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민스크 전투 - 독소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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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7회 작성일 16-02-0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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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 최대의 비극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을 기습 침공하였다. 흔히 동부전선이라고 부르며 제2차 대전을 구성하였던 하나의 전역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라 정의해도 무방한 독소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소련(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이라고 하는 이 전쟁은 한마디로 강철과 강철이 정면으로 충돌하였던 인류사 최대의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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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은 강철과 강철이 정면으로 충돌한 인류사 최대의 전쟁이었다.



역사에 일일이 기록 될 수 없을 만큼 그 동안 수많은 싸움이 있었지만 독소전쟁만큼 격렬하고 잔인한 전쟁은 없었다. 불과 4년이라는 기간 동안 430만의 독일군을 포함한 무려 500만의 추축국 병사들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것도 1,000만의 군인이 전사하고 더불어 1,500만의 민간인이 전쟁의 폭풍 속에 사라져간 소련에 비해 그다지 많은 숫자라 할 수도 없다. 여기에 덧붙여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처럼 인적, 물적 피해가 어마어마했던 이유는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나치와 이에 못지않은 볼셰비키가 주도한 충돌이라는 점도 있지만, 일단 규모가 컸기 때문이었다.

같은 장소였지만 일부 한정 된 공간에서만 싸움이 벌어진 130여 년 전 나폴레옹의 원정 당시와 비교한다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1942년 말에 전선의 길이는 남북으로 2,500킬로미터에 달할 정도였고, 4년 동안 동서로 왕복 5,000킬로미터를 이동하며 쉼 없이 교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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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스크 정부청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독일군. 민스크 전투는 거대한 독소전쟁의 개시를 알린 기념비적 전투다.



당연히 그 동안, 그런 거대한 공간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전투들이 벌어졌다.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파르티잔의 소규모 특공전도 있었지만, 전쟁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같은 거대한 충돌들도 많았다.

그래서 독소전쟁은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전투들의 집합체이기도 했다. 그러한 거대 전투들 중 하나였던 1941년 6월의 ‘민스크 전투(Battle of Minsk)’는 독소전쟁의 서막을 알린 역사적 전투였다.



작전명 바바로사



지금까지 연구되고 밝혀진 독소전쟁의 발발 원인은 여러 권의 책으로 서술해도 모자랄 만큼 방대하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히틀러다.

사실 아무리 국민 간의 감정이 나쁘더라도 전쟁은 그렇게 쉽게, 그리고 함부로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다.

따라서 모든 전쟁은 예외 없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한 권력자나 집단의 확고부동한 의지에 의해서 벌어진다.

히틀러는 동방에 순수 아리아인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임을 누누이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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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 명령 21호. 독소전쟁의 원인으로 많은 주장이 거론되지만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히틀러의 강력한 의지는 그 중 가장 커다란 원인이었다.





독일은 A-A선까지 진출하면 소련이 굴복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소련과 ‘절멸전쟁(Vernichtungskrieg)’을 치를 필요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였을 정도로 전쟁에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망상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을 보유하자 실제로 소련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1940년 12월 18일, 총통 명령 21호를 통해 히틀러는 OKH(Oberkommando des Heeres,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에 구체적인 소련 침공 계획을 입안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총통의 의지에 따라 OKH는 바바로사 계획(Operation Barbarossa)으로 명명된 침공 안을 수립하였다.

침공 4개월 안에 소련의 핵심을 붕괴시키고 볼가(Volga) 강 하구의 아스트라한(Astrakhan)에서 백해의 아르한겔스크(Arkhangelsk)에 이르는 이른바 A-A선까지 진출하는 것이 목표였다.

당초 독일은 1941년 5월 15일 작전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유고슬라비아 점령 때문에 5주라는 시간을 날렸다.

그런데 그것은 이후 소련이 살아날 수 있게 된 천금 같은 시간이 되었다.

1941년 12월 겨울 눈보라와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물러난 히틀러는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바바로사가 그의 별명이다) 황제의 초상화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나에게 지나간 5주를 돌려달라고 절규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히틀러나 OKH 모두 자신감이 충만했던 1941년 봄에는 5주라는 시간의 중요함을 몰랐다.



