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산타크루즈 해전 (2) - 항모 호넷의 침몰과 일본군의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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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5회 작성일 16-02-0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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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항모 엔터프라이즈에 공격을 가하는 일본 함재기



미 항모부대는 일 항모 부대로 향하던 공격대로부터 일 공격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받아서 이미 그 내습을 알고 있었다.

미 항모 부대는 상공의 요소요소에 배치 된 전투 항공 초계기들인 와일드캣기 37기를 일본 공격대 쪽으로 유도하며 공습 대피 준비를 했다.

일본 항공 공격대 사령관은 원거리에서 호넷 기동대를 발견하였다. 같은 시각에 엔터프라이즈 항모 그룹은 운 좋게도 비를 내리는 열대성 소나기 구름을 만나서 그 속으로 진입하는 바람에 일본 공격대에게 발견되지 않았다.

잠시 후 미 함대의 레이더 스크린에 이들 내습하는 일 공격대가 잡혔다. 거리가 65km였다.

산타 크루즈 해전에서 비운의 최후를 맞았던 호넷의 불행은 공중 전투 초계기들의 유도에서부터 그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통신의 오류와 유도 담당자의 실수로 유도를 시도했었던 37기의 공중 전투 초계기들중에 단지 몇 기만이 제대로 유도되어 호넷을 덮친 일 공격대를 요격할 수가 있었다.

단 몇 기의 활약으로 일본 급강하 폭격기 수 기를 격추시킬 수가 있었지만 일본 공격대 주력은 벌떼같이 곧바로 호넷에 쇄도하였다. 호넷과 호위함들의 전 대공화력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러나 별로 방해를 받지 않고 호넷에 육박한 일본 공격대 1 파 20기의 뇌격기들과 16기의 급강하 폭격기들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9시를 넘어선 시간, 일본 급강하 폭격기 한 기가 250kg의 철갑탄을 호넷의 비행 갑판에 투하하여 명중시켰다. 철갑탄은 함체 하부 3개 층을 관통하고 함체 아래 내부에서 폭발하였다. 이로 인해 60명이 전사했다.

거의 동시라고 할만한 시각에 호넷에 두 발째의 명중탄이 발생했다. 이 폭탄은 고폭탄이었다. 명중과 함께 폭발해서 비행갑판에 3m의 구멍을 내고 함상의 승조원 30명을 전사시켰다.

간발의 차이를 두고 세발째 폭탄이 첫 번째 폭탄이 명중한 곳에 명중하여 3층의 함체를 뚫고 함체 내부에서 폭발했으나 기적적으로 사상자는 없었다.

호넷에 돌격하던 일본 급강하 폭격기 한기가 호넷의 대공포화에 명중했다. 비행 불능이 된 사토오 병조장의 급강하 폭격기는 호넷의 연돌에 돌격하여 자폭했다.

그의 자폭 돌격은 7명의 전사자를 발생시키고 불붙은 항공유를 호넷의 통신 데크에 뿌려 화재를 발생시켰다.

급강하 폭격기가 선제 폭격을 하고 있는 사이 20기의 뇌격기가 육박했다. 이번에는 뇌격기들이었다. 뇌격기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서 호넷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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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넷에 자살 돌격을 하는 사토오 병조장기





사토오 병조장기가 호넷을 격돌, 폭발하는 순간





97식 함상 공격기(뇌격기)




절정에 달한 대공 사격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 뇌격대는 공격을 강행하여 두 발의 어뢰를 명중시켜 호넷의 엔진을 정지시켰다. 한발이 우현 전부 기계실 대공 포탄 탄약고에 맞아 대량의 침수가 발생하며 엔진이 정지하였다.

동력을 잃은 호넷이 속도를 잃으며 정지하려고 했을 때 대공포화에 맞아 파괴된 한 기의 일본 급강하 폭격기가 해면 위를 저공으로 날아와 호넷의 함체 측면을 들이받았다.

