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마킨 섬 기습 (1942) - 미군의 포로구출과 정보 획득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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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4회 작성일 16-02-0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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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킨 섬은 중앙 태평양 길버트 제도에 있는 작은 섬이다. 전사에 전투가 있었던 섬이 마킨 섬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 섬이 아니라 그 인근에 있었던 휠씬 작은 섬이었으며 그 당시에는 리틀 마킨 섬이라 불렸다.

리틀 마킨 섬은 현재는 부타리타리 섬으로 불리며 4,0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잘못 된 호칭이지만 역사에 기록된대로 그냥 마킨 섬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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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 기습이 있었던 마킨 섬-실제로는 리틀 마킨 섬-



1942년 8월 17일, 두 척의 잠수함에 나누어 탄 미 해병 225 명이 과달카날 북쪽 길버트 제도의 마킨 섬을 급습했다. 해병 기습대는 8월 8일 하와이의 진주만을 출발하여 이곳까지 은밀하게 항해해왔다.

미군의 반격 작전이 아직 본격화되지 않을 때라 이 중부 태평양 일대는 일본군의 초계 비행과 잠수함들의 활동이 왕성하여 수상함에 의한 수송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틀간 감행된 이 작전은 이 섬에 설치된 일본군의 시설을 파괴하고 암호 해독 문서와 포로를 획득하여 군사 정보를 얻는 전술적 목표를 두고 있었지만 특별한 전략적 목표도 있었다.

미 해병대는 약 열흘 전인 1942년 8월 7일 마킨 섬 남쪽 과달카날과 투라기 섬에 상륙 작전을 감행했었다. 과달카날 공격은 미군 최초의 반격 작전이었다.

마킨 섬 기습의 전략적 목표는 일본군의 전투 역량을 이 곳 과달카날에서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마킨 섬 기습 성공은 그 기발함과 대담함으로 미국민들에게 큰 찬사를 받았고 이를 지휘했었던 에반스 칼슨 중령은 매스컴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가 한참 흐른 뒤에 마킨 섬 기습의 평가는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기습 작전을 살펴보면 잠수함을 이용한 기발한 방법으로 마킨 섬을 기습하자는 작전 계획이 확정되면서 인원 선발이 있었다.

하와이 주둔 해병 수색대 제 2 특공 기습 대대의 대대장 에반스 칼슨 중령이 적임자로 평가되어 실행 임무를 부여 받았다.

에반스 칼슨 중령은 중국전문가였다. 세 번이나 중국 파견 근무를 했었고 중국어도 할 줄 알았다. 그는 중국 근무 때 중국군의 군사 조직 관리와 유격전 교리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대대장 취임 후 이 모 택동 식의 지휘 통솔과 전술 훈련 방식을 부대 지휘에 도입하였다. 그가 중국에서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대대원들에게 가르친 “Gungho”라는 구호는 해병대에 퍼져 해병 정신을 나타내는 구호가 되었다.

궁호는 공합(工合)의 중국 발음이며 단결과 헌신을 나타낸다. 이 구호의 확산은 마킨 섬 기습을 주제로 한 영화의 제목이 “궁호”였던것과 관련이 깊다.

기습 대원은 칼슨 중령의 제 2 특공 수색대대에서 선발되었다. 제 2 수색대대는 6개의 중대로 편성되었는데 이중 A 중대와 B중대, 2 개 중대가 출동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협소한 잠수함에 승함해서 이동하여야 하기 때문에 기존 편성 중대에서1개 소대씩이 뺀 2개의 기습 중대로 재편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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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내에서의 칼슨 부대원-노획한 일본 권총을 들고 있다.





노틸러스 잠망경으로 본 마킨 섬




두 척의 잠수함들은 아르고넛과 노틸러스였다. 아르고넛에는 121명, 노틸러스에는 90명이 승함했다. 이 마킨섬 기습 부대에 7.15 특임부대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마킨 섬은 환초(環礁)로서 이 섬은 주로 일본군의 대형 비행정이나 수상 정찰기 기지로서 이용되었다.

