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 (4) - 보어인들의 대이주와 줄루와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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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6회 작성일 16-02-0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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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보어인들을 움직이게 하였나



샤카가 사망하고 그의 이복형제인 딩가네(Dingane)가 왕위를 차지하였을 때는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의 보어인(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영국인들을 피해 원주민들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였다.

보어인들이 줄루 왕국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을 당시, 줄루 왕국의 흑인들은 이미 백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백인들과 수십 년간 교역을 해오면서 아프리카 땅에 정착한 백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었다. 즉, 흑인들이 아무 것도 모른 채 고립되어 있다가 무지막지한 백인들의 침공으로 멸망당했다고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여 틀린 관점이다.

줄루 왕국과 백인들의 충돌이 시작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줄루 왕국의 영역으로 들어온 백인들이 하필이면 ‘보어’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일단 근처의 항구를 거점으로 수렵과 무역을 하면서 줄루 왕국과 교역하는 방식을 택했기에 많은 땅이 필요하지 않았고, 줄루인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통치를 거부하고 보어인들이 내륙으로 이주하면서 그동안 약간의 긴장은 있었지만 대체로 평화로웠던 흑-백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보어인들은 기본적으로 농사꾼들이었다. ‘보어(Boer)’라는 말 자체가 네덜란드어로 ‘농부’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가족들이 먹고살 만큼 경작하는 소규모 자영농이 아니었다. 보어인들의 농경 방식은 집을 중심으로 한 넓은 경작지를 가지고 있고, 거기에 추가로 목축에 필요한 광대한 목장(초지)을 겸한 방식이었다. 땅을 일구는 동시에 목축까지 해야 하니 당연히 농부 한 사람의 농장이 차지하는 땅의 크기가 엄청났다. 또한 땅은 넓은데 가족들만으로서는 노동력이 부족하다보니 흑인들을 고용하여 부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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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의 보어인 가족의 사진. 보수적인 청교도 칼뱅주의자이자 선민의식을 지니고 있던 이들은 농부로서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하여 영국의 통치를 거부하고 19세기 초 ‘대이주’를 감행하였다.



그들이 영국인 통치를 거부하고 떠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러한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말하였듯이 영국인들이 통치를 시작하면서 금지시킨 것 중 하나가 ‘노예’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노예제 폐지는 네덜란드인들에게 그리 큰 타격은 아니었다. 노예를 부릴 만한 여유가 있는 부자들은 대개 줄루나 흑인부족들과의 경계보다는 안전한 해안가에 살고 있었고, 변경 지역에서 농장을 일구고 있던 보어(boer)인들은 많은 수의 노예를 둘 만한 여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 중소형 농장주들은 대개는 농번기에 흑인들을 계절 노동자(seasonal workers)로, 저임금으로 고용해서 일을 시켰다. 따라서 기존의 관점과는 달리 1833년 영국 정부의 노예 금지령이 네덜란드인들에게 준 타격은 크지 않았다.

네덜란드(보어)인들에게 더욱 심각한 것은 오히려 언어와 종교의 문제였다. 케이프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이들은 결국 새로이 등장한 영국인들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이 때문에 네덜란드어 대신 영어를 배워야 했다. 여기에 많은 수의 네덜란드인들이 지극히 보수적인 청교도 칼뱅주의자들이었다.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영국인들의 ‘자유스러운’ 기독교를 혐오하였고, 게다가 근본주의 기독교도 특유의 선민의식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라고 생각하였고 최고의 기독교인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길은 열심히 일하여 땅을 일구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 믿었다. 당연히 흑인들은 야만인이었고, 자신들과 동일한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영국인들도 네덜란드인들을 꽉 막히고 촌스러운 ‘구약적 기독교인(Old Testament Christians)’라고 부르며 멸시하였다. 영국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은 오래 지내면 지낼수록 갈등이 깊어져만 가는 관계였던 것이다.




보어인들의 대이주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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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이주 당시 보어인들의 이동 경로.



