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3) - 샤카의 정복 활동과 대이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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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4회 작성일 16-02-0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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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카의 정복 활동과 대이동의 시작



샤카가 ‘줄루(엘랑게니)’의 추장이 되기 전, 그의 주군(主君)이었던 딩기스와요의 저택에 불려간 일이 있다.

이 자리에서 딩기스와요는 만약 엘랑게니의 추장이자 샤카의 생부(生父)인 센장가코나가 죽게 되면 샤카가 ‘줄루’의 추장이 되도록 암묵적으로 도와줄 것이라 약속하였다.

그러나 사실 딩기스와요는 샤카에게 더 심각한 조언을 해주기 위해 그를 부른 것이었다. 딩기스와요는 이제 그의 심복이 된 샤카에게 ‘여러 달’을 거쳐야만 이를 수 있는, 먼 남쪽에 위치한 백인들의 땅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아울러 인근의 델라고아만(Delagoa Bay)에 자리 잡은 다른 백인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딩기스와요는 의심 많은 아버지에게서 쫓겨나 유랑하던 시절, 백인들과 살면서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샤카에게 가까이에 있는 백인들의 수는 비록 많지 않으나, 바다 건너에 큰 백인들의 나라가 있고 그들의 수는 응구니 전체의 몇 배에 달한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천둥과 연기를 뿜어내는 죽음의 막대기(총)로 무장하고 있으며, 그들의 큰 통나무 같은 무기(대포)는 그 위력이 비할 데 없다고 경고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주술을 사용하지 않고도 상처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술법이 있다고도 하였다. 이 때문에 딩기스와요는 샤카에게 백인들과 되도록이면 평화를 유지할 것을 주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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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년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에 도착한 얀 반 리베이크(Jan van Riebeeck). 그는 이곳에 동인도회사 사무소를 설치하고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후 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이민자들은 ‘보어인’으로서 하나의 세력을 구축했는데,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딩기스와요는 샤카에게 백인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러한 딩기스와요의 경고 때문인지는 몰라도 샤카의 치세 동안에는 줄루족과 백인들과의 전면적인 충돌은 없었다. 딩기스와요가 암살당한 후 샤카는 응구니족 전체를 줄루의 기치 아래 통합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추장이었던 엘랑게니 부족의 다른 이름이 ‘줄루’였기 때문에, 이를 통일 부족명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 통합의 과정은 무자비했지만 적어도 백인들과의 본격적인 전쟁은 없었다.

그는 오히려 백인들을 우호적으로 대했고, 특히 영국인들에게는 그들이 현재의 더반(Durban)항 지역에 정착하는 것을 도와주고 줄루족과의 교역에 대한 특혜를 주었다.

그러나 샤카의 등장이 영국인들을 위시한 백인들에게는 다행일지 몰라도, 샤카와 싸워야 했던 주변의 부족들에게 있어 그의 존재는 재앙과도 같았다.

샤카 줄루의 등장 이전, 남아프리카의 부족이나 군장 집단은 대규모의 전투를 경험해본 일이 거의 없었다. 많아야 수백 단위로 전투를 치르는 이들 부족들에게 수천에서 1만이 넘는 샤카의 대군단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최대의 난적이었던 은드완드웨는 1820년에 이르러 집단 자체가 없어질 지경이었고, 샤카의 대군단은 승세를 타고 지금 남아프리카의 나탈(KwaZulu-Natal) 지역을 중심으로 맹렬한 정복 활동에 나섰다.

샤카가 왕으로 있는 동안 줄루의 영토는 계속해서 넓어졌다. 1820년대에 이르러서는 주변 약 30000평방km에 이르는 땅이 줄루 왕국에 편입되었다.

땅을 빼앗긴 타 부족들은 결국 다른 지역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샤카의 정복 활동으로 인하여 ‘음페카네(Mfecane)’라 불리는 타 부족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조상 대대로 생계를 유지하였던 땅에서 쫓겨난 난민들은 공격적인 유랑 집단으로 변하였다.

자신들의 생존 수단이었던 목축지를 박탈당한 이들 부족에게는 남의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었고, 결국 이들은 현재 보츠와나(Botswana), 짐바브웨(Zimbabwe), 나미비아(Namibia) 등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이르는 곳마다 원주민들을 마구 공격하였다.

줄루의 정복 활동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면서 공격적인 유랑 집단의 수도 늘어났고, 그 결과 현재의 앙골라(Angola), 잠비아(Zambia), 그리고 케냐(Kenya)에 이르는 지역까지 혼란의 여파가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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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오른쪽 윗부분이 줄루족의 정복으로 인하여 황폐화된 지역이다. 줄루족이 해당 지역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줄루족의 정복 활동으로 인하여 남부 아프리카 민족의 대이동(음페카네)이 시작되었다.





샤카의 공포정치와 난디의 죽음



샤카는 대대적인 군사 개혁을 통해 거대한 왕국을 세웠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변덕이 심했고 감정적인 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은드완드웨의 군장이 살던 크랄을 불태울 때는 도망친 군장의 어머니를 ‘마녀’로 규정하고 집안에 가둔 다음 불태워 죽였다.

