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과달카날 2차 해전 (3) - 미군의 핸더슨 비행장 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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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5회 작성일 16-02-0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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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 23시, 64 기동 부대는 남동에서 정서 방향으로 변침해서 사보 섬과 에스페란스 곶의 중간 해협인 아이언 버텀 해협으로 진입했다.

직후 레이더에 화면에 우현 16km 에 있는 4개의 연돌이 있던 순양함 센다이가 포착되었다. 이 순간에 센다이 그룹을 제외하고 미군 레이더에 나타난 다른 일본 함들은 없었다.

행크 세리 대위는 높은 견시실에서 고배율 망원경으로 적함 센다이를 확인했다. 전함 워싱턴의 포술장 월쉬는 함교의 제일 높은 사령실에 자리 잡고 포수들에게 16인치 포에 철갑탄을 장전토록 명령했다.

함의 벨이 두 번 짧게 울림과 동시에 워싱턴의 16인치 주포들이 눈을 멀게 할 정도의 섬광과 포성을 뿌리며 포탄을 뱉어냈다. 거의 동시에 5인치 부포(副砲)들이 구축함 일본 함대를 향해 불을 뿜었다.

이어서 전함 사우스 다코다도 일본 구축함 시키시마를 향하여 일제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첫 포격이 일본 함대에 준 피해는 미미했다.

약간의 손상을 입은 경순양함 센다이는 함수를 북쪽으로 돌려서 연막을 뿌리며 이탈을 한 뒤 다시 공격을 위한 재편성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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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0톤급 일본 경순양함 센다이 –네 개의 연돌이 특징이다.



뒤에서 후속하던 곤도 함대 본대는 11시 30분 포성을 확인하고 승조원들에게 전투 배치를 명하였다. 23시 22분. 함대 전방에서 전함들을 선도하던 미 구축함들은 나가라 그룹의 구축함 아야나미와 경순양함 나가라를 발견했다.

토마스 프레이저 사령관이 지휘하는 미 구축함 4척은 포문을 열며 맹렬한 기세로 돌격하였고 일본 구축함들도 주저없이 포 사격과 어뢰 발사로 응전했다.

미 구축함에는 전함들과 달리 레이더가 없었고, 수병들은 일본 해군처럼 야간 해전 훈련을 받은 일이 없었다. 반면 야간 훈련을 풍부하게 받은 일본 함대의 전투 기술이 이 순간에 빛을 발했다.

나가라와 구축함들은 정확한 포격과 뇌격으로 미 구축함대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미 구축함 워키는 좌현에 어뢰가 명중하여 표류하던 중 함에 장비한 폭뢰의 폭발로 굉침(轟沈)하였다. 프레스턴은 받은 포격의 피해가 극심하자 승조원들을 퇴함시키고 함을 포기하였다.

두 구축함은 10분 뒤에 침몰했고 수많은 미 해군 승조원들이 침몰하는 함과 운명을 같이했다. 남은 구축함 벤험도 일본 함이 발사한 대형 93식 어뢰에 맞아 함수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벤험은 또다시 우현 함수에 어뢰가 명중하여 전투 불능상태가 되었다. 또 다른 구축함 그윈 역시 기관실에 명중탄을 맞아 전투에서 이탈해야 했다.

23시 48분. 리 제독은 두 구축함을 전투 해역에서 완전히 철수하도록 지시했으나 벤험은 침수가 계속되다가 다음 날 오후에 침몰했다. 전투 참여 구축함 네 척 중 세 척이 격침되고 겨우 그윈 한 척만 생존하였다.

급조된 리 제독의 구축함 함대는 한 수 위인 일본 구축함들에게 어이없이 희생되고 말았지만, 적과의 첫 교전으로 두 척의 미 전함들에 가해졌을지도 모를 적의 첫 공격을 막아냈다.

그렇지 않았었더라면 성능 좋은 93식 산소 어뢰를 장비한 일본 구축함들과 미 전함들이 직접 조우하여 과달카날의 전투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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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4 기동함대 구축함대에서 생존한 유일 구축함 그윈(다음 해 1943년 7월 코롬방가라 해전에서 뇌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구축함대를 후속하던 워싱턴과 사우스 다코다는 전위 구축함들이 섬멸되다시피한 해역으로 진입했다. 침몰된 구축함들에서 떨어져 나온 부유물과 흘러나온 중유가 해면을 어지럽게 덮고 있었다.

두 전함들은 해상에서 표류하는 수병들에게 구명구를 방출하며 항진해 나갔다. 미 구축함대를 격파했던 일본 구축함대를 후속하는 다른 구축함대가 나타났다.

