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 (5) - 보어인들에게 닥친 ‘통곡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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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26회 작성일 16-02-0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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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에 도착한 보어인들, 줄루와 접촉을 시도하다



포트기터(Hendrik Potgieter)와 유이스(Piet Uys), 마리츠(Gert Maritz)의 보어인 부대가 카파인에서 마테벨레-줄루를 대파하는 동안 레티프(Piet Retief)가 이끄는 행렬은 남쪽 나탈로의 이동을 강행하였다. 당장 따라나서는 사람은 없었지만, 레티프는 만약 지도자인 자신이 잘 알려지지 않은 땅으로 먼저 가는 모범을 보이면 많은 이주민들이 뒤따라오리라고 생각했고, 그 계산은 들어맞았다. 포트기터는 카파인에서 마타벨레-줄루를 대파함으로써 광대한 목초지인 하이벨드(Highveld)가 자신의 영지(領地)가 되리라 생각하였으나 카파인 전투의 다른 주축이었던 유이스와 라이벌인 마리츠가 레티프를 따라 나탈로 향하면서 다른 집단들로부터 실질적으로 버림을 받았다. 결국 포트기터 역시 마음에도 없던 나탈행을 택하면서 포트기터의 하이밸드행은 좌절되었다.

레티프가 나탈로 향하고 있던 1837년 9월의 남반구는 겨울이 초봄으로 바뀌고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는 때여서 사방에 꽃이 만발하였다. 아울러 내륙 지방과 나탈의 해안 지방을 가르는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드라켄즈버그(Drakensberg) 산맥의 정상에 이르렀을 때, 레티프는 가히 천상의 풍경을 목격하였다. 산맥 아래의 지형은 가파른 곳이 하나도 없이 평지와 완만한 구릉이었다. 땅은 온통 녹색의 풀로 덮여 있었고, 나무가 우거진 수려한 계곡들이 대지를 수놓았다. 만약 화가가 있다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땅에서는 한가로이 짐승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계곡과 구릉 사이마다 깨끗한 개울물이 쾌청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보어인들이 그동안 보아왔던, 잡목이 우거지고 메마른 아프리카와는 전혀 딴 세상처럼 보였다. 그들의 앞에 드디어 ‘약속의 땅’이 나타난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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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켄버그 산맥 앞에 펼쳐진 캐시드랄 계곡(Cathedral Valley). 오랜 이주 끝에 보어인들은 녹색의 풀로 덮인 완만한 구릉과 넓게 펼쳐진 평지를 발견하였고, 이곳 ‘약속의 땅’에 정착하고자 줄루 왕국의 국왕인 딩가네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출처: (cc) Cwawebber at en.wikipedia.org>



나탈 지역에 진입한 레티프는 일단 포트 나탈(Port Natal, 현재의 더반(Durban))을 향하여 짐마차를 몰았다. 이들은 탐사대가 접촉하려 하였으나 만나지 못한 줄루 왕국의 국왕을 만나고자 하였다. 그들이 나탈에 정착하는 데 필요한 ‘승인’을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때 줄루 왕국의 국왕인 딩가네(Dingane)를 만나러 가는 길이 재앙과 전쟁의 시작임을 알지 못하였다.

나탈에 정착하기 전에 이곳을 지배하고 있던 줄루족의 왕인 딩가네와 접촉하는 것은 당연했고, 레티프는 딩가네와의 만남을 조급하게 추진하였다. 레티프의 조급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각자 대가족 집단으로 반독립적인 삶을 누리던 보어인 이주민들은 좀처럼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앞서 마테벨레와의 싸움에서도 일시적으로 통합 부대를 만들기는 하였지만, 노획물을 나누는 조그마한 일에도 합의를 보지 못하고 서로 갈라서기 일쑤였다. 레티프는 재빨리 나탈에 보어인들의 자치령, 또는 국가를 세움으로써 툭하면 싸우고 갈등하는 보어인들을 하나로 통합하려 하였다. 아울러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나탈에서 가장 좋은 땅을 나누어주고자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포트 나탈에 있는 영국인들과 그들의 뒤에 있는 영국 정부가 나탈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문도 레티프의 조급증을 부채질하였다. 그러나 포트 나탈에 도착했을 때, 레티프는 영국인들이 나탈에 관심이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오히려 포트 나탈의 영국계 주민들부터 환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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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토리아 볼트레커 기념관에 서 있는 피에 레티프의 석상. 나탈 지역에 보어인들의 자치령을 세워 보어인 이주민들을 통합하려 한 그는 딩가네와의 만남을 조급하게 추진하였다. <출처: (cc) JMK at en.wikipedia.org>