네덜란드인들의 이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앞서 말한 1833년의 노예제 폐지보다는 1828년의 소위 ‘제 50호 법령(Ordinance No. 50)’이다. 제 50호 법령은 영국의 식민지 내에서 유색인 자유민(free-coloured persons)들은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기독교적 선민의식과 백인 우월주의로 똘똘 뭉친 네덜란드인들에게 이는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네덜란드계 보어 지도자들은 이주를 결정하고, 이에 앞서 이주에 적합한 땅을 찾기로 한다. 이들은 1832년 영국인 학자 스미스(Andrew Smith)와 농민 출신인 베르그(William Berg)를 내륙지역으로 파견하여 좋은 땅을 물색하게 하였다. 조사에 착수한 이들은 지금의 남아공 전역을 돌아보았고 나탈 지방이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하에 나탈 지역을 면밀히 조사한 후, 케이프로 복귀하면서 나탈 지역이 강의 수량도 풍부하고 땅이 넓은 데다 원주민도 별로 없어 보어 농부들의 거주에 더없이 적합할 것이라고 극찬하였다. 스미스와 베르그의 긍정적인 보고를 받은 보어인 지도부는 1834년 9월에 남녀 20명으로 구성된 본격적인 탐사대(Kommisstrek)를 조직하여 나탈 지방으로 보내게 된다.

이 탐험대는 험준한 해안가보다는 비교적 평탄한 내륙지방을 통과하면서 지형과 수로(水路), 그리고 원주민 거주 여부를 관찰하였다. 이들은 수개월 간의 힘든 여정을 마치고 후일 더반(Durban: 남아프리카공화국 동부 나탈 주에 위치한 항구도시) 시가 되는 포트 나탈(Port Natal)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포트 나탈에 있던 소수 영국인 거주민들의 환대를 받았고, 이들의 안내를 받아 샤카를 암살한 이복동생 딩가네가 다스리고 있던 줄루 왕국으로 향하고자 하였다. 이들이 보아둔 땅 일부가 줄루족의 영역 내에 있어 줄루족과의 협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마침 우기여서 백인 지역과 줄루 왕국의 경계를 이루고 있던 투겔라(Tugela) 강이 불어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케이프로 귀환해야만 했다. 이들 탐험대가 1835년 10월에 케이프에 도착하여 네덜란드인 지도자들에게 내놓은 보고서는 매우 긍정적인 것이었다.

이후 나탈에 잠깐이나마 살아본 일이 있던 네덜란드인 얀 반티예스(Jan Bantjes)에 의하여 드라켄즈버그(Drakensberg) 산맥을 넘어가는 지름길이 발견되었다. 앞서 선발 탐험대의 긍정적인 보고에 이어 지름길의 발견은 영국인들의 치하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자 하는 네덜란드인들의 희망을 부추겼다. 1836년에 시작된 보어인들의 이주는 1837년 말에 대홍수를 이루었고, 이는 이후 ‘대이주’라 불리게 된다. 그리고 이는 백인들과 줄루 왕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거친 생활로 단련된 보어인들 VS 음페카네로 공격적인 마티벨레 족



19세기 말, 영국과 보어계 공화국들 사이에 전운(戰雲)이 감돌 때 영국인들은 보어인들을 깔보고 있었다. 제대로 훈련을 받지도 못했고 제복도 없는 데다 규율과 기강도 형편없는 보어인들이 영국군의 상대가 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어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점은 틀리지 않았다.

대이주를 떠날 당시, 보어인들에게는 정규군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소유하고 있는 무기도 낡았고 집단적으로 싸우는 훈련도 되어 있지 않았다. 지휘 체계나 군복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다. 그렇지만 넓은 땅에서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목축을 하는 보어인들은 총을 다루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남부 아프리카에 우글거리는 야생동물들로부터 우양(牛羊)을 지켜야 함은 물론이고, 변경 지역에서는 흑인 부족민들과의 충돌도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당시 보어인 성인 남자라면 총을 들고 자신의 농장과 가족들을 지키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이 때문에 보어인 집단에는 거친 생활을 통하여 단련이 된, 사격술 좋은 성인 남성들이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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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중인 보어인 가족을 묘사한 1898년의 그림. 보어인 성인 남자는 언제나 총을 잡고 가족과 재산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이때 보어 남자들은 대부분 근대식 라이플(소총)이 아닌 긴 구식 머스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만약 보어인들이 이처럼 거친 생활로 단련되지 않았더라면 그 당시 남부 아프리카의 대혼란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영국인들이 싫어서 이주를 하기는 했지만, 대이주는 곧 보어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활 기반을 모두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대이주에 앞서 풍요롭고 새로운 땅에 대한 탐사대의 긍정적인 보고에 고무된 보어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쉽게 정착지를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줄루 왕국의 팽창으로 인한 유랑민의 대규모 이동인 음페카네(Mfecane)가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이들 유랑민들은 생존을 위해서 흑백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이 때문에 보어인들의 대이주에 이은 개척 과정은 글자 그대로의 ‘생고생’이었다. 모르긴 해도 이주민들은 이주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탐사대를 저주하였을 것이다.