제 4전대의 구축함 이카즈치, 사미다레이었다. 이들 구축함대는 미 전함들에게 포격을 했다. 일본 구축함들은 배후에 사보 섬이 있어서 레이더에 잘 잡히지 않았었다.

그 발사 원위치를 알 수 없었던 미 함대는 일본군이 사보 섬에 비밀 포대를 설치해놓고 그 포대에서 포탄이 날아오는 것으로 잘못 추측하고 5인치 부포로서 사보 섬을 포격했다.

양측은 어둠 속에서 곧 접촉이 끊어졌고 두 척의 전함들은 항진을 계속하였다.

이어 전방의 일본 구축함 아야나미를 발견한 워싱턴과 사우스 다코다는 즉시 5인치 부포들을 발포했다. 두 전함들이 가한 포탄 세례를 뒤집어 쓴 아야나미는 화염에 휩싸였고 잠시 후 침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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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침 된 아야나미[綾波)



바로 이 운명의 시각, 워싱턴을 후속하며 뒤따르던 사우스 다코다에서 갑자기 이상이 발생했다. 그 고장 많고 사고 많았던 전함에 하필 그 순간에 전기 배선에 문제가 생겨 버린 것이다.

정비담당 부사관이 작은 고장을 수리하려고 회로 차단기를 닫았는데 이것은 정비 안전상 규칙 위반이었다.

그 뒤 전기만 넣으면 주회로 차단기는 계속 닫혀버렸다. 레이다, 무선, 그리고 사격 통제 장치들이 모두 침묵해버렸다. 함의 전기 정비 기술로는 즉시 수리가 불능하였다.

적과의 접적 순간에 사우스 다코다는 손발과 머리가 다 없어지고 물위에 떠있는 쇳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사우스 다코다는 워싱턴을 후속하며 곧 터질 해전의 결전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23시 45분까지 두 척의 전함은 사보 섬 서쪽 해안으로 진행하다가 좌측인 남쪽으로 항로를 변경했다. 대파 된 채 아직 해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표류하던 미 구축함 두 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눈과 귀가 막히고 손발도 자유롭지 못한 사우스 다코다도 이 코스를 계속 따르려 했는데 대파된 채 표류하던 구축함 벤험이 갑자기 목전에 나타나 이를 급히 피하느라 워싱턴과는 반대 방향인 오른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이 방향 조정이 사우스 다코다를 불타고 있던 미 구축함들을 등에 진 실루엣 형태로 만들어 버려 미 함대를 찾고 있던 일본 함대에게 뚜렷한 목표를 제공하게 되었다.

한편 후속하고 있던 일본 함대 사령관 곤도는 구축함 아야나미와 다른 함들로부터 미국 구축함대 격멸을 보고 받고 더 이상의 위협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는 기리시마 등 과달카날 포격 부대를 이끌고 그대로 항해를 계속했고 이 결정이 결국 미국과 일본 함대가 서로 마주보고 달려오는 형국을 만들어냈다.

드디어 곤도의 주력 부대는 갈팡질팡하는 사우스 다코다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일본 함대는 강력한 탐조등으로 사우스 다코다를 조명하고 포문을 열었다. 탐조등 조명에 기리시마도 가세했다.

일본 함대로부터 포탄과 어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말했다시피 장님과 귀머거리 꼴이 되어서 공격력까지 잃은 사우스 다코다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과달카날 포격을 주임무로 하던 기리시마까지 가세했다. 기리시마의 포격은 1943년 11월 15일 자정부터 개시 되었다.

적의 포격이 만드는 섬광을 향해 사우스 다코다도 수동으로 응전해서 기리시마에게 수 발의 명중탄을 보내기도 했으나 자신은 무려 25발의 크고 작은 포탄들을 얻어 맞았다.

일본 함대는 포격 중간에 사우스 다코다가 혹시 기리시마가 아닌가하고 일시 포격을 중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우스 다코다가 전원을 일부 복구하고 일본 함대에게 주포와 부포로 응전하면서 포격전이 다시 불타올랐다.

사우스 다코다의 탑재 수상 정찰기가 포탄에 맞아 화재를 일으켜 일본 함대에게 좋은 표적을 제공하였다.

일본군의 집중 포화는 사우스 다코다의 함내 전화와 기능이 조금 남아 있던 포탑 조정 장치까지 날려 버렸고 상갑판에 화재를 일으켰다.

참혹한 가격을 당한 사우스 다코다는 급히 함수를 돌려 적과의 접촉을 끊으려 했다. 도주하는 사우스 다코다의 뒤를 가공할 위력을 가진 일본 어뢰 여러 발이 뒤쫓았지만 운좋게도 사우스 다코다에는 명중되지 않았다.