레티프는 포트 나탈에 머물면서 협상의 대상인 딩가네와 줄루족에 대하여 최대한 알아내려 하였다. 아직 드라켄즈버그 산맥 인근에 머물고 있던 이주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줄루족이 투겔라(Tugela)강 이남의 땅을 실질적으로 포기하였기 때문에 이주와 정착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쓰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보어인들이 도착하기 직전, 서구인 복장을 한 강도들이 줄루족의 소떼를 훔쳐 달아나는 일이 있었고, 이에 대한 오해도 풀어야 했기 때문에 레티프는 줄루 방문을 더욱 서둘렀다.

그러나 조급해하는 레티프와는 상관없이 줄루 왕인 딩가네는 보어인들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일단 드라켄즈버그 산맥 아래의 땅을 모두 자신의 영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딩가네로서는 그곳에 보어인들이 떼거지로 나타난 것도 싫었을 뿐더러 갑자기 많은 수가 나타난 것도 의심스러웠다. 소수의 백인들이 교역을 하면서 자신에게 선물이라며 신기한 물건을 가져다주는 것은 좋았지만, 보어인들의 대규모 이동은 그렇지 않아도 의심 많은 딩가네의 불안감을 극도로 부추겼다.




‘흑인 네로’, 딩가네



당시 줄루인들을 포함한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무시와 멸시였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야만의 상태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줄루에 대한 기록은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백인들의 편견을 감안하더라도 딩가네는 결코 좋은 임금이라 할 수 없었다. 그는 의심이 많았고 소심하지만 동시에 교활하며 잔인하였다. 여기에다 욕심이 많았고 허영과 자기 자랑이 심했으며, 광포한 동시에 변덕이 심했다. 줄루 백성들은 딩가네가 언제라도 자신들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움에 복종하였을 뿐,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존경심은 없었다.

물론 딩가네의 의심과 소심함은 어느 정도 그의 즉위 과정과 당시 줄루 왕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딩가네는 정상적인 등극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그의 이복동생인 믈랑가나(Mhlangana)와 공모하여 이복형이자 줄루의 대영웅인 샤카(Shaka)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왕위를 노리는 친척들과 이복형제들이 많았고, 이들을 꼬드기는 아첨꾼들도 많았다. 아울러 앞서 보어인들과 싸운 마테벨레의 음질리카지처럼 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제후들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딩가네의 통치는 의심으로 시작하여 의심으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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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복 차림과 예복 차림의 딩가네. 자신의 이복형인 샤카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그는 의심이 많고 소심하면서도 교활하며 잔인한 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는 별도로 딩가네는 여러 면에서 군주로서의 자질이 의심되는 인물이었다. 딩가네에게는 전전(前前) 왕인 딩기스와요의 관대함도, 그의 이복형인 샤카의 무위(武威)도 없었다. 태생적으로 의심이 많고 잔인한 성격의 그는 자신을 배신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배신은 고사하고 단순히 그의 비위를 거슬렸거나 기분을 나쁘게 하였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많았다.

그의 잔혹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 수도인 움군군들로부(Umgungundlovu) 북쪽에 있는 콰-마티와네(Kwa Matiwane)라는 언덕이었다. 콰-마티와네는 줄루 왕국의 공식 처형 장소였다. 여기에 끌려오는 사람들은 대개 언덕에 널려 있는 돌로 타살되었지만, 보다 중죄인들은 마치 왈라키아(Walachia: 루마니아 남부 평원의 지방)의 드라큘라가 그랬듯이 엉덩이에 꼬챙이를 넣어 꿰어 죽였다. 콰-마티와네라는 이름 자체도 자신에게 반란을 꾀했다는 명목으로 마티와네란 인근 추장을 잡아와 죽인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곳에서 처형당한 시신들은 매장조차 되지 않았으며 독수리들이 와서 뜯어먹도록 방치되었다. 딩가네는 콰-마티와네의 독수리들을 ‘자신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배불리 먹이도록’ 하였는데, 이는 거의 매일같이 그곳에서 누군가가 죽어야 함을 의미하였고, 그의 측근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딩가네는 수십 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그의 지휘관(은두나)에게 ‘건방지게’ 굴었다는 이유로 콰-마티와네에서 처형당했으며 그 은두나는 그의 아내를 처형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역시 며칠 뒤 같은 곳에서 처형되었다. 이런 딩가네를 기록한 백인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사람을 죽일 때 분노에 떨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 없이 냉혹하게 죽인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현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싸이코패스의 기질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잔인함과 더불어 그는 폭군과 혼군(昏君: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인 허영과 과시욕이 상당히 심했다. 당시 줄루 사회에서 부(富)의 척도는 바로 보유한 소(牛)의 숫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당시 백인들에게 야만이라고 멸시받았던 줄루 사회의 기준으로 보아도 딩가네의 과시욕은 도를 넘는 것이었다. 딩가네가 가장 좋아하는 여흥거리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소들이 수도의 광장에서 왔다 갔다 하며 마치 군무(群舞)하듯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전사들의 군사훈련보다도 좋아했다. 그 당시 줄루족의 수도에 있던 한 영국인 선교사의 증언에 의하면 딩가네는 레티프의 사절단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크랄에 연락을 하여 그 소들을 왕도에 데리고 올 것을 명하였다 한다.

