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민스크 전투 (2) - 결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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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3회 작성일 16-02-0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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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중부집단군



워낙 전선이 거대하여 서로 얽힐 가능성도 없지만 독일의 3개 집단군들은 모두 자신이 담당한 목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당연히 주공은 정해져야 했다.

히틀러는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를 먼저 생각하였지만, OKH는 베를린-바르샤바-민스크-스몰렌스크로 이어지는 유럽 중앙 가도를 따라 모스크바로 진격할 중부집단군(Heeresgruppe Mitte)을 주공으로 결정하였다.

상징성도 컸지만 주력을 중앙에 두어야 필요할 경우 다른 곳으로의 전개도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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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보크. 그는 모스크바를 점령할 중차대한 임무를 담당하였다.





제2기갑집단 사령관 구데리안. 전차와 기갑전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여 기갑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명장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중부집단군은 여타 집단군 보다 강화되었다. 개전 직전에 독일은 지난 프랑스 전역의 교훈을 발판 삼아 기갑부대를 대폭 확대하여 야전군 급 제대인 총 4개의 기갑집단(Panzergruppe)을 편성하였는데, 그 중 2개 부대를 중부집단군에 배속하였다.

여기에 더해 중부집단군을 지원할 제2항공군(Luftlotte 2)도 여타 항공군의 2배 규모인 900기의 작전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 받은 중부집단군의 사령관은 보크(Fedor von Bock) 원수였는데 상당히 깐깐하고 고집이 강한 전형적인 프로이센 무인이었다.

그 예하에는 기갑부대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 구데리안(Heinz W. Guderian)이 지휘하는 제2기갑집단과 역시 기갑전의 맹장인 호트(Hermann Hoth)가 이끄는 제3기갑집단이 있었는데, 이들 쌍두마차는 중부집단군 뿐만 아니라 독일 침공군 전체의 선봉대와 다름없었다.

이들은 지금까지 경험을 토대로 완성된, 이른바 독일군의 ‘쐐기와 이중포위(Keil und Kessel) 전술’에서 적진을 돌파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신속히 포위망을 완성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보병이 주축인 제4군과 제9군이 전면을 압박하여 힘을 보태기로 예정되었다. 어기에 더해 OKH는 독일군 침공군 전체의 예비대인 제2군을 여차하면 후속 투입할 요량으로 중부집단군 배후에 배치하여 놓았다.



소련 서부전선군



독일 중부집단군을 상대하여야 할 소련군은 파블로프(Dmitry G. Pavlov)가 지휘하는 80만의 소련 서부전선군(Western Front)이었다.

총 25개 소총(보병) 사단, 7개 기계화 사단 그리고 13개 전차 사단으로 구성된 서부전선군은 북에서 남으로 제3군, 제10군, 제4군을 제1제대(Echelon)로 편성하여 배치하여 놓았고, 후위에 제13군을 제2제대로 전개하였다.

소련군은 더 많은 전차를 보유하였지만 별도의 독립 부대를 집중 편성한 독일과 달리 분산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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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서부전선군 사령관 파블로프. 독일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참패를 당한 후 분노를 산 스탈린의 명령으로 즉시 처형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소련군 총참모장 주코프. 그는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선제공격을 주장하였으나 스탈린이 기각하였다. 이처럼 독일의 침공 징후를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으나 기습을 막지는 못하였다.




주목할 점은 소련군의 배치가 방어나 경계가 아닌 공격을 목적으로 한 형태라는 점이었다. 이는 비단 서부전선군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전 당시 소련군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스탈린은 만일 장차전이 벌어진다면 소련 밖에서 싸움이 벌어질 것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장담하였다.

귀신보다 두려운 스탈린이 엄명하니 소련군 수뇌부는 어쩔 수 없이 공격 대형으로 부대를 배치하였고 그렇다 보니 많은 일선 최전방 부대들이 방어 시설인 진지 구축을 소홀히 하였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이러한 착각은 전쟁 초기에 소련군이 대거 붕괴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서부전선군은 원래 벨로루시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지난 1939년 9월 폴란드를 독일과 분할하면서 부크(Bug) 강 동쪽으로 주력 대부분을 이동 전개한 상태였다.

원 주둔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경계 태세도 상당히 미약하였다. 거기에다가 스탈린은 아직도 독소불가침조약을 신뢰하고 있었다.

의심 많은 스탈린이 방심하였던 이유는 독일의 기만책 때문이었다. 영국과 교전 중이던 독일은 향후 영국 식민지 분할에 소련도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어 그의 주의를 분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41년 5월 15일 위기감을 느낀 총참모장 주코프(Georgy Zhukov)가 선제공격 허가를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정신이 나갔나?”라고 질책하며 오히려 독일군을 자극하는 일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했을 정도였다.