이 야전에서 사우스 다코다 승조원 39명이 전사하고 59명이 부상했다. 사우스 다코다는 리 제독에게 보고도 없이 전장을 벗어났다. 하고 싶어도 무선이 안 되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 함대의 견시들은 도주하는 사우스 다코다의 그림자를 계속 시야에 담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중상을 입고 도주하던 사우스 다코다에 포격을 집중했다.

곤도의 함대는 사우스 다코다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어서 워싱턴이 자신들 측면 9,000야드 가까이까지 은밀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워싱턴은 이미 한참 전부터 커다란 기리시마의 영상을 레이더에 담고 있었지만 그 레이더 속의 물체가 워싱턴을 따라 오다가 헤어진 사우스 다코다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 일단은 포격을 자제하고 있었다.

사실 사우스 다코다는 워싱턴의 레이더 사각지대에 있어서 레이더에는 잡히지 않고 있었다. 무선 접촉도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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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주포 일제 사격



워싱턴은 포격전에 기리시마가 짧게 밝혔던 탐조등을 보고 비로서 사우스 다코다로 의심하던 레이더 화면의 함이 일본 함인 기리시마로 확인했다.

9,000야드까지 접근한 워싱턴은 오인 포격의 염려를 털고 레이더의 도움으로 조준한 기리시마에게 함의 6인치 포 9 문과 부포 40문의 가공할 포화를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자정이 조금 지난 00시 5분이었다. 워싱턴은 일제 사격을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세 번을 거듭하였다.

전함 워싱턴에서 크고 작은 포탄들이 어마어마한 발포 섬광을 남기며 기리시마에 날아갈 때에야 비로소 일본 함대는 공격을 알아채고 기겁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날 워싱턴은 16인치 포탄 75발을 발사했고 부포 5인치 포탄 40발을 발사하였다. 이 중 기리시마에게 명중한 탄은 16인치 포탄 9발이었다.

거탄을 9발이나 맞은 기리시마는 처참한 최후를 향해 가고 있었다. 기리시마는 먼저 연돌 주변에 큰 화재가 발생하고 후부 부포들에도 화재가 이어졌다. 항타가 고장 나서 조타도 불가능했다. 이어서 후부 주포에도 화재가 발생했다.

중앙 기계실의 엔진이 부분적으로 가동되었으나 기관실의 승조원들은 거의 죽거나 중상을 입어서 기리시마는 겨우 미속으로 움직였다. 제일 치명적인 손상은 후부 수면 하에 생긴 대형 구멍이었다.

물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 들어왔다. 여기에 더해서 화재가 일어난 전부와 후부 화약고에 물을 주입하다가 보니 함내에 물이 가득 차서 완전 항해 불능이 되었다. 기리시마는 우현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00시 12분, 기리시마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불덩이가 되어 버렸다. 경순양함 나가라와 구축함들이 기리시마의 예인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비슷한 시각에 미 전함들의 몰매를 맞은 구축함 아야나미도 포기되었다.

구축함 우라나미가 아야나미의 생존자들을 구출했고 구축함 아사구모, 데루즈키, 사미다레가 기리시마의 생존자들을 구출했다.

기리시마의 함장은 최후를 직감하고 먼저 부상자들을 구축함으로 옮기고 이어서 승조원들도 이동시켰다. 기리시마의 함장이하 1,128명이 구조되었다.

15일 오전 세 시 반쯤 기리시마는 주위에서 구축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닷 속으로 사라졌다. 전사자 212명의 유해도 함과 운명을 같이 했다. 03시 25분에 이미 포기했었던 구축함 아야나미도 침몰하였다.

15일 00시 20분, 일제 사격으로 기리시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워싱턴은 홀로 북쪽 러셀 군도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전속력으로 달렸다.

과달카날에 병력과 물자를 조달할 일본 다나카 수송선단을 찾아내서 격멸하기 위해서였다. 다나카 부대는 곤도 부대를 후속하고 있었다.

기리시마의 최후를 목격했었던 곤도의 일본 함대도 반전하여 워싱턴을 추격했다. 10km 거리에서 미일 함대는 서로 발견하고 십 여분간 교전을 하였다.

일본 순양함 아다고와 다카오는 미국 함대와 같이 병진하며 여러 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명중에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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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양함 나가라



경순양함 나가라와 구축함 하츠유키가 20발 가까운 어뢰를 워싱턴에게 발사했다. 워싱턴의 데이비스 함장은 직접 타륜을 잡고 절묘한 회피 운동으로 어뢰들을 모두 피해냈다.