피격당한 곳은 전투기의 항공유 저장 탱크가 있는 곳이었다. 인화와 함께 대화재가 유발되기 시작했다. 호넷을 공격했었던 일 급강하 폭격대는 해면에 정지해있는 호넷을 남겨두고 모두 떠났다.

이 첫 파 공격에서 33기의 일본 함재기와 6기의 미군기가 격추되었다. 전사자 중에 1 파 공격대장이며 진주만 공격의 베테랑 무라다 소좌도 있었다. 맹렬한 화재가 발생한 호넷은 소화가 급선무였다.

호위하던 구축함 세 척까지 합류하여 바닷물을 대량 살포하여 10시경 화재는 진압되었다. 동력을 잃은 호넷을 견인하기 위해서 미 중순양함 노샘프턴이 달려들어 견인 로프를 연결 작업을 하는 중에 일본 공격대 2파가 다시 몰려왔다. 이번에는 뇌격기 부대였다.

피해를 입지 않았던 호넷의 자매함 엔터프라이즈는 공중 전투 초계기와 양 함에서 출격했었던 정찰기등을 수용하느라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분주하던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는 접근하는 일본 항공대를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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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호넷



엔터프라이즈는 항공기 착륙 작업을 중지하고 출격 준비를 서둘렀다. 졸지에 착륙할 곳이 없어지고 연료도 다 떨어진 여러 함재기들이 해면에 불시착해서 조종사들은 구축함의 도움을 받아 생존해야 했다.

이 구조 작업중 미 구축함 포터가 바다에 불시착한 뇌격기를 구조하다가 그 뇌격기에서 발사된 어뢰에 맞아 침몰하였다.

호넷을 공격하고 돌아가던 일본기는 열대성 소나기 구름 속에서 나타난 엔터프라이즈를 발견하고 본대에 엔터프라이즈의 출현 사실과 그 위치를 긴급 타전했다.

출격한 2파는 급강하 폭격기대는 호넷은 이미 격침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엔터프라이즈에 공격을 집중하였다.

엔터프라이즈의 상공에서 엄호하던 공중 전투 초계기들은 이들 요격에 어려움을 겪어 19기중 단 두기만 격추하였다.

이들 급강하 폭격기들은 치열한 대공 포화를 뚫고 엔터프라이즈에 두 발의 250kg 폭탄을 명중시켰다. 44 명이 죽고 75명이 부상하였다.

함도 치명상이라 할 수 있는 앞쪽 승강기가 조작 불능상태가 되었다. 대공포화와 뒤늦은 추격에 19기의 일본기중에 살아 돌아간 기는 단 7기에 지나지 않았다.

20분 뒤에 일 항모 즈이카쿠에서 출격한 16기의 뇌격기가 도달하여 두 파로 분산되어 엔터프라이즈의 양쪽에서 공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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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현에 어뢰가 명중하는 순간의 엔터프라이즈



한 쪽은 두기의 미 와일드캣기에게 공격당해 3기가 격추되고 한 기가 대파되었다. 추락하던 이 파괴기는 미 구축함 스미스 2번 포탑에 돌진하여 함에 큰 화재가 나고 57명의 전사자를 냈다.

겨우 화재를 진압했지만 육탄 돌격을 한 일본 뇌격기가 장착했던 어뢰까지 지연 폭발하여 함의 생존이 힘들다고 본 구축함 함장은 임기응변으로 전함 사우스 다코다에 근접하여 대량의 물을 살포하게 하여 불을 잡고 대공 사격을 계속하였다.

살아남은 뇌격기들은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전함 사우스 다코다, 순양함 포트랜드에게 뇌격을 가했지만 한 발도 맞추지 못했다. 뇌격 상황은 10시 53분에 끝났다. 일본 뇌격기중에 9기가 격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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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함 사우스 다코다에게 육박하는 일 97식 수평 공격기(뇌격기)



한편 엔터프라이즈도 화재를 잡고 갑판을 손보아 아침 일본 함대 출격에서 돌아오는 미 공격대들을 착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대 착륙하기 전에 일본 공격대 3파가 몰려왔다.