딩가네는 화약과 총기의 소유에도 관심을 보였다. 백인을 경멸하던 그가 왕도 주변에 선교사가 거주하는 것을 허락한 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화약과 총을 얻기 위해서였다. 물론 딩가네가 화약과 총을 얻으려고 한 것은 그의 전사들을 총기로 무장한 강군(强軍)으로 만들기 위함은 아니었다. 자신의 근위대를 최신식 무기로 무장시킴으로써 왕으로서의 위세를 드높이려고 한 것이었다. 딩가네는 전사들이 춤을 출 때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어줄 수는 있었지만, 상당히 뚱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혹(40세)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에 50마일(80km)을 걷는 체력을 지녔던 그의 이복형 샤카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왕으로서 샤카만큼의 위엄과 카리스마가 없었기에 그가 위세를 과시하는 일에 더욱 더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국 출신 선교사는 딩가네에게 성경 말씀과 서양식 그림을 가르치려고 할 뿐 그의 요구에 잘 응해주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딩가네는 이 선교사에게 콰-마티와네가 내려다보이는 맞은편 언덕에 집을 짓도록 하였다.




함정에 빠진 레티프의 처참한 최후



암살로 왕위에 오르고 폭군 기질이 역력했던 딩가네가 자신의 땅에 들어와서 정착하겠다는 백인들을 곱게 보았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이주해온 보어인들의 수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자 딩가네는 이들이 자신의 왕국을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불안감이 커졌다. 그러나 일단 백인들의 의도를 알아보자는 생각에서 레티프에게 왕도에 와도 좋다고 전하였다. 레티프가 왕도로 가는 동안 딩가네는 마테벨레 족에게서 빼앗아온 염소들이 있는데, 이는 베지코프에서 빼앗긴 보어인들의 것 같다며 레티프에게 이 양들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하였다. 뜻밖의 호의에 레티프는 어쩌면 나탈에 쉽게 정착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레티프는 마침내 줄루왕국의 왕도(王都)인 움군군들로부에 도착하여 딩가네를 만났다. 레티프는 딩가네에게 투겔라 강 남쪽의 땅을 보어인들에게 팔라는 제의를 하려고 하였으나 딩가네는 이전의 호의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얼마 전에 백인의 옷을 입은 자들이 줄루족의 소를 훔쳐갔다며 그것이 보어인들의 짓이 아니냐고 레티프를 몰아세웠다. 레티프는 백인의 옷을 입고 백인 행세를 하는 부족들이 있다며 자신들은 그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항변하였다. 백인 행세를 하기로 소문난 이 부족의 이름은 틀로크와(Tlokwa)였고 그 추장은 세코니엘라(Sekonyela)라는 인물이었는데, 딩가네는 보어인들의 결백을 증명하려면 세코니엘라로부터 소를 다시 빼앗아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는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딩가네의 신하들은 보어인들이 왕도에 들어오는 즉시 죽이자고 하였으나 딩가네는 백인들의 무력을 시험하는 동시에 백인들의 힘으로 세코니엘라의 소들을 빼앗는 일석이조를 노리고 레티프에게 세코니엘라를 공격하라고 한 것이다.