사상 최대의 침공군



독일은 소련을 일거에 석권하기 위해 33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했고 여타 추축국과 위성 국가들로부터 50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그리고 2차대전을 기점으로 전선의 주역으로 정립되어 가던 전차 3,300여대와 작전기 2,000여기가 투입되었다. 이는 당시까지 지구상에 등장한 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OKH는 이러한 대군을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군(Heeresgruppe)이라는 거대한 3개 병단으로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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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침공을 위해 독일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침공군을 준비하였다.





독일의 3개 집단군은 각각 부여 된 전략 목표물을 향하여 전진할 계획이었다.




관할 육해공군을 망라하여 구성된 이들 집단군은 북에서 남으로 북부집단군, 중부집단군, 남부집단군으로 명명되었다.

이들은 각각 70~100여 만의 병력과 장비로 중무장하였고 전쟁이 개시되면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에 이르는 전략 목적지까지 단숨에 진군하여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예상 진격로 중간에 위치한 여타 요충지들도 당연히 접수하여야 하고 이를 막기 위해 달려들 소련군도 격파하여야 했다.

즉, 독일군은 점령과 섬멸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여야 했다. 그렇게 전쟁 초반에 벨로루시, 서부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신속히 장악해 소련의 항전의지를 꺾을 참이었다.

소련이 거대한 국토와 인구를 가진 나라지만 독일이 1차적 목표로 삼은 이 지역에 인구와 국부의 70퍼센트가 몰려 있었다. 따라서 이곳을 독일이 점령한다면 소련은 순식간 덩치만 커다란 단 팥 빠진 찐빵 신세가 될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속도와 집중이었는데 지금까지 일사천리로 유럽을 석권한 독일은 자신이 있었다. 당연히 그런 자신감이 없이 이 정도의 전쟁을 감행할 수도 없었다.

히틀러는 “석 달이 되기 전에 소련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대문을 박차기만 하면 러시아라는 썩은 건물은 무너질 것이다.”라고 확신하였다.

지난 1936년 라인란트(Rhineland) 진군 시와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 당시 보여 주었던 히틀러의 초조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부족했던 소련의 준비



약 2년 전인 1939년 8월, 모두가 철천지원수라고 생각하던 소련과 독일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Molotov-Ribbentrop Pact)을 체결하여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달에 이 둘은 사이 좋게 폴란드를 침공하여 나누어 먹었다. 이처럼 표면상으로 동맹국이었지만 양측 모두 이런 우호가 단지 필요에 따른 일시적인 관계임을 잘 알았다.

언제라고는, 그리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라고는 단정하지 않았지만 소련도 충돌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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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밀약에 따라 폴란드를 사이 좋게 분할한 후 담소를 나누는 독일, 소련 장교들. 하지는 이들은 2년도 되지 않아 사상 최대의 전쟁을 벌인 주역이 되었다.





독소전쟁 초기 소련군 주력 전차였던 BT-7과 T-26. 소련은 400여만의 병력과 수 많은 장비를 유럽을 향해 배치하여 놓고 있었다.




히틀러의 노골적인 반공, 반소, 반슬라브 신념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자신들도 공산주의 세계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럽으로 영향력을 넓혀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치 독일을 넘어야 했고 둘 사이에 양보와 타협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독일이 서유럽을 석권하자 소련의 불안감은 증가하였고 나름대로 군비 증강에 착수하여 1942년 말까지 1차 사업을 완료할 예정이었다.

독일이 사상 최대의 원정군을 준비하였지만, 사실 당시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500여 만에 달하는 상비군을 보유한 나라였다.

거기에 더해 18,000여대의 전차와 12,000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였는데, 이는 수량으로 독일의 5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국토가 넓었기에 당연히 규모가 컸던 것인데 유럽 쪽의 위기가 점차 증가하자 그 중 약 400만의 대군과 대다수의 장비를 유럽 접경 지역에 집결시켜 놓았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장비가 구식이었고 가동률도 저조하였다. 예를 들어 개전 당시에 움직일 수 있는 전차는 40퍼센트에 불과했고 이제 막 생산되기 시작한 T-34나 KV같은 최신 전차는 국경지역에 배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지난 1937년 대숙청 기간 동안 완전히 무너져 내린 지휘 체계가 더 큰 문제였다. 이런 총체적인 무능이 빚은 참사가 지난 1939년에 있었던 겨울전쟁이었고, 이 때문에 독일은 더욱 소련군을 폄하하고 있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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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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