아울러 자신과 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의 차별이 너무 심했고, 특히 성장기에 자신을 아껴주었던 인물들에 대한 편애가 너무 심했다.

샤카는 어릴 때부터 그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음양으로 기도해주었던 ‘팜파타’란 여성을 왕으로 등극하자 마자 왕비로 삼았다.

물론 팜파타의 경우는 상당히 영민하고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인물이었기에 그녀를 왕비로 삼는 것이 적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적에게는 그렇게 무자비한 샤카가 자신의 형제들이 그를 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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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캬는 군제 개혁을 통해 왕국 안의 청년들을 강한 병사로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주변 부족들을 정복해갔다. 그러나 잔혹한 공포정치에 기반한 강력한 통제와 계속되는 금욕 생활의 강요, 그리고 반복되는 전쟁에 젊은 병사들은 지쳐갔다.



샤카는 생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어머니 외에는 자기 편이 없이 힘들게 자랐다. 주변으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을 받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계속 싸워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따금씩 잘 대해주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고마웠고, 이들은 샤카가 왕위에 오른 다음 후대(厚待)를 받았다. 앞서 그의 왕비가 된 팜파타가 좋은 예이다.

아울러 그는 철저히 무공(武功)와 전공(戰功)으로 왕위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무용을 과신하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다른 부족들과의 정복전에서 이기기 위하여 군대를 개혁하였고, 이 군대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잔혹함을 전사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공포심으로 그들을 통제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때문에 결혼을 포함한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40세가 넘을 때까지 근 20여 년을 병영에서 생활해야 하는 방식은 혈기왕성한 젊은 전사들에게 상당한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다른 부족들을 쳐부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할 때 이를 나누어주어 생계를 유지하게 하였지만, 공포심과 폭력으로 유지되는 20년의 ‘군대 생활’에 전사들은 점점 지쳐갔다.

샤카의 통제 방식은 1827년 젊은 청년들이 주축이 된 인-다반쿨루(In-Dabankulu) 부대를 북쪽으로 원정 보냈을 때 드러난다.

인-다반쿨루 연대는 험한 산 위에 사는 고산 부족인 페디-수투(Pedi-sutu)를 정벌하고 있었는데, 이에 페디-수투족은 백인과 코이코이(khoikhoi)의 혼혈 기마족인 그리콰(Griqua) 집단과 연계하여 줄루족에 맞섰다.

줄루 부대가 산 위의 페디-수투를 공격하고 있을 때, 그리콰 기마병들이 나타나 인-다반쿨루를 공격하였다. 비록 그리콰들을 격퇴하기는 하였지만 인-다반쿨루 부대의 진열은 흐트러졌다.

페디-수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산 위에서 돌을 굴리며 인-다반쿨루를 급습하였고, 결국 부대는 페디-수투족에게 패하였다. 이후 인-다반쿨루는 패잔병이 되어 줄루 왕국으로 돌아왔고, 샤카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망토를 달라. 줄루의 수치이자 왕국의 이름에 먹칠을 한 이들로부터 나의 머리와 눈을 가려야겠다.

이 쓸모없는 패잔병들을 데려가 돌로 쳐죽여라! 창을 두려워하는 자는 창에 의하여 죽는 것처럼, 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돌로 죽여야 할 것이다! 어서 데려가라!”

패잔병들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그들의 왕을 오히려 칭송하고 순순히 죽음의 길로 따라나섰다. 일견 충성스러운 모습이기는 하나, 반대로 줄루 병사들에게 샤카가 절대적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목동으로 시작하여 왕위에 오르기까지 그의 일생을 같이하였던 어머니 난디는 이러한 샤카의 방식이 화를 부를 것이라 예견하였던 듯하다. 그녀는 샤카 주변의 인물들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절대군주로 군림하고 있었던 샤카는 어머니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1827년말 어머니 난디가 거주하고 있던 크랄을 찾았을 때, 난디는 샤카에게 배다른 형제들인 딩가네(Dingane)와 믈랑가나(Mhlangana)를 조심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샤카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들을 죽일 수 없다며 어머니의 우려를 무시하였다. 그가 줄루의 추장 자리를 차지할 때 다른 이복형제인 시구자나를 암살하는 잔혹함을 보여준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여기에는 광대한 영토를 개척한 정복자로서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함과 함께 공사(公私)의 불분명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이 보인다. 정복자로서의 오만함, 공사의 불분명함과 함께 샤카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그의 광포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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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샤카 줄루(Shaka Zulu)>의 한 장면.