갑판은 다시 폐쇄되고 엔터프라이즈는 방어 준비에 들어갔다. 이 공격대는 미 항모에 528km까지 접근한 곤도 중장의 전방부대 소속이었던 일본 항모 준요에서 출격한 것이었다.

17기의 급강하 폭격기와 12기의 제로 전투기였다. 이들 함재기들은 아침 9시 조금 넘어 출격하여 두 시간의 비행 끝에 엔터프라이즈에게 도전하게 된 것이다. 11:21 준요의 항공대는 엔터프라이즈에 돌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이 투하한 폭탄 한발이 엔터프라이즈 근해에 떨어져서 피해를 주었고 사우스 다코다에는 4발의 폭탄이 투하되어 경순양함 산 후안에 한 발이 명중하여 피해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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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모 준요, 24,100톤 50기 탑재



폭탄 투하에 당황한 조타 장교가 조작을 잘못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사우스 다코다와 항모 엔터프라이즈가 충돌할뻔하였다. 경순양함 산 후안을 때린 폭탄은 함을 그대로 관통하고 함의 아래 해중에서 폭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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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격대의 공습 중인 엔터프라이즈의 과격한 회피 운동으로 미끄러진 착함중의 호넷 소속 와일드캣기



이 준요의 공격대 급강하 공격기 17기중에 11기가 격추되었다. 이중 9기는 집결점으로 선회하다가 미군의 기습에 일거에 격추된 것이다. 미 기동함대 사령관 킹케이드 제독은 항모 엔터프라이즈를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호넷은 이미 침몰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중상을 입은 엔터프라이즈의 전투력과 생존을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타는 호넷을 뒤에 남겨두고 미 함대는 전속으로 후퇴하였다. 좀더 적나라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전함대가 전장을 이탈하여 도피한 것이다.

한편 미군 공격에서 손상을 입지 않는 일본 항모 즈이카쿠와 준요는 미 항모 공격에서 돌아온 소수의 함재기들을 회수하고 재출격을 추진하였다.

출격에서 돌아온 함재기들은 너무 소수였고 또 기체에 대공 사격의 탄흔들이 무수히 나있어서 항모의 승조원들을 놀라게 하였다. 살아 돌아온 항공기 승무원중에 공포에 질려 말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후가 되자 곤도의 전방 부대와 아베의 전위 부대는 마지막으로 미 항모가 목격되었던 해상으로 맹속력으로 질주하였다. 수상함으로서 항모 부대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미군의 공격으로 대파된 즈이호와 쇼가쿠는 사령관 나구모의 명령으로 전장 해역에서 이탈을 했다.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가 이미했던 전장 이탈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이제 미 함대와의 해전은 곤도 부대 소속이었던 제 2 항공전대 사령관 가쿠다 가쿠지 소장이 지휘하게 되었다. 즈이카쿠도 그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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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쿠다 가쿠치



이제 미함대와의 전투는 가쿠다 가쿠지 소장의 지휘아래 즈이카쿠와 경항모 준요 두 척의 항공 모함이 전투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의 지휘하에 있는 두 척의 항모는 얼마 되지 않은 함재기들을 무장시켜 3차 공격이며 마지막 공격을 위한 출격 준비를 했다.

이들은 시간의 급박함을 알기에 미군이 아침 공격에 했던 것처럼 준비가 된 함재기부터 축차 출격시켰다.

멀리서 달려온 항모 준요는 7척의 뇌격기와 8기의 제로기를 1 차 출격시켰다. 즈이카쿠가 7기의 뇌격기, 2기의 급강하 폭격기, 그리고 5기의 제로기를 출격하였다.