보어인들의 험난한 여정은 1834년에 시작되었다. 마치 성경의 가나안처럼 ‘젖과 꿀’이 흐른다는 오렌지(Oranje) 강과 발(Vaal) 강을 향하여 출발한 첫 이주 집단은 고생 끝에 델라고아 만(Delagoa Bay)에 도착하기는 하였으나 탈진과 병으로 대부분의 인원을 잃고 다시 케이프로 복귀하였다.

1836년에는 포트기터(Andries Potgieter), 레티프(Piet Retief), 유이스(Pieter Uys) 등이 각각 이주민 집단을 이끌고 신천지에 정착하기 위하여 떠났다. 이중 포트기터가 이끄는 이주민들은 오랑예 강과 발강 사이의 땅에 자리를 잡고자 하였다. 포트기터의 이주민들이 정착하려고 들어온 곳은 이후 오렌지 자유국(Oranje-Vrystaat)이 세워지지만, 당시 이 지역은 음질리카지(Mzilikazi)라는 추장 휘하의 마테벨레 족이 베추아나 족을 몰아내고 자기네 땅으로 만든 곳이었다. 샤카의 죽음 이후 그 이복동생인 딩가네가 줄루 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그는 휘하에 수많은 제후 부족을 거느리고 있었다. 마테벨레 역시 응구니 집단에 속하였고 당연히 줄루 왕 딩가네의 신하였다. 그러나 반독립적인 모든 영주들이 그러하듯이, 국왕 몰래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전쟁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베그코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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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벨레 족의 추장 음질리카지(Mzilikazi). 줄루 왕국의 국왕 몰래 자신의 영토를 넓히려던 그는 결국 보어인들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땅을 빼앗긴 채 쫓겨난다.



자신의 영역을 넓혀 종국에는 독립된 왕국을 만들기를 원했던 음질리카지는 보어인들이 그들의 영토 안에 들어오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그는 즉시 포트기터와 보어인들을 공격하였고, 드디어 1836년 10월, 보어인들과 줄루인들과의 첫 전투가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라이스타트(Vrystaat, 영어로는 Free State) 하일브론(Heilbron)시 근처 베그코프(Vegkop)에서 벌어진다.

전투의 시작은 보어인들에게 매우 불리했다. 마테벨레가 공격을 시작했을 때 일부 이주민들은 정찰을 위하여 멀리 나와 있었고, 또 다른 이주민들은 먹을 것을 사냥하기 위해서 본대와 떨어져 있었다. 음질리카지가 이끄는 5000여 명의 전사들은 백인들을 공격함에서 있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정찰대와 채집하던 사람들 모두 마테벨레 전사들에게 몰살을 당했다.