이 섬에는 중부 태평양 지역 일본 해군의 수비 부대 61경비대 소속 증강된 1 개 육전대 소대 64명이 파견되어 방어를 하고 있었으며 별도로 항공 정비원 3명, 기상관측원 4명이 있었고 군속인 통역이 두 명 있었다.

육전대의 소대장은 가네미쓰 병조장이었다. 이 섬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특이하게도 스위스 인 한 명도 거주하고 있었다.

섬에 도달한 두 척의 미 해군 잠수함에서 해병들이 활동 개시를 한 시각은 8월 17일 자정이었다. 해병들이 6마력의 엔진이 설치된 고무 보트들을 타고 모두 잠수함을 떠난 것은 새벽 4시였다.

기습대는 두 개 부대로 나뉘어 섬의 두 곳에 상륙하는 상륙 계획에 따라 해상 침투에 들어갔다. 심야의 해상 침투는 무척 힘들고 더디게 실행되었다.

기상이 예상보다 안좋았기 때문이다. 해상의 파도는 무척 거칠었고 고무 보트에 설치한 엔진들의 고장이 속출했다.

칼슨 중령은 이래서는 통제가 힘들겠다고 판단하고 두 대로 나누어 두 지점에 상륙할 계획을 취소하고 전 기습대원들에게 해안의 한 지점에 상륙하도록 명령했다. 새벽 5시쯤 되어서야 두 개의 중대는 마킨 섬에 상륙을 완료하였다.

일본군도 현지민의 신고로 미군들이 상륙한 것을 바로 알게 되었다. 아침 7시 A 중대가 선도하는 칼슨 부대는 해변을 떠나 섬을 가로질러 북쪽 해변으로 접근했다.

이곳에서 해병들은 남서쪽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에 미 잠수함 노틸러스 함이 함포로 지원사격을 하였다. 긴급하게 방어선을 편 일본군의 저항은 아주 거셌다.

이들은 자동화기와 저격으로 해병들의 공격을 정지시키고 부상자가 발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이 우세한 미군 해병들은 일본군을 압박했다.

일본군 수비대장 가네미쓰 병조장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해병들을 격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본부에 전원 옥쇄의 각오와 결별의 무전을 보냈다.

일본군은 마지막으로 두 번의 반자이 돌격을 해왔다. 그러나 해병들은 이들을 화력으로 제압해버렸다. 두 번의 반자이 돌격에서 섬의 일본군 대다수가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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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들의 마킨 섬 새벽 기습



일본군 저항에 결정타를 먹인 건 미 해병부대의 일본군 후방 기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측 다 기대하지 못했었던 기습은 오스카 페트로스 중위와 그의 12명 대원들이다.

부대원들은 칼슨 중령의 지시에 따라 해안 한 곳으로 상륙했으나 이 팀만은 그의 명령을 미처 접수하지 못했다.

이 팀은 원래 계획대로 해안선의 다른 지점에 상륙하였다. 실수는 오히려 행운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 소수의 부대가 극렬하게 저항하던 마킨 섬 일본군 수비대의 마지막 전투력 분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따로 상륙하여 본대를 찾아가던 페트로스 중위와 12명의 부하들은 그들에 해병들을 반자이 돌격으로 동쪽으로 몰아가고 있던 일본군의 후방에 자신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페트로스의 부대는 즉시 사격을 가해서 일본군 8명을 사살하고 기관총 진지 하나와 무전기를 파괴하였다. 격렬한 전투라서 페트로스 대원중 3명이 죽고 두 명이 부상당했다.

일본군 전사자중에는 섬 수비대장 가네미쓰 병조장이 있었다. 이 기습에서 페트로스 중위는 일본군의 탄약 수송차를 파괴하여 탄약을 소진한 일본군은 더 이상 실탄 보급을 받을 수 없었다.

전투 후에 살아남은 일본군의 소수 패잔병들은 분산되어 숲으로 도주해버렸다. 이것으로 마킨 섬 일본군의 저항은 일소되었다.

마킨 섬 제압에 큰 역할을 세웠지만 칼슨의 본대와는 계속 접촉을 할 수 없었던 페트로스 중위는 원래 계획대로 저녁에 잠수함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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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킨 기습후 마킨 섬을 잠수함에서 본 장면



정오가 지난 무렵 일본 항공기들이 마킨 섬 상공에 나타났다. 그 중 두 기는 35명의 증원 병력을 실은 대형 비행정들이었다. 비행정들은 초호(礁湖)에 착수(着水)을 시도하였다.