난디는 이복형제들과 더불어 측근이자 대규모 부대의 인두나(iNduna, 지휘관)인 음보파(Mbopa)라는 인물을 지목하면서, 그가 겉으로는 충성스럽게 보이지만 사실 ‘하이에나 같이 간사한’ 위인이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샤카는 특유의 호기를 내보이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난디는 불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세 살배기 손자에게 호위를 붙여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기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즈음 샤카는 북부 원정에서 천하게 여기던 산지 부족들에게 망신을 당한 것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어머니 난디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평생 동안 샤카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를 지켜주었던 모친의 죽음은 샤카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어머니가 있던 크랄에 도착하여 모친의 부음을 들은 샤카는 반나절을 통곡하였고, 이후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상심이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난디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샤카는 군주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그의 죽음을 부추기는 계기가 된다.



대영웅의 허무한 죽음



위상이 대비(大妃)나 다름없었던 난디의 장례식을 위하여 이에 사방에서 조문객들이 모여들었고, 그 수는 거의 6만에 이르렀다.

샤카는 난디의 영혼을 위로한다며 소 4000마리를 도살할 것을 명하였다. 100마리의 소만 있어도 큰 부자인 줄루 사회에서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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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캠든 마켓(Camden Market)에 있는 샤카의 석상. 광대한 영토를 개척한 정복자였지만, 그에게 찾아온 오만함과 광포함은 결국 대영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런데 문제는 도살한 이 소들을 조문객들을 위하여 식량으로 쓴다거나 하지 않고, 먹는 것을 금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모여든 사람들 중 일부를 처형하였는데,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어머니의 영혼을 위로한다거나 또는 충분히 슬픔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만 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전사들이 ‘왕의 뜻’을 과도하게 해석하여 모여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였고, 샤카는 이 대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날 죽어나간 사람만 7천 명에 이르렀다.

난디가 죽은 후 샤카는 제정신이 아닌 듯이 보였다. 우선 줄루 왕국 내의 모든 밭의 김매기를 전면 금지시키고, 소들의 젖을 짜는 일 역시 금하였다. 이 때문에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남녀 간의 방사(房事)도 금하고 온 국민에게 금욕을 강요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근위대를 왕국 곳곳에 보내 사람들이 충분히 애도하고 있는지 감시하게 하였다.

충분히 애도하지 않는다고 간주되면 죽임을 당하였고,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15,000명에 달하는 난디의 무덤지기들에 대한 지원품 명목으로 소를 바쳐야 했다.

그나마 왕비인 팜파타가 그의 광태(狂態)를 그나마 가라앉히며 막았지만 이후 샤카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샤카는 자신의 꿈에 양아버지인 음비야가 나타나 ‘마녀’들이 저주를 걸어 어머니를 죽였다고 말하였다며 마녀들을 잡아들일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운이 없는 몇 명의 여인네들이 끌려왔고, 샤카는 이들을 마른 풀로 둘러싼 다음 거기에 불을 붙여 달리게 하였다. 완전히 타죽지 않은 여인들은 근위대가 쫓아가 머리를 쳐서 죽였다.

결국 농사를 짓지 못하고 소의 젖을 짜내지 못하자 왕국의 식량 사정은 엉망이 되었고, 일부 총신(寵臣)들까지 샤카의 광태에 공공연한 불만을 내비쳤다. 이것이 바로 샤카의 이복형제들이 기다리던 기회였다.

때마침 샤카는 산지 부족들과의 전투를 위해 주력부대를 다시 북쪽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소수의 근위대밖에 없었다.

이와 더불어 샤카는 스스로의 체력과 무력을 과시하는 차원에서 다른 크랄에 갈 때 맨발로 걸어갔으며 호위병도 거의 데려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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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쿠아줄루 나탈(KwaZulu-Natal)주 콰두쿠자(KwaDukuza)에 위치한 샤카의 기념비. 근처에 그가 암살당했다는 암살 바위(Assassination Rock)가 있다. <출처: (cc) JRamatsui at en.wikipedia.org>



1828년 초, 샤카의 측근 역할을 하던 음보파는 왕께서 보셔야 할 것이 있다며 샤카를 도성 크랄 밖으로 유인하였다.

근위대가 볼 수 없는 곳에 이르렀을 때, 미리 매복하고 있던 딩가네와 믈랑가나의 병력이 샤카를 에워싸고 그를 도륙하였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곡물 저장 구덩이에 시신을 던지고, 돌과 진흙으로 가득 채워 증거를 없앴다.

오늘날까지도 샤카의 무덤이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콰줄루-나탈 지방의 콰두쿠자(KwaDukuza) 또는 스테인저(Stanger)시에 위치한,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묘비가 세워져 있을 뿐이다.

이것이 샤카의 최후였다. 줄루족을 통합하고 광대한 왕국을 세운 정복왕 샤카에게 어울리지 않는,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참고자료


· E.A. Ritter, [Shaka Zulu:The Rise of the Zulu Empire]

· Brian M. Du Toit, [The Boers in East Africa: Ethnicity and Identity]

· James O. Gump, [The Dust Rose like Smoke: The Subjugation of the Zulu and the Sioux]

· Louis Creswicke, [South Africa and the Transvaal War]

· G.W. Eybers (ed.), [Selected Constitutional Documents Illustrating South African History, 1795-1910]

· 김성남, [전쟁세계사]

· www.sahistory.org.z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4.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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