보어인 정찰대와 식량을 채집하기 위해 본대와 떨어져 있던 보어인들을 모두 죽인 마테벨레 전사들은 곧바로 보어인 본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본대의 보어인들은 공격해오는 마테벨레 전사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그들의 짐마차들을 묶어 커다란 윤형진(輪形陣: 주로 함대의 해상 전투 대형으로 쓰이는 전투 대형으로, 주력함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함정을 배치함) 방벽을 만든다. 이러한 역마차 윤형진은 이후 보어인들이 줄루인들과 치를 수많은 전투에서 그들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마테벨레 전사들은 보어인들의 윤형진을 에워싸고 수많은 창을 던졌으나 모두 방벽에 막혔고, 오히려 장애물이 없는 개활지에 나와 있었던 탓에 사격술이 좋은 보어인들의 총구 앞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워낙 전통적으로 외부인들과의 교류를 꺼리는 편이었던 보어인들은 최신 무기가 없었고, 그 당시 막 등장하고 있던 라이플(Rifle, 소총) 대신 총알을 앞으로 넣는 전장식(前裝式) 머스킷(Musket, 활강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총알이 총신(銃身) 안에 만들어진 나선형 홈을 따라 회전하며 나오는 라이플과는 달리 머스킷은 대개 총알이 총구보다 작은 편이었고, 따라서 발사되면 총구에 작은 충돌을 일으키며 나아갔기 때문에 발사 후 탄도(彈道)가 매우 불안정한 데다 사정거리 70m정도를 넘어가게 되면 명중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러나 베그코프 전투에서는 마테벨레 전사들이 창을 던지기 위하여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보어인들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활강총의 사정거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어 여인들과 하인들은 윤형진의 중앙에 비교적 안전하게 있으면서 앞에서 총을 쏘는 남성들에게 총탄을 쉬지 않고 날라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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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그코프 전투를 묘사한 그림. 보어인들은 역마차를 이용한 윤형진으로 요새를 삼아 40여 명의 병력으로 5000여에 달하는 마테벨레 대부대를 물리쳤다.



이날의 전투는 비록 활강총이기는 하지만 요새화된 지역에서 장거리 발사 무기를 사용하는 전투 방식이 개활지에서의 근접전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미리 탄환과 탄약을 준비하고 싸우는 남성 뒤에 있던 여성들이 즉시즉시 이를 날라다 줌으로 인하여 베그코프에서의 보어인들은 수석식 활강총(Flintlock musket)으로는 경이적인, 1분에 6발이라는 발사 속도를 과시하면서 마차로 둘러싼 요새 주변의 마테벨레 전사들을 사격하였다(이에 비하여 19세기 초의 숙련된 베테랑 군인들도 1분에 4발 정도를 발사하였으며, 신병들은 이보다도 낮았다). 이 전투에서 보어인들의 수는 총 60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 중에 전투할 수 있는 남성은 40명, 그나마 7명은 미성년자였다. 이에 비하여 마테벨레의 병사들은 확실치 않지만 5000여 명이 동원되었다 한다. 보어인 본대의 피해는 불과 전사 2명, 부상 4명이었던 것에 비하여 마테벨레 측의 사상자는 약 500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마테벨레 전사들이 보어인들의 소와 양들을 모두 끌고 후퇴를 함으로써 보어인들은 당장 식량난에 처하게 되었다. 포트기터와 보어 민병대는 혹시라도 마테벨레 전사들이 돌아올까봐 식량난을 겪으면서도 며칠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후 정찰을 통하여 마테벨레 전사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포트기터와 보어인들은 그 당시 이주 중인 보어인들의 집결지 역할을 하고 있던 타바 은추(Thaba Nchu)로 이동한다. 여기에는 보어인들이 수만 명 모여 있었고, 포트기터는 즉시 400명 규모의 부대를 만들어 마테벨레에 대한 보복을 단행하기로 하고, 즉시 마테벨레의 수도인 모세가(Mosega)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거대한 분지 지형인 모세가에는 약 15개의 크랄이 모여 있었는데, 포트시터와 함께 타바 은추에 있던 다른 보어 지도자인 마리츠(Gert Maritz)가 이끄는 보어 민병대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15개의 크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잡아 죽였다. 마테벨리를 이끄는 추장 음질리카지는 패잔 부족민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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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인들을 이끌었던 포트기터. 완고하고 보수적이었으나 아프리카 원주민과의 여러 차례 전투에서 보어인 이주민들을 승리로 이끌었다.



마테벨레 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타바 은추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싸움이 일어났다. 강인한 리더로서 전장을 잘 이끌었지만 꽉 막히고 세련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포트기터와 게르트 마리츠라는 인물 사이에 내분이 발생한 것이다. 마리츠는 전직 공무원이자 상인으로서 도시 출신이었고 법을 잘 아는 인물이었기에 마테벨레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우선 정부 조직부터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넓은 초원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면서 자신들끼리 사는 것이 목적이었던 포트기터는 마리츠 같은 도회지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들이 더 열심히 싸웠는데도 마테벨레에게서 빼앗은 소들을 반으로 나누려 하는 마리츠에게 불만을 품었다. 더군다나 마리츠는 포트기터와의 회담에서 그에게 ‘군사령관’의 지위만 주고 자신은 새로이 결성된 ‘보어 정부’의 대통령이자 대법관으로 자임하였다. 이에 포트기터 집단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결국 포트기터는 무리를 이끌고 타바 은추를 뒤로한 채 발강 너머의 더 넓은 땅을 향하여 떠나려 하였다.




