는 대본영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는 라바울에 가서 상황을 살핀 뒤에 과달카날 철수를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는 12월 26일 육군 상층부의 재가를 얻었다.

먼 과달카날 대신 보급이 쉬운 뉴기니 섬에 전력을 집중하자는 결론 뒤의 일이었다.

12월 28일 육군 참모총장 스기야마 원수는 해군 군령부장 나가노 오사미 제독과 함께 일왕을 알현하고 과달카날 철수를 상주하여 그 해말인 12월 31일 허락을 받았다.

육군과 해군은 극비리에 철수 작전 계획을 세운다. 작전명은 ‘게[テ]’ 작전이었다. 철수 개시일은 1943년 1월 말로 예정되었다.



미 육군 14군단의 공세



한편 과달카날의 일본군이 힘을 쓰지 못하고 해병들도 지치자 12월 9일부터 해병 1사단을 철수시키고 대신 육군 14군단이 지역 작전을 인계받았다.

밴더빌트 사령관은 철수하고 그를 대신한 과달카날의 육군 지휘관은 알렉산더 패치 장군이었다. 이 군단은 해병 2사단과 육군 25사단과 아메리칼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제 과달카날의 미 병력은 무려 50,000명으로 늘어났다. 12월 18일 새 부대는 오스텐 산을 요새화하여 둥지를 틀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굶주렸지만 격렬히 저항을 해댄 일본군에게 고전하다가 1월 4일 공세는 돈좌되고 말았다.

1월 10일 연합군은 다시 공격을 개시해서 오스텐 산과 그 인근 능선들 씨 호스(sea horse) 능선과 갤롭핑 호스(galloping horse)의 능선을 동시에 공격했다.

굶어가는 일본군의 저항도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연합군은 1월 23일까지 세 고지들을 다 점령할 수가 있었다.

동시에 미 해병들은 섬의 북부해안에 상륙하여 상당한 지역을 확보하였다. 이 공세에서 일본군은 약 3,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레넬섬 해전



미 정보당국은 일본군측에 무언가 부산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감 잡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공세를 위한 병력 증파로 잘못 판단하였다.

과달카날 사령관 패치 장군은 일본군의 새로운 공세 정보를 크게 신뢰하지 않고 기존 병력만으로 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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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양함 시카고



1월 29일 할제 제독은 역시 공세 가능성 정보를 받고 과달카날에 대규모 보급 선단을 파견했다. 순양함 함대가 이 선단을 호위하였다.

하지만 과달카날 인근 해역에서 일본 해군의 폭격기에게 발각되었다. 호위함대의 순양함을 발견한 일본 폭격기들은 순양함을 발견하자 즉각 어뢰 공격을 가했다. 미 순양함 시카고가 명중하여 대파되었다.

다음날 더 많은 일본 폭격기들이 몰려와 대파되어 겨우 항해하고 있던 시카고를 뇌격하여 격침시켰다. 이것이 레넬섬 해전이다.

놀란 할제 제독은 보급 항해를 중단시키고 그의 함대들을 과달카날의 남쪽 산호해에 집결시켰다. 일본이 대공세를 시작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군 철수 개시



1월 14일 과달카날 섬의 일본군의 철수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날 철수를 엄호할 1개 대대가 도쿄 특급으로 과달카날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하쿠다케에게 과달카날 철수가 결정되었다는 통보가 간 것도 이때였다.

일본군은 철수 엄호 병력만 파견한 것이 아니라 철수 작전을 엄호할 항공기들을 라바울과 부겐빌에 일대에 증파하였다.

한편 일본 17군은 과달카날의 서쪽 해안으로 철수했다. 새로 파견된 대대가 추격하는 미군들의 공세를 차단하였다.

2월 1일 미카와 중장의 8함대가 하시모토 신타로 대좌 지휘아래 대부분은 38사단의 패잔병들인 4,935명을 승함시켜 과달카날에서 벗어났다.

이 철수 작전 전에 작은 해전이 벌어져 미국과 일본이 각각 구축함 한 척씩을 잃었다.

2월 4일과 7일 양일의 야간에 하시모토의 구출 함대는 과달카날에 남아있는 일본군 거의 전부를 무사히 철수시켰다.

과달카날의 냉혹한 전투 환경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가 하시모토 구출 함대에게 구출된 일본군은 모두 10,652명이었다.

연합군은 일본의 대규모 반격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수 작전을 눈치 채지 못했었고 저지하지도 못했었다.

2월 9일이 되어서야 과달카날에 일본군 부대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패치 사령관은 과달카날의 완전 평정을 선언하고 작전을 끝맺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미군은 최초의 도서 탈환 작전을 성공시켜 먼 도쿄로의 첫 발자국을 내딛게 되었다.



과달카날 전투의 평가



연합군에게 과달카날 전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전쟁의 이니셔티브를 거머쥐었다는 것이었다. 과달카날 섬을 잃은 뒤에 일본은 감히 태평양 어디서도 공격을 꿈꾸어보지를 못했다.

전략은 방어에 급급하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일본에게 과달카날은 전력, 또는 국력을 갉아먹은 거대한 블랙홀과 같았다.

선박이나 항공기의 손실만 해도 거대했다. 6개월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만 25,000명이었다.

과달카날의 전략적 큰 의미는 일본 군부가 유한한 국력에도 불구하고 무한하게 전선을 확대한 팽창주의의 풍선이 터지는 계기가 되었다는데에 있다.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훌륭한 인품과 리더십으로 부하들에게 존경받는 지휘관이었지만 국력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나게 전선을 확대한 전략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그를 변호하는 측은 야마모토가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위해 적 함대와 결전이 필수적이며 이런 전선 확대는 그런 계기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했지만 호주의 점령같은 발상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국력에 무지했었기 때문에 나온 소리였다.

과달카날 전장으로 시야를 좁혀서 본다면 미군의 막대한 물량공세에 대책이 없었던 일본의 형편이 전쟁의 패배를 예견한 것이 되었다.

풍부한 전쟁 물자 동원의 능력이 있었고 보급에 지장이 없었던 미국에 비해 보급에서도 미군의 방해로 막대한 어려움을 겪은 일본은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 결과 미군은 병력 집중이 되었지만 축차 투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은 집중된 대부대에 분산된 소부대로 정면 돌파의 승부를 꾀하다가 마멸되어 버렸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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