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타라와 전투 2 - 큰 피해를 동반한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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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6회 작성일 16-02-0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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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섬의 요새 공격



22일 날이 밝자 공격은 재개되었다. 미해군 함대는 해안에 증원군을 더 파견하였다. 일본군은 이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군 기관총 부대가 밤새 해안에서 600미터 떨어진 해변에 좌초한 화물선에서 몰래 스며들어가 기관총을 거치하고 상륙하는 해병들을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여러 번의 공습에도 버티던 이들은 해병들이 공병대를 투입해서 화물선을 폭파시켜 버리고서야 침묵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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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요새에 화염방사기 공격. 섬의 내부 콘크리트 요새들은 총구가 없었고 출입구만 있어서 화염 방사기가 효력을 발휘하였다.



타라와의 수비를 자신하던 시바자키 소장이 전투 이틀째인 이날 전사했다. 그는 섬의 서쪽 끝에 있던 자기의 지휘소를 급증하는 부상병들에게 내주고 참모들과 함께 두 대의 95식 전차 엄호하에 해변 쪽의 지휘소로 이동하던 중 교통호에 떨어진 미 구축함의 함포탄에 참모들과 같이 전사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극렬한 후반 방어 전투는 사령관도 없이 싸운 전투였다. 이날부터 미군들에게 투항하는 일본군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상당수는 군인으로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머리를 기르고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이들 노동자 행색의 인간들은 공포로 거의 정신을 잃은 수준이었다.

해병들은 이들 포로들을 후방으로 후송해서 통역병들을 통해 심문하였다. 포로들은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동양인의 얼굴을 보자 다소 안도하여 자신들을 가리키며 서투른 일본어로 한국인임을 밝혔다. 그들 민간인들은 일본인들이 아니라 조선 반도에서 끌려온 조선인 징용자들이었다.

미군들이 피해를 무릅써가며 토치카를 하나하나 섬멸해가자 그 날 밤에야 비로소 확실한 승리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미군은 확실하게 반대편 해안에 도착하여 섬의 일본군을 양단했다. 트럭 섬의 일본 해군 사령부는 미군의 상륙을 알리는 급전을 받고 26일에 육군으로 구성된 구원군을 출동시키기로 결정을 했었지만 더 이상의 무선 연락이 두절되자 이 계획을 취소하였다.

작전 삼일 째인 23일. 아침을 보급으로 보낸 상륙부대는 다시 전진하여 섬의 구석으로 일본군을 몰아넣었다. 대부분의 병력은 거의 다 전사하고 자신들의 생명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일본군은 이날 밤에 마지막 옥쇄 돌격을 시도했으나 해병들의 치열한 포격으로 좌절했다. 심야에 일본 해군의 쌍발 1식 육상공격기가 상공에 나타나 어림 짐작으로 폭격을 가해 경미한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다음 날 24일 새벽 4시, 마지막 남은 110명의 일본군 육전대가 반자이 공격을 가했다. 자살 돌격대는 그 전날 실패했던 꼭 같은 지점으로 몰려왔다. 3회에 걸친 공격은 미군의 맹렬한 포병 화력에 소멸되고 말았다. 한 시간의 전투가 끝난 뒤 본 해병들 앞에는 마지막 반자이 돌격에 실패하고 죽은 일본군의 전사체 백 여구가 흩어져 있었다. 사실상 새벽의 반자이 돌격으로 타라와 전투는 끝이 났다. 단 한 명의 일본군 장교와 16명의 사병, 그리고 129명의 조선인이 전투 종료 뒤 포로가 되어 살아남았다. 미군의 기록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죽은 일본군의 총 4,71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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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전투의 포로들



미 2사단 해병대의 전상 사망자 포함 전사자는 1,009명이었고 2,296명이 부상당했다. 687명의 해군 수병들이 상륙 작전중 전사했다. 2천 6백명 정도의 일본군이 3일간의 전투에서 그 후 7년 뒤 장진호반에서 중공군 6만 명의 13 병단이 15일간 해병 1사단에게 준 수준보다 더 큰 피해를 준 것이다.

공격하는 미군이 방어하는 일본군보다 병력수에서 일곱 배나 많았지만 조선인들을 동원해서 만든 견고한 엄폐물 뒤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일본 병들의 독한 저항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단 사흘의 짧은 전투기간 작은 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지나치게 많이 발생한 사상자수는 미국 정계와 사회를 놀라게 하였다. 언론을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미국 상륙전의 아버지라 불리던 해병대의 5 상륙군단장 홀랜드 장군도 타라와 공격을 비난하는 글을 남겼다. 너무 견고하게 방어된 섬에 무리한 공격을 가해서 큰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타라와 작전은 결과적으로 성공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이 그런 사람중 한 명이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섬을 결국 점령한 것도 큰 수확이지만 작은 섬에서 얻은 상륙전의 교훈은 엄청난 것이라는 것이었다. 상륙전의 새로운 교리를 개발한 것은 물론이고 화력 운용의 노하우 습득과 장비의 개선등은 해병들이 흘린 피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였다.

1944년 타라와에서 싸운 일본군 보다 열 배나 많은 2만 3천명의 일본군 병력이 타라와 이상의 광적인 저항을 해댄 유황도 상륙 작전은 타라와에서 얻은 귀중한 교훈이 없었다면 미군에겐 상상하기도 힘든 큰 비극이 발생했을지 모른다고 말해진다. 공격군의 엄청난 동원 병력과 화력, 그리고 그에 맞서 표독스럽게 저항하던 방어군이 전멸한 이 전투가 단 사흘 동안에 진행되었다면 각 순간마다 느껴지는 그 전투의 강도는 세계 전사에서 유례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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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직후 해변에 남은 미일 양군의 파괴된 장비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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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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