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민스크 전투 (3) - 소련에게 큰 피해를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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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1회 작성일 16-02-0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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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 벌어진 상황



소련 제11군은 제대로 손 쓸 틈 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반격 명령이 하달되었지만 정작 전차의 시동은 걸리지 않았고 대포도 발사되지 않았다.

서류상으로 많은 병력과 무기가 있었지만 정작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대숙청 이후 지휘 체계가 무너지면서 벌어진 한심한 모습이었다.

이는 비단 제11군의 문제가 아니라 1941년 6월 소련군 전체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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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집단군의 맹공이 개시되면서 소련 서부전선군은 순식간 절단 되어 포위되기 시작하였다.





돌격하다가 파괴 된 소련군 BT-5 전차. 서부전선군은 반격에 나섰지만 모두 부질없는 시도였고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북쪽에서 독일 제3기갑집단이 네만(Neman) 강을 도하하여 제11군을 순식간 격파하기 시작하면서 소련 서부전전군은 우 측방에 위기가 증폭되었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남쪽에서 독일 제2기갑집단이 부크 강을 도하하며 소련 제4군을 가르고 전쟁 개시 하루 만에 무려 60킬로미터를 전진하여 노보그로덱(Navahrudak)까지 다가가는데 성공하였다.

전방에 있던 서부전선군 예하부대들은 후속하여 안쪽에서 전선을 돌파한 독일 제4, 9군에 포위되어 나갔다.

6월 23일, 소련 제10군이 반격을 시도했으나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고 6월 24일이 되자 비알리스토크의 안위는 더 이상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파블로프는 기상천외한 명령을 내렸다. 예비부대들을 포함한 모든 예하 부대에게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전방으로 진출하라는 파블로프의 명령은 그야말로 불 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었다. 독일군이 쳐 놓은 그물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위험천만한 지시였던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명령이 나온 이유는 그 동안 방어와 관련한 사전 준비나 훈련이 되어 있지도 않아서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전쟁 전에 수립하여 놓은 작전대로 그냥 앞으로 나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련이 선제 기습 공격에 나섰을 때나 유효한 전술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스탈린이 현지 사수 엄명을 내려 놓았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해 볼 여유도 없었다. 사실 지휘관들에게 패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스탈린이었다.



완성된 포위망



결국 오판으로 말미암아 비알리스토크와 노보그로덱 인근에 형성된 거대한 2개 포위망에 최전방의 소련군이 나뉘어 갇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소련군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뒤를 돌아다보면 이미 독일군이 그곳에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엉망진창이 된 통신 사정으로 말미암아 스탈린은 서부전선군 예하 3개 군이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3일이나 지난 후에, 그것도 독일의 선전방송을 통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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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폭격으로 민스크 시내 곳곳이 불타고 있다. 도시에 몰려 든 소련군은 저항을 계속하려 했지만 이런 무서운 폭격에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두 기갑부대가 민스크 동쪽에서 합류함으로써 거대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소련 제4군만이 여기서 탈출할 수 있었으나 엄청나게 타격을 당한 이후였다.




당연히 제대로 된 지시나 명령이 오갈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전력만이라도 포위망을 뚫고 후방으로 후퇴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뒤늦게 파블로프는 포위망이 공고히 되기 전에 이를 돌파하려 가용 전력을 모아 흐로드나(Hrodna)에서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이 시도는 엄청난 피해와 함께 실패로 막을 내렸고 일부 병력이 겨우 민스크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도 최후의 시간을 잠시 미룬 것뿐이었다.

6월 25일, 제2기갑집단 예하의 독일 제47장갑군단이 슬로님(Slonim)과 비우카비스크(Vawkavysk) 사이를 차단하자 파블로프는 모든 중장비를 버리고 사차하라(Shchara) 강을 따라 도보로 후퇴하라는 최후의 명령을 하달하였다.

하지만 배후의 민스크도 이미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독일 제4, 9군이 비알리스토크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6월 27일, 중부집단군의 주먹인 제2, 3기갑집단은 후방으로 파고들어가 민스크 동쪽에서 합류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들 두 기갑집단이 국경에서 35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민스크까지 진격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6일이었다. 하루 평균 60킬로미터 이상을 돌파하여 온 쾌속의 진군이었다.

러시아의 초입이자 작은 러시아로 불리는 벨로루시의 수도 민스크에는 허겁지겁 도망쳐 온 서부방면군의 제3, 13군이 집결해 있었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도 상황을 오판하고 있던 스탈린은 서부전선군의 후퇴에 분노하고 재차 사수 명령을 하달하였다.



