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타라와 전투 1 - 교두보를 확보하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85회 작성일 16-02-07 08:55

본문















14548029102976.png


1942년부터 8월부터 6개월간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쟁탈을 두고 미군과의 혈투에서 일본 육해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고 1943년 2월, 20여 척의 구축함을 동원한 야간 철수로서 그 비참한 참패의 막을 내렸다. 과달카날에서 피나는 전투 끝에 일본군들을 몰아내고 여세를 몰아 과달카날과 다른 도서들이 있던 솔로몬 제도를 점령한 미국은 북상하여 중부 태평양 해역으로 진공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중부 태평양 공략의 핵심 목표는 길버트 제도의 타라와 섬이었다. 타라와 섬은 여러개의 환초로서 이 환초에서 제일 큰 섬은 베티오 섬이다.





14548029112249




타라와 환호초 전투는 아래 왼쪽 베티오 섬에서 벌어졌다.



삼각형에 가까운 이 섬은 길이가 약 3km, 폭이 가장 넓은 곳은 겨우 800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섬의 중앙에 일본군이 구축했던 비행장 활주로가 있었다. 베티오 섬은 현재는 인구 10만의 키리바시 공화국 수도 섬이다. 키리바시 공화국은 길버트 제도, 그리고 피닉스 제도, 그리고 라인 제도, 세 개의 제도를 통합해서 1979년에 탄생한 작은 도서 국가다. 타라와 환초는 길버트 제도의 맨 서쪽에 있다.





14548029124602




타라와 환초 군도의 배티오 섬- 중앙에 활주로가 있다.



타라와 섬은 미군이 반격의 첫 단계로 확보한 솔로몬 제도의 북부에 있는 섬으로 하와이와 호주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중부 태평양의 관문에 위치한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었다. 태평양 제패를 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그 북쪽 마리아나 군도 공략의 발진 기지로서도 중요했다. 과달카날 점령 작전을 끝낸 미군은 타라와 점령을 위한 작전 준비에 돌입하였다.





14548029132942




시바자키 소장



반면 일본군도 이 섬이 갖는 전략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타라와 섬 북쪽 길버트 제도에 속한 마킨 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다. 60명의 일본군이 수비하고 있었다. 1942년 8월 17일 두 척의 잠수함에 나누어 탄 221명의 미 해병들이 이 섬을 기습하여 일시 점령했다가 철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이 기습에 충격을 받고 이 일대의 도서들이 가진 전략적 중요성에 눈을 떴다. 일본군은 마킨 섬에는 병력을 증파하고 타라와 섬을 거대한 콘크리트 요새로 변신시켰던 것이다. 섬의 방어 사령관은 해군 소장 시바자키 게이치 제독이었다. 그는 소좌 시절부터 주로 육전대 분야에서 참모와 지휘관으로 경력을 쌓아 육상 전투에 전문성이 풍부하였다.

그는 타라와의 주변 상황이 심각해질 때 구레 해군 기지의 경비대장격인 구레 진수부 방비 전대 사령관의 자리에 있었다. 구레에 부임한지 3개월도 되기 전에 그는 남양으로 보내졌다. 그에게 제 4 함대부 제 3 특별근거지대 사령관의 직책이 주어졌다. 그는 1943년 7월 20일, 방어 시설 공사가 거의 완벽하게 되어가던 타라와 섬에 부임했다.





14548029145707




일본 해군 육전대는 해병대에 해당하며 해군의 한 병과였다. 1932년에 상설화되었으며 육군보다 더 강한 정예 부대라고 평가가 있었다.



타라와 방어 주력군은 큐슈의 사세보 군항에 주둔하고 있다가 그 해 2월에 급파 된 스가이 다케오 중좌의 정예부대인 제 7 특별 육전대 병력과 시바자키 소장이 직접 지휘하던 병력, 그리고 타라와 비행장을 운영하는 제 755항공대 기지 지상요원 30명을 모두 합쳐서 합계 2,601명이다. 방어군은 14량의 95식 탱크도 장비하고 있었다.





14548029155941




일 육전대가 동원했던 95식 경전차 - 휘발유 엔진이어서 불이 붙으면 차량 전체가 불에 휩싸였다.