미 해병들은 기관총과 반탱크 총으로 비행정을 사격하여 한 대를 격추시키고 한 대를 공중 폭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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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의 대형 2식 비행정



탑승한 증원 병력 전원이 전사했다. 나머지 공격기와 전투기들은 미군들에게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했으나 해병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마킨 섬 기습에 성공한 해병들은 예정대로 그날 저녁에 대기하고 있던 잠수함으로 철수를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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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과 해병대가 사용된 대형 고무 보트- LCRL (Landing Craft Rubber Large)



해병들은 섬에 침투할 때 타고 왔던 18개의 고무 보트들을 철수 시에도 이용했다. 파도는 상륙할 때보다 더 높았다. 게다가 선외기가 고장 난 고무보트들은 다른 보트의 견인을 받아야 했었다. 해상 철수는 힘들게 진행되었다.

높은 파도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은 93명의 해병들은 7척의 고무보트를 타고 잠수함으로 복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해병들은 아직도 고무 보트를 타고 파도와 싸워야 했다.

도저히 잠수함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해안으로 되돌아간 해병들도 있었다. 전복한 고무 보트도 있었고 익사한 해병들도 발생했다.

다음날 오전까지 72명의 해병들과 단지 세 척의 고무 보트가 아직도 섬에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해병들은 그날 종일 파도와 싸우며 해상 철수를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섬에 도착했었던 18척의 보트중 11척의 보트는 강한 파도를 뚫지 못해 여전히 해상에서 표류 했다. 표류하는 해병들은 강한 파도에 무기와 장비들을 다 잃어버린 상태였다.

저녁이 되었다. 자정 무렵 보트를 타고 해상 탈출을 시도하던 해병들은 할 수없이 지친 상태로 마킨 섬으로 되돌아왔다. 아직 20명의 해병들이 철수를 엄호하느라 섬에 남아 있던 상태였다.

지칠대로 지친 칼슨 대대장은 여기서 특공대장답지 못한 실수를 저질렀다. 나중에 크게 영웅화 되어 있는 그의 이미지와는 극히 맞지 않는 돌발 행동이었다.

그는 대원들에게 이 상태에서는 항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일본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는 부하 랄프 코이테 대위에게 미 해병대가 항복하겠다는 메시지를 작성하여 이를 마킨 섬의 일본군 사령관에게 전해주라는 명령을 했다.

대위는 섬에 거주하는 스위스 인을 앞 세우고 일본군 사령관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마킨 섬의 일본군들은 도망친 몇 명의 패잔병을 제외하고 모두 해병들의 기습에 괴멸된 상태라서 항복문을 전달하여야 하는 일본인 사령관은커녕 지휘부도 찾을 길이 없었다.

다음날 잠수함은 함에 장비한 고무 보트보다는 훨씬 큰 구명 보트에 줄을 매어 해안으로 보냈다. 이 줄에 해병들의 고무 보트를 묶어 잠수함이 있는 바다까지 견인해오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구명 보트가 고무 보트들의 견인을 시작하려고 한 순간 갑자기 일본군의 항공기들이 나타나 공격을 했다. 구명 보트는 격침되고 잠수함은 공습을 피해 급속 잠항을 하여서 어두워질 때까지 해저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날 밤 겨우 잠수함과 연락을 취한 칼슨 대장은 잠수함에게 마킨 섬을 둘러싼 초호의 바다로 나가는 입구에서 해병들을 픽업하도록 요청하고, 찰리 램 중위에게 팀을 짜서 아직 온전한 세 척의 고무 보트와 마킨 섬의 원주민 카누 두 척를 결합하여 이에 가동 가능한 두 개의 선외기로 부착하여 추진하게 하는 큰 뗏목을 만들게 하였다.

이 급조한 뗏목을 타고 72명의 해병들은 가까스로 4마일을 힘들게 항해하여 초호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잠수함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작전의 목표는 달성했으나 철수에서 예상치 못했던 혼란과 피해를 초래했었던 미완성의 작전이었다.