결과



6월 28일이 되었을 때, 서부전선군은 크게 둘로 쪼개져 독일군의 포위망 안에 엄중히 갇혔다.

독일 제4, 9군이 포위한 비알리스토크 일대의 작은 포켓에는 초전에 가장 많은 타격을 입은 소련 제10군이, 그리고 그 동쪽 후방인 노보그로덱에서 민스크에 이르는 평원 한가운데 독일 제2, 3기갑집단이 쳐버린 그물에 소련 제3, 13군이 고스란히 갇혔다.

이 거대한 포위망에서 간신히 탈출한 부대는 소련 제4군 일부 예하 부대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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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공격으로 불타는 민스크 시내



6월 30일 포위망을 뚫기 위해 또 다시 반격을 시도하였지만 너무 무의미했다. 그들이 목적지로 삼은 민스크는 독일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1년 후에 포위 된 스탈린그라드 도심에서 소련 제62군이 끝까지 저항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볼가 강을 통한 보급로가 열려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부전선군은 고립무원의 상태였고 거기에다가 반드시 이곳을 사수하여야 할 목적의식도 상실한 상태였다. 결국 그들의 마지막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실질적으로 전투는 6월 28일 끝난 것과 다름없었으나, 7월 3일 소련군이 항복을 하면서 전투는 공식 종결되었다.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12만의 전사상자를 포함하여 총 42만의 소련군이 이 전투에서 붕괴되었다.

2,500여대의 전차, 1,500여문의 대포가 파괴 또는 유기되었고 1,500여기의 전투기가 파괴되었다. 소련 서부전선군은 불과 일주일 만에 전력의 절반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면서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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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 된 민스크 시내로 밀려들어오는 독일군. 전선에서 35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벨로루시의 수도 민스크는 개전 한지 불과 6일 만에 독일에게 피탈 당하였다.



이후 독소전쟁에서 이를 능가하는 전과가 발생한 전투들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몰랐던 당시에 이것은 모두가 경악할 만한 엄청난 결과였다.

패배를 당한 소련도 마찬가지였지만 정작 섬멸을 노렸던 독일도 놀랐다. 이후 독소전쟁에서 대규모의 포로는 피아 모두에게 흔한 광경이 되었지만, 독일은 이때 생포한 30만의 엄청난 포로를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지 당황하였을 정도였다.



의의



1년 전인 1940년 6월, 전통의 육군 강국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였을 당시에 입은 전사상자는 약 30여 만 명이었다.

물론 종전 후 무장 해제 당하며 190여 만의 프랑스군이 포로 신세가 되었지만, 프랑스는 개전 초에 당한 30여 만의 피해로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비알리스토크와 민스크 일대에서 일거에 붕괴 된 40여 만의 소련군이 얼마나 커다란 규모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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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초에 독일군이 노획한 소련군 야포. 소련은 엄청난 병력뿐만 아니라 무기도 상실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대패에도 소련은 프랑스와 달리 항복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참변에 분노한 스탈린은 파블로프와 그의 참모들을 즉각 총살시켜 소련 군부를 긴장하게 만들고 계속 항전을 독려하였다.

비록 이처럼 무서운 권력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소련은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전쟁이 발발 한지 불과 열흘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이 그러한 소련의 무서운 뒷심을 아직 알 수는 없었다.

전사에 민스크 전투 혹은 비알리스토크-민스크 전투라고 기록한 이 전투는 사상 최대의 그리고 가장 잔혹하였던 독소전쟁의 역사적인 서막을 개시한 전투였다.

소련은 초전에 어마어마한 화를 입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아픔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대승을 거둔 독일은 놀랄 만큼 기뻐하였지만 단지 이제야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고 아직 이런 승리의 여유와 기쁨을 누릴 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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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스크 시내를 통과하는 독일군 포병부대. 40여 만의 소련군을 일거에 붕괴시켰지만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중부집단군의 기갑 부대들은 전사에 길이 남을 놀라운 전과를 기록하였지만 전진할수록, 두 다리에 의존하여 뒤를 쫓아오는 보병 부대들과 간격이 벌어져 갔다.

당연히 진격이냐 아니면 잠시 쉬면서 부대를 재편하여야 하냐의 문제를 놓고 일선 지휘관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히틀러가 곧바로 진격할 것을 주장하는 측의 손을 들어주자 민스크 전투가 공식적으로 끝난 바로 그 다음날 전차의 시동은 다시 켜졌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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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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