그러나 타라와 섬에는 일본 전투 병력 외에 다수의 민간인들이 있었다. 타라와 섬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서 일 년 간에 걸쳐 투입 된 수 천 명의 건설 요원들이다. 일본 해군 제 111 설영대 소속 건설 인력이 1,247명, 그리고 제 4함대 설영 파견대가 970명, 합계 계 2,154명이다. 인원 구성을 들여다보면 우리 민족이 겪은 한 비극의 단서가 보인다.

건설 인력들은 소수의 일본인 군속과 약간의 중국인을 제외하면 전원 한반도에서 징용으로 끌어 온 조선인들이었다. 한 자료는 타라와에 끌려온 조선인들의 총수가 1,400여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과 조선 군민 합쳐 타라와에서 미군의 포화를 뒤집어 쓸 일본측의 총 인원은 약 4,700명이었다.

미군 전사는 타라와의 방어 군세(軍勢)를 위의 총원 4,900명이라고 했지만 말했다시피 극히 과장된 것이다. 미군은 자신들의 막대한 피해가 대부대로 구성된 일본군에게 당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주도록 죄 없는 조선인까지 포함한 숫자 타라와 수비 병력으로 계산하였다. 되풀이 말하자면 미군에 맞선 일본 실제 방어 전투 병력은 2,600명뿐이었다. 나머지 대부분은 전투력 없는 조선인들이었다.

약 1년 가까운 공사 기간에 타라와 섬에는 콘크리트 벙커와 교통호, 지하 갱도로 치밀한 거미줄이 쳐졌다. 이들 통로 네트워크 요소마다 시멘트를 퍼부어 만든 500여개의 토치카가 있었다. 방어 시설은 육상에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적이 상륙할 만한 곳에는 수중 장애물과 장벽이 만들어졌다. 일본군은 과달카날 해안에 아무 방어 설비도 하지 않았다가 미군에게 허점을 찔리고 무혈 상륙을 허락했던 경험이 있기에 해안에 해안포 시설을 설치했다. 총 14문의 해안포가 고정 설치되었고 그 중 4문은 8인치 거포로서 영국제였다.

해안포들은 전쟁 전 러일 전쟁 기간에 영국에서 긴급 수입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포들은 영국이 싱가포르에 설치했던 것과 같은 형이다. 1941년 7월 20일 현지에 부임한 방어 사령관 시바자키 게이치 소장은 조선인들이 피와 땀을 흘려서 만들어가던 방어 시설을 보고 자신만만하게 큰 소리를 쳤다. 그렇게 큰 소리를 쳤지만 그는 미군 침공 날까지도 진지공사를 계속하였다. 넉 달 뒤 그가 터뜨린 큰소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미군은 막강한 전투력을 집중하여 공격해왔다. 드디어 길버트 제도를 점령하기 위한 갈바닉(Galvanic) 작전이 발동된 것이다.





14548029167929




타라와 해안의 8인치 해안포



섬의 상륙 공격은 1943년 11월 20일, 대규모의 함포와 항공기로 섬을 타격한 후 개시되었다. 단지 4,900명이 수비한 타라와 섬을 공격해간 미군의 화력과 병력은 가히 가공 할 만 했다. 상륙 공격의 선두에 투입된 병력은 해병 2사단의 주력에 육군 27사단 1개 연대가 증강된 35,000명이었다. 투입한 전차 부대도 1개 대대의 50량이었다. 이 규모는 그 때까지 태평양에서 행해진 상륙 작전 중 최대규모였다. 상륙이 개시되기 하루 전부터 섬에 집중 된 화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최초의 접적 상륙 작전이었으므로 아군 피해 최소화를 위해서 적을 화력으로 무력화시키는 전술 원칙이 이 엄청난 화력 동원의 이면에 있었다. 과달카날섬에서 최악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저항하던 일본군의 전투력을 경험한 미군이 경계심에서 택한 전술일 것이다.

함포 사격은 물론 상공을 가리듯 출격한 함재기들의 폭격도 집요하게 시설과 인원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공격했다. 이 항공 공격에 미군의 신형 F-6F 헬캣기들이 동원되었다. 일본군은 해안포에 기대를 가졌었다. 그래서 미 전투함들이 근해에 접근하지 못할 것으로 기대했었으나 엄폐가 되지 않고 노출 된 해안포들은 함포의 집중 사격에 곧 파괴되었다. 엄폐가 안 된 8인치 거포들은 미 전함 메리랜드, 콜로라도와 포격전을 벌여 전함들의 16인치 포탄에 그 중 3문이 파괴되었고 남은 한 문도 다음날 무력화되었다.