이 작전에서 섬 주둔 일본군보다 몇 배 많은 병력을 투입했었던 미 해병대는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221명중에 18명이 전사하고 12명이 실종되었다.

12명의 해병중에 한 명은 후에 18명의 전사자 속에 포함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나머지 11명의 실종 해병들은 9명은 연락 미수로 섬에 남겨져 버렸거나 결국 파도에 밀려 본대와 떨어져 다른 해안 지점에 되돌아왔다가 본대와 연락이 두절되었던 해병들이었다.

9명의 해병들은 섬에 남아 있다가 일본군에게 모두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콰자레인 군도로 이송되었다가 지역 방어 사령관 아베 고소 해군 소장의 명령으로 모두 참수형으로 처형당했다.

11명의 실종자중에 두 명은 끝내 그 운명이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미군 전사는 일본군 전사자 숫자들에 대해서 83명에서 160명 선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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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8월 26일 진주만으로 개선하는 마킨 섬 기습대원들



마킨 섬 기습은 어두운 에피소드도 남겼다. 칼슨 부대가 마킨 섬을 떠난후인 8월 22일 일본군은 해병들과 싸우다가 전사한 일본인 유해를 수습하러 왔던 일본 영현반은 일본인 전사체 15,6구의 바지가 벗겨지고 하복부가 노출된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부패가 너무 심해서 그 훼손 정도를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갔지만 후에 미국 TV에 출연한 마킨 섬 기습부대의 한 제대 장병이 일본군 전사체의 생식기를 짤라서 그 전사체의 입에 넣어 주고 기념 촬영을 했다고 고백하여서 일본에서 사체 훼손의 진상이 알려졌다.

미군의 전사는 일본이 저지른 각종 학살에 대해서 모두 언급하고 있지만 미군이 저질렀다는 일본군 학살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

포로나 양민 학살에 지은 죄가 많아서 목소리를 높일 위치에 서지 못할 일본이지만 그 전사에서 과달카날과 타라와에서 미군의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58년이 흐른 뒤에 마킨 섬에 남겨진 19명의 미 해병 유해의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나머지 11명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이들 중 7명의 익사자들이다).

19명의 유해중에 6구는 가족들에게 인계되어 개인적으로 장례식이 치뤘지만 나머지 13구의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기습은 군사적으로는 기습에 성공하여 장비들을 파괴하고 수비 일본군을 제압해버렸다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몇 가지의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를 남겼다.

먼저 작전 목표에 암호 해독 문서와 정보 수집을 위한 포로 획득이 있었다. 그러나 암호 해독서는 노획하지 못했고 포로를 한 명도 획득하지 못해서 이 정보 수집 목표 달성은 실패하였다.

그리고 후방의 마킨 섬을 공략하여 과달카날의 공방전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희석시켰다는 작전 목표는 그 효과에 대해서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반면에 해병대의 마킨 섬 기습은 엉뚱한 부작용을 가져왔다. 과달카날 전투 때는 마킨 섬이 먼 후방 섬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은 이 기습에 충격을 받고 길버트 제도가 향후 태평양 전쟁의 주전장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중부 태평양의 관문인 길버트 제도의 타라와 섬을 요새화했다.

다음 해인 1943년 11월 미국은 일본군이 요새화 했던 타라와 섬을 공격해서 격전 끝에 이 섬을 점령했지만 미국내에서 비난 여론이 일어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 기습은 최초 미 해병이 감행한 적진 후방에 가한 기습으로서 미 국민들과 미군들의 사기를 크게 올렸고 미군의 특수작전의 교리를 개발함에 큰 기여를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더 컸었다.

미군에게 강타를 먹은 일본군은 병력을 증강시켜 마킨 섬을 수비했으나 다음 해인 1943년 11월 21~23일, 타라와 공격과 동시에 감행된 미 육군의 공격에 350명의 일본군 수비 병력이 전멸당하고 섬은 미군에게 빼앗겼다.

이 두 번째 마킨 섬 전투에서 불쌍한 식민지 백성이었던 조선인 노무자 100여명이 희생되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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