결전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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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초에 파괴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시가지.



보크는 동프로이센에 배치 된 제3기갑집단에게 비알리스토크(Białystok)를 돌파하고, 동시에 남쪽 부크 강 일대에 전개를 완료 한 제2기갑집단으로 하여금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를 거쳐 안으로 내달리도록 조치했다.

이들 주먹들은 남북에서 약 350킬로미터를 병행하여 진격한 후, 벨로루시의 수도인 민스크(Minsk) 동쪽에서 합류하여 소련 서부전선군을 일거에 포위 섬멸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짰다.

일단 기선 제압이 중요했는데, 그 중에서도 소련 제3군과 제10군의 연결고리인 비알리스토크의 조기 점령이 필요하였다.

그곳은 바르샤바에서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철도와 도로의 교차점인 동시에 소련군의 전방 지휘 시설과 통신망이 집중되어 있는 요지 중의 요지였다.

당연히 소련도 이곳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어서 당시 소련군에서 가장 기계화된 부대로 평가되는 서부전선군을 배치한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 소련군은 공격 제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곳에 정예부대가 배치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내포한다. 만일 독일과 전쟁 발발 시 서부전선군은 독일의 요충지로 진격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거리상으로 비알리스토크는 베를린과 모스크바의 중간이었다. 따라서 서로의 심장을 노리며 오로지 공격을 목적으로 편성 된 정예부대가 이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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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알리스토크 시내로 진입하는 독일군.



그런데 지리적으로 독일 쪽으로 돌출된 비알리스토크는 포위당하기 좋은 구조였다. 마치 1943년 여름에 벌어진 쿠르스크(Kursk) 전투 당시와 비슷하였다.

하지만 종심 깊게 방어 진지를 구축하여 승리한 쿠르스크 전투와 달리 방어를 생각지 않은 1941년 소련군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숫자만 맹신하였다.

서부전선군은 독일보다 3배나 많은 무려 4,000여대의 전차를 보유하였지만 정작 개전 당일 상당수가 작동 불능이었다.



폭풍의 서막



6월 22일 새벽 3시 30분에 드디어 독일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400여 만의 독일 및 추축국 부대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 바로 그 순간에도 평상시처럼 각종 물자를 실은 소련의 화물 열차가 국경을 넘어 독일로 향하고 있었을 만큼 완벽한 기습이었다.

개전 첫날에 독수리 같은 독일 공군의 공습으로 하늘에 떠보지 못하고 지상에서 고스란히 격파 당한 소련 공군의 전투기가 1,200여기에 이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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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공군의 He-111 폭격기 편대. 대대적인 독일 공군의 선제 기습으로 소련 공군은 개전 첫날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었다.



독일 침공군의 주력인 중부집단군도 노도와 같은 공격을 개시했다. 사전 포격과 공군의 공습이 있은 후 곧바로 독일군 전차들이 달리기 시작하였다.

최초로 목표한 비알리스토크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는 원래 폴란드의 영토였다.

하지만 설령 당시에 폴란드가 독립국으로 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소련을 침공하려면 독일은 반드시 이곳을 통과하여야 했다. 결론적으로 폴란드는 히틀러의 전쟁터가 될 운명이었다.

2년 전에 독일과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소련도 이곳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독일의 침공이 있자 격렬하게 대응하고 나섰다. 그런데 소련군 주력을 최대한 빨리 섬멸하기를 원하는 독일 입장에서 이런 대응이 오히려 더 좋았다.

독일은 최대한 빠른 시간에, 최대한 많은 소련군을 격파하여 스탈린의 항전 의지를 신속히 꺾고자 했다. 당대 세계 최강의 육군 강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프랑스도 1년 전에 그렇게 굴복시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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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프랑스 북부의 던커크 해안에서 철수하는 영국군의 모습. 이처럼 독일은 프랑스 침공전에서 초기에 연합국 주력을 격파하여 승리를 얻었다.



그러한 의도대로 서전은 일방적이라는 단어 이외의 다른 말을 떠올리기 힘들 만큼 독일의 우세로 진행되었다.

서부전선군에 우측에 인접하여 비알리스토크 돌출부 북쪽을 담당하던 부대는 소련 북서전서군(Northwestern Front) 예하의 제11군이었다.

독일 제3기갑집단이 상대적으로 방비가 소홀한 전선군간 지경선을 뚫고 제11군을 파고들어 오면서 위기가 발생하였다. 독일 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커서 만일 이곳이 무너진다면 비알리스토크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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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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