워싱턴의 포격에 일 순양함 다카오 함수가 명중하여 손상을 주기도 했으나 양쪽이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이날 워싱턴을 추적하며 발사한 일본 어뢰들중 여러 발의 일본 어뢰들은 침몰한 미국 구축함들의 부유물에 맞거나 일본 어뢰의 고질적인 문제로 조기 폭발을 일으켰다.

일본 해군은 세 발의 오발 어뢰 폭음을 청음하고 이 폭음들이 미국 전함에 어뢰가 명중해서 생긴 것으로 잘못 판단하였다. 이날 해전에서 워싱턴이 입은 피해는 함교 아래에 명중한 일본 127mm 함포 한 발뿐이었다.

북상하던 워싱턴은 별다른 목표를 발견하지 못하자 이렇게 큰 해전을 겪은 일본 수송선단이 양륙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00시 30분 함수를 돌렸다.

해전이 벌어지는 동안 기리시마에서 발진했던 무라지마중위가 조종하는 수상 정찰기가 미군의 대공포 사격에 격추당해 두 명의 승무원들이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이 두 번째 과달카날 해전에서 미국 해군은 242명이 전사했고 일본 해군은 249명이 전사했다.

포술에 정통했던 지휘관들의 관심과 훈련으로 다듬어진 포격 팀, 그리고 레이더의 도움과 기습을 가능케한 행운이 미 전함 워싱턴을 도왔고 결과적으로 일 전함 기리시마는 최후를 맞았다.

01시 04분. 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도 했지만, 곤도 사령관은 그래도 후속하던 다나카의 수송 함대들을 위협할 만한 큰 장애물을 대강 제거했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함대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과달카날의 병력 수송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소란한 해전으로 네 척의 수송선은 계획보다 훨씬 늦은 04시 00분 과달카날의 해안에 도착했다.

수송선단을 지휘하던 사령관 다나카 소장은 유일한 임무 달성 방법은 수송선 4척을 과달카날의 섬 양륙 지점에 돌입시켜 좌초 시키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판단했다.

참모들은 난색을 표했으나 날이 곧 밝아올 해안에서 어물어물 할 수가 없었다. 네 척의 수송선이 과달카날의 사후론가 해안에 돌입했다. 구축함 9척도 육군 병력을 양륙하고 30분 뒤에 과달카날 해안을 이탈해서 전력으로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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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 당일 아침, 과달카날 해안에서 불타고 있는 일본 수송선



05시 55분. 핸더슨 기지의 해병대 전투기들은 동이 트자마자 이륙해서 해안에 돌입해 들어온 수송선들에게 폭격을 시작했고, 여기에 합세해서 육상의 해병대 포대와 접근한 미 구축함도 포격에 가세하였다.

결국 수송선들은 불타고 파괴되었으며 싣고 온 화기와 탄약, 식량, 장비도 모두 파괴되고 타버렸다.

과달카날 해전이 있기 전에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증원하기로 계획했던 것은 완전 무장한 보병 1개 사단 12,000명과 여기에 필요한 군수품이었다.

그러나 수송 항해중 공습을 받았었고 두 번에 걸친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수송선들이 과달카날 해변에서 괴멸되는 바람에 과달카날에 상륙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단지 2,000명의 병사와 260개의 탄약 박스, 그리고 상륙 병력이 겨우 나흘간 먹을 수 있는 쌀 1,650 부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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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 좌초한 일 수송선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과달카날 해전의 성공이 과달카날 확보의 분기점이 된다고 말했는데 일본이 전함 두 척을 잃은 이 과달카날 해전은 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 해전 뒤 일본은 정식 수송 함대에 의한 수송을 단념하고 '도쿄 특급'구축함을 이용한 야간 수송 작전을 감행하며 일본군을 지원해야 했다.

야간에 과달카날 해변까지 도둑처럼 들어가서 방수 포장한 보급 물자를 수중에 던지고 재빨리 도망쳐 오는 비정상적인 보급 형태였다.

이런 방법으로는 소량만을 보급할 수 있었고, 과달카날의 1만 명의 일본군은 매일 50여명이 병과 기아로 죽어가는 참담한 지경의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1943년 2월 9일에 완전 철수하고 말았다.

두 거대 전함들끼리 맞붙은 해전은 일본 전함의 침몰로 미 해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투 후 야마모토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곤도 중장을 직위 해제하였다.

미 전사가 이반 뮤시칸은 과달카날 해전을 2차 세계 대전 중에 있었던 미드웨이 해전, 아프리카 전선의 엘 알라메인, 전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공방전과 같이 제 2차 세계 대전의 대전환점들 중 하나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미 해군이 일본 해군의 수송선단에 의한 대량 수송과 충분한 보급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했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한듯하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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