준요는 두 번째로 15기의 함재기를 출격시켰고 즈이카쿠는 세 번째로 14기의 함재기를 출격시켰다. 준요는 마지막으로 10기의 함재기를 출격시켰다.

동력을 잃은 호넷을 예인하려던 중순양함 노섬프톤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5 노트의 느린 속도로 호넷을 예인하기 시작했다. 호넷의 기관병들은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호넷의 동력을 어느 정도 살려낼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이때 가토오 중위가 지휘하는 준요의 두 번째 공격파가 나타났다. 노섬프톤은 예인 밧줄을 끊고 회피 기동으로 전환했으나 7기의 일본 뇌격기들은 거의 정지해있던 호넷에게 어뢰를 발사했다.

회피 기동이 불가능한 상태니 명중의 가능성은 거의 확실한 수준이었다. 6발의 어뢰가 목표를 벗어났으나 한 발이 호넷의 함체 중앙을 타격하였다. 공격 시작 3분만의 일이었다. 치명타였다.

호넷 정비팀이 부분적으로 살려놓은 동력과 전기 시스템이 완전 파괴되고 큰 파공으로 엄청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동력이 없으니 배수 작업은 불가능했다. 호넷은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함장은 더 이상의 가망성이 없다고 보고 총원 퇴함 명령을 내렸다. 즈이카쿠의 3 차 공격대가 기우는 호넷을 발견하고 공격을 가해서 폭탄 한 발을 명중시켰다.

800kg의 대형 폭탄 한 발이 갑판에 명중해서 치명타를 가했다. 호넷의 승조원들은 호넷에 더 이상의 생존 희망이 없자 모두 퇴함하였다. 생명을 잃어가던 호넷에게 일본의 마지막 공격은 17시 20분 가해졌다.

호넷이 구조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은 할제 제독은 호넷의 처리를 명령했다. 미 함대의 함들이 모두 남동쪽으로 항진하여 일본군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곤도와 아베의 수상함들이 맹속으로 접근하고 있던 위기의 상황이기도 하였다. 구축함 머스틴과 앤더슨은 여러 발의 어뢰를 호넷에게 발사하고 400발의 포 사격을 했으나 역전의 노장인 호넷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아베의 전위부대는 20분내의 접근 거리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두 구축함은 호넷의 격침을 포기하고 전장을 떠났다. 불타는 호넷은 여전히 해상에 떠있었다.

곤도와 아베의 부대는 미 해군이 떠난 해역에서 불타는 호넷을 발견하였다.

항모가 6개월 전 도쿄 공격의 두리틀 폭격대를 발진시켰던 호넷임을 알게 된 일본 함대 지휘부는 잠시 이 함을 나포해서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을 논의했으나 호넷의 파손도가 이미 예인 가능성의 정도를 넘어섰다는 것을 알고 노획을 포기하였다.

일 구축함 마키구모와 아키구모가 어뢰 4발을 발사하여 호넷의 숨통을 끊으려 했으나 호넷은 끈질기게 침몰을 거절했다. 호넷은 그 날을 넘기고 다음날인 10월 27일 자정을 넘겨서야 침몰하였다.

레이다가 장착된 카타리나 비행정의 부단한 야간 폭격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일본 함대는 미국 함대가 이미 전투 해역을 떠나 철수 중이고 자기 함대의 연료도 곧 바닥을 보일 것이라는 예상에 추격을 포기하고 역시 철수했다.

일본 함대는 솔로몬 군도 북쪽 해상에서 연료 보급을 받고 10월 30일 출발하였던 일본 해군 연합 함대 근거지인 트럭 섬으로 돌아왔다. 산타 크루즈 해전의 종료였다.

양쪽 전과로 보면 미국의 패배였다. 항모 호넷이 격침되고 항모 엔터프라이즈가 대파되었고 구축함 포터가 격침되었다. 이외에 전함 사우스 다코다, 경순양함 산 후안, 구축함 스미스와 마한이 대파되었다.