11월 20일 하루 동안 해군기와 함대가 이 작은 섬에 퍼붓는 화력을 선상에서 지켜본 해병들은 섬의 적들이 모두 전멸했으리라고 예상했었다. 맹렬한 포격후 11월 21일 아침 9시부터 감행했던 사상 첫 적전 상륙은 섬의 세 곳을 향하였다. 플로리다의 늪지대를 마음대로 다니는 기계를 보고 착안해서 만든 LVT-1 앨리게이터 수륙 양용 장갑차가 사상 최초로 120량이나 투입되었다.





14548029180073





해변에서 돈좌 된 해병들의 공격



준비를 잘했다고 했지만 상륙작전은 초반부터 꼴사납게 진행되었다. 상륙 작전은 정교한 계획과 실행이 요구되는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군사작전이다. 그런 대규모 상륙작전을 미군은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작전 계획 담당자는 조수 간만의 차이를 잘 계산하지 못해서 너무 물의 높이가 낮은 날을 선택한 것이 타라와 해변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날은 하필이면 두 달에 한번 찾아오는 가장 수심이 낮은 날이었다. 적어도 1미터 50센티의 깊이가 되어야 운용할 수 있었던 상륙용 주정은 수심이 불과 30-40 cm 밖에 되지 못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륙 양용 장갑차 다수도 담처럼 섬을 둥글게 감싼 산호 암초들을 넘지 못하고 바둥거렸다. 이 난감한 상황은 적을 500미터 앞에 두고 발생했다. 다수의 해병들은 아무 엄폐물도 없는 초호의 얕은 물을 걸어서 해변으로 접근해야 했다. 상륙 부대가 환초라는 장벽에 걸려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을 본 일본군의 대소 포들이 불을 뿜었다. ‘수변격멸(水邊擊滅)’이라는 대 상륙작전 전술이 있다. 적은 상륙할 때가 최고로 취약하니 이때 전력을 다해서 적을 쳐야 한다는 고전적인 전술이다. 일본군의 이 전술 교리에 따라 최대의 화력을 다 쏟아냈다.





이미지 목록



1
14548029190682




2
14548029199216



히긴스 보트





타라와 전투 초기 문제를 드러낸 앨리게이트




천신만고 끝에 해변에 다가간 해병들은 일본군이 조선인 노무자들을 시켜서 야자나무를 베어 높이 쌓아 구축한 해변의 장벽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해안에 상륙한 해병들은 일본군의 극심한 기관총 사격으로 고개도 들지 못했다. 기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수륙 양용 장갑차도 장갑이 얇아 무수한 구멍이 나고 파괴되었다. 그날 하룻동안 절반의 수륙 양용 장갑차가 사용 불능상태로 파괴되었다. 함포 사격으로 일본군의 해안포 화약고 하나가 대폭발과 함께 날아갔지만 일본군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비처럼 쏟아내는 기관총 사격과 함께 일본군의 박격포 사격이 마구 가해졌다. 일본군이 보유한 50여문의 화포들이 미 해병대와 해군 함정들에게 계속 타격을 가했다.





14548029211727





야자 나무 장벽의 해안- 수륙 양용 장갑차의 접근 차단용.



그러나 이날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쏟아 부은 병력과 물량 덕택에 해병들은 겨우 타라와 섬에 교두보를 만들었다. 해병들은 함포와 항공지원을 최대로 활용하면서 섬의 중심으로 진격하였다. 토치카와 지하 갱도에 의지하여 저항하던 일본 육전대의 격렬함은 용맹이나 사납다는 단어보다도 차라리 광기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14548029226620





상륙직후 참혹한 해변의 모습



무자비한 화력의 폭풍우에도 일본군의 저항은 지독했다. 대부분의 일본군은 자결을 할지언정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일본군의 광기는 결국 미군의 화력에 압도당하기 시작했다. 발악하다시피 하던 일본군의 토치카는 미군 함포와 상륙한 전차대, 그리고 보병들의 화염 방사기에 의해서 하나하나 섬멸 당했다.

해병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오후 늦게 상륙한 전차대의 도움을 받으며 조금씩 전진해서 반대편 해안이 지척에 있는 지점까지 전진하여 일본군 양분을 목전에 두고 21일 첫날의 작전을 마감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8.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