레티프의 도착과 보어인들 사이에서 시작된 갈등



타바 은추가 보어인들의 집결지가 된 까닭은 주변의 작은 부족이었던 바롤롱(Barolong) 족의 추장 모로카(Moroka)가 보어인들을 동맹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바롤롱 족은 이 지역에 먼저 이주해왔다가 이후에 이주해온 마테벨레에게 땅을 빼앗긴 후 힘없는 부족으로 지내고 있었다. 이들은 언젠가는 마테벨레에게 복수하려 다짐하고 있었고, 마침 보어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자 이들의 힘을 빌려 원수인 마테벨레와 싸울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들의 중심지인 타바 은추를 보어인들에게 개방한 것이다.

타바 은추는 넓지는 않지만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려 풀이 많고 곡물이 잘 자라는 비옥한 지역이었다. 바롤롱 족이 자신들의 땅을 개방하면서 이곳에 보어인들이 몰려들자 타 부족들이 잘 건드리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이후 이 지역에 나라를 세운 보어인들은 바롤롱 족의 도움을 잊지 않았다. 이곳에 정착한 보어인들은 바롤롱의 땅을 빼앗지 않고 그대로 살게 해주었으며, 그 자치권은 이 지역이 영국에 넘어간 후에도 유지되어 지금도 모로카 추장의 후손들이 자치권을 가지고 부족과 관련된 사법권을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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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의 볼트레커 기념관에 있는 피에 레티프 조각물. 프랑스계 위그노의 후손으로 명망이 높았던 레티프는 연합 집단의 지도자로서 보어인들을 이끌었으나 이후 속임수에 빠져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출처:(cc) Joonas Lyytinen at en.wikipedia.org>



마리츠와 포트기터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때마침 타바 은추에 피에 레티프(Piet Retief)가 도착하였다. 부유한 상인 출신인 그는 아울러 영국 케이프 식민지 동부에서 행정관을 지내면서 보어인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케이프타운의 식민지 관리들에게 흑인 부족과의 충돌과 관련하여 동부 케이프의 상황에 대한 진정서를 보낸 일이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영국 식민지 관리들은 그의 지위를 박탈하려 하였다. 이에 레티프는 1837년 2월에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그레이엄즈타운(Grahamstown)의 신문에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는 보어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영국의 통치에 불만이 많기는 하였지만, 그 누구도 레티프처럼 논리 정연하게 보어인들의 관점을 대변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 식민지 관료들의 태도에 실망한 레티프 역시 이주를 결정하고 타바 은추로 이동하였다.

타바 은추에 도착한 레티프는 보어인들의 환대를 받았고, 특유의 인품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계산적인 마리츠와 완고한 포트기터와 자신을 차별화하였다. 도착한 지 불과 며칠 만에 레티프는 타바 은추(보어인들은 이곳을 ‘블레스베르그(Blesberg)’라 불렀다)에서 보어인들의 지사(知事), 즉 지도자로 선출된다. 이는 남아프리카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네덜란드계 주민들이 영국의 통치를 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지도자로 선출된 레티프는 블레스베르그의 보어인들을 위한 ‘헌법’을 만듦과 동시에 보어인들이 영구히 정착할 만한 땅을 찾기 위하여 선발대를 보낸다. 이때 블레스베르그의 보어인들은 그들이 살게 될 최종 정착지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였다. 일단 포트기터를 따르는 집단은 다시 발강을 건너 그 너머의 땅으로 갈 것을 주장하였다. ‘하이벨드(Highveld)’로 불리우는 그 지역은 초지가 많아 목축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도시 출신들을 비롯한 많은 수의 농부들은 수량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하다는 나탈 지방으로 향할 것을 주장하였다.