175기의 함재기중에 해전 중에 격추되고 사고등으로 잃은 함재기도 81기나 되었다. 반면 일본측은 두 척의 항모가 대파되었고 중순양함 치쿠마도 대파되었다.

전투 전에 203기나 되던 함재기 전투력은 치열한 해전을 겪은 뒤에 절반인 99기가 손실되어 항공 전투력이 절반으로 격감하였다. 일본은 전술적으로 승리를 얻었으나 전투 중에 입은 손실은 공업 생산력이 뒤떨어지는 일본으로서 쉽게 복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비되는 경우로서 미국의 엔터프라이즈는 뉴 칼레도니아 섬으로 철수해서 2 주간 응급 처리를 하고 다시 전투에 돌아와 과달카날의 공방전에서 중요한 핵심 역할을 했지만 일본의 항모들은 그렇지 못했다.

즈이호는 1943년 1월에야 수리를 마치고 트럭 섬으로 돌아와야 했고 더 큰 항모인 쇼가쿠는 1943년 7월에야 현역으로 복귀해서 자매함 즈이카쿠와 함대 활동을 개시할 수가 있었다.

일본 해군이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 그리고 계속된 과달카날 항공전에 이어 산타 크루즈 해전에서 입은 항공기와 숙련 승무원들의 손실은 막중한 것이었다.

미군이 해전에서 입은 기체 손실은 81기었으나 인원 손실은 단 26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이 입은 99기의 기체 손실에 비해 잃은 승무원들은 148명이나 되었다.

이는 구조 활동이 열악한 일본 해군의 무신경과 인명 손실을 무시하고 육박 공격을 요구하는 일본식 전투 교리에 기인하는 것도 컸다.

리스크가 큰 뇌격기 승무원의 피해가 제일 커서 49%가 전사했으며 급강하 폭격기 승무원 39%를 잃었고 전투기 조종사는 20%나 상실하였다.

산호해 해전이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 승무원들의 피해가 컸다는 사실을 지적했지만 이 산타 크루즈 해전에서 손실한 일본 항공 승무원들의 손실은 앞선 세 개의 항공 해전에 비하면 큰 것이었다.

산타 크루즈 해전에서 입은 승무원의 피해는 과거 있었던 여러 태평양 해전들, 산호해 해전(90명 손실), 미드웨이 해전(110명 손실), 그리고 과달카날 공방전중의 있었던 다른 항공 해전인 동 솔로몬 해전(61명 손실) 등의 각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입은 피해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즉 그때까지 입은 최대의 항공력 피해 해전이 산타 크루즈 해전이었다.

일본 해군이 입은 피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개전 초 하와이 진주만 공격에 참여했었던 765명의 최고 항공 승무원들중에 산타 크루즈 해전 직후 그 절반이 넘는 409명이 이미 전사했었다는 점이다.

앞에서 소개했듯 산타 크루즈 해전 후 숙련 된 항공 승무원의 극심한 부족으로 일본 항모 즈이카쿠와 즈이호는 일본으로 귀항하여 1943년 여름에 트럭 섬으로 복귀할 때까지 승무원 충원과 훈련에 몰두하여야 했다.

덕분에 일본의 운명이 걸리다시피 했었던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일본 항모 부대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전사가 에릭 하멜은 이 산타 크루즈 해전을 이렇게 표현했다.

“산타 크루즈 해전은 일본 해군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일본이 연합국을 대상으로 최후의 승리를 할 가능성을 빼앗아 간 승리였다.”

진주만 기습의 영웅으로서 칭송을 받다가 미드웨이 해전의 대패로서 일본 해군을 궁지에 넣은 나구모 주이치 해군 중장은 산타 크루즈 해전 뒤에 함대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육상 근무를 하다가 괌 섬에서 함락 직전 자결로서 최후를 맺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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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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