카파인 전투,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결국 두 집단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레티프는 나탈 지방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으며 포트기터는 새로이 유입된 유이스와 함께 공격 부대를 선발하여 마테벨레에 대한 최종적인 공격에 나섰다. 하이벨드 정착에 방해가 되는 마테벨레를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1837년 11월 초, 이전에 공격했던 모세가로 향하였다. 그러나 모세가는 완전히 비어 있었고 보어 특공대는 마테벨레를 추적하여 보다 내륙으로 들어갔다. 결국 이들은 현재 남아공의 북쪽 마디크웨(Madikwe) 인근의 카파인(Kapain) 지방에서 다시 왕국을 재건하고 있던 마테벨레를 발견하였고, 300명 남짓의 보어인들과 여전히 수천 명이 있는 마테벨레 줄루 간의 2차 전투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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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레커 기념관에 묘사된 카파인 전투. 전통적인 쇠뿔 대형을 고집한 마테벨레는 기마 부대와 대포, 사격술로 무장한 보어인들 앞에 속수무책이었다.<출처:(cc) Joonas Lyytinen at en.wikipedia.org>



베그코프에서 마차 요새 안에 웅크린 채 절체절명의 싸움을 벌였던 보어인들은 카파인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전술로 싸웠다. 마테벨레는 백인들을 공격하면서 샤카 이래 줄루족의 전통인 ‘쇠뿔’ 대형을 이루어 공격하였다. 그러나 보어인들은 수십 년간 줄루족을 비롯한 흑인들의 습격을 경험해보았고 또한 줄루족과 교역을 하던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줄루족이 어떻게 싸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쇠뿔 대형은 발 빠른 전사들이 적 대형 양옆을 우회하고, 본대가 정면에서 들이쳐 적을 포위하는 개념의 전술이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던 보어인들은 마테벨레 전사들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우회 부대를 사격하여 진격을 좌절시키고 기마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본대를 괴롭혔다. 그리고 이동식 대포를 이용하여 마테벨레의 임피(부대)들에게 지속적인 손실을 입혔다.

여전히 수적으로는 열세인 보어인들은 우회 부대에 대한 사격과 본대에 대한 타격을 반복하였고, 그때마다 마테벨레의 진격은 분쇄되었다. 샤카가 과거의 전술을 응용하여 쇠뿔 진형을 만든 후 줄루족에서는 이 전술을 융통성 있게 응용하거나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마테벨레는 같은 방법으로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쇠뿔 진형으로 공격하기를 반복하였다. 전투는 며칠간 계속되었고 마테벨레 임피의 손실은 늘어만 갔다. 병력의 손실이 누적되자 마테벨레는 서서히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점차 현재 보츠와나(Botswana: 아프리타 남부 중앙 내륙에 위치한 나라)의 수도 가보로네(Gaborone) 방면으로 밀려났다.

1837년 11월 12일,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고 음질리카지는 여전히 같은 방법으로 전사들에게 최후의 돌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마테벨레의 전사들은 너무나 지쳐 있었다. 보어인들의 머스킷과 대포가 작렬하는 가운데 마테벨레의 전사들은 돌격할 힘을 잃고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전투가 끝났을 때 (보어인들의 기록이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보어인 330명 중에는 부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마테벨레 전사들은 무려 3000명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마테벨레는 이제 발강 유역에서 물러나야 했다. 보어인들은 승리하였고 마테벨레 족은 땅을 빼앗겼다. 그러나 카파인 전투는 시작에 불과했다. 마테벨레가 보어인들에게 패한 지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 줄루 왕국에 닥칠 재앙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참고자료


· E.A. Ritter, [Shaka Zulu:The Rise of the Zulu Empire]

· Brian M. Du Toit, [The Boers in East Africa: Ethnicity and Identity]

· James O. Gump, [The Dust Rose like Smoke: The Subjugation of the Zulu and the Sioux]

· Louis Creswicke, [South Africa and the Transvaal War]

· G.W. Eybers (ed.), [Selected Constitutional Documents Illustrating South African History, 1795-1910]

· Oliver Ransford, [The Great Trek]

· 김성남, [전쟁세계사]

· www.sahistory.org.z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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