레티프는 즉시 세코니엘라를 공격하기 위한 부대를 모집하였고 틀로크와의 영역으로 들어갔으나 부대원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세코니엘라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겠다는 말로 유인하여 크랄 밖으로 유인한 후 그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부족의 소도 모조리 빼앗았다. 하루 빨리 보어인들의 정착지를 마련하려는 생각에 상당히 비열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레티프는 세코니엘라에게서 딩가네가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소를 빼앗았고, 힘들게 빼앗은 재산(소)을 딩가네와 나누어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울러 인질이 된 세코니엘라를 딩가네에게 보내려는 의도도 없었다. 확실히 딩가네의 것만 줄루 왕국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의 소들은 모두 보어인들의 것이 되었다. 레티프의 통보를 들은 딩가네는 이제 레티프와 보어인들을 죽여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레티프 역시 다음에 딩가네를 만나러 갈 때에는 무장한 병력을 대동하고 강압적으로 땅을 요구할 참이었다.

레티프가 두 번째로 왕도에 도착할 즈음하여 줄루 왕국에 카파인 전투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마테벨레가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고, 그 땅을 모두 보어인들이 차지하였다는 소문을 들은 딩가네는 보어인들을 죽여야 할 이유가 확실해졌다. 딩가네는 보어인들을 모두 죽이려는 의도에서 보어인 이주민들을 빠짐없이 왕도 근처로 데려올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런데 그 서신을 보내기도 전, 1838년 2월 3일에 레티프와 약 70여 명의 보어 기마대가 왕도 근처에 나타난 것이다. 딩가네는 재빨리 그의 음모를 수정해야만 했다. 그는 왕도에서 레티프를 죽이는 동시에 인근 크랄에 몰래 전갈을 보내 동원령을 내렸다. 레티프를 죽이는 즉시 레티프가 데려온 이주민들도 모두 몰살시키려는 술책이었다.

딩가네는 레티프의 기마대를 보자마자 전령을 보내어 소를 찾아준 것에 대한 호의를 전하고 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그를 축제에 초대하였다. 수백 명의 전사들이 매일 나와 가상 전투를 벌이고 춤을 추는 잔치가 이어졌다. 보어인들은 이에 호응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머스킷을 공중에 발사했는데, 이는 오히려 딩가네의 의심을 더욱 크게 부추겼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 땅에 대한 언급이 없자 레티프는 딩가네에게 불만을 표했고, 이에 딩가네는 레티프에게 투겔라 강과 음짐부부(Umzimvubu) 강 사이의 땅을 보어인들에게 준다는 문서를 넘겨주었다. 레티프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케이프에서의 안락한 삶을 뒤로하고 이주하는 과정에서 겪은 고생에 대한 보상이 이제야 이루어진 듯싶었다. 그리고 당장 그 다음날 떠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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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토리아 볼트레커 기념관에 묘사된 부조. 레티프와 딩가네 사이에서 조약이 체결된 상황을 묘사했다. <출처: (cc) JMK at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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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가네의 명령에 몰살당한 레티프와 보어인 대표자 일행.



레티프는 기쁜 마음에 로버트 우드라는 백인 소년의 경고를 무시하였다. 로버트 우드는 어린 시절 줄루족의 영역에서 살면서 자라났기 때문에 줄루어를 잘 알고 있었으며, 마침 왕도에 있으면서 줄루 전사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아무래도 딩가네와 줄루 전사들이 보어인들을 공격하려 하는 것 같았고 이를 레티프에게 전하였으나 레티프는 땅까지 넘겨준 ‘좋은 왕’인 딩가네가 그럴 리 없다며 우드의 우려를 일축하였다. 딩가네는 그 다음날 레티프 일행이 말을 타고 떠나기 직전, 다시 한 번 잔치를 위하여 왕궁에 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물론 이 요청은 함정이었다.

레티프의 일행이 왕궁에 들어가기 전, 대문을 지키고 있던 두 은두나들은 왕궁에 무장한 채 들어갈 수는 없다며 무기를 내려놓으라 요구하였다. 성공에 고무된 레티프는 여기서 무기를 내려놓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왕궁에 들어간 레티프는 곧 춤을 추는 듯한 전사의 무리에 둘러싸였다. 그리고 딩가네는 춤이 무르익을 무렵 ‘저 요망한 자들을 잡아라’라고 외쳤다. 레티프와 보어인들은 총이 없는 상태에서 칼로 열심히 싸웠다. 일부 보어인들이 창에 찔려 죽었지만 줄루 전사 수십 명 역시 보어인들의 칼에 저승으로 갔다. 그러나 결국 숫자가 모자랐던 보어인들은 모두 잡혀 가죽끈에 묶였고, 바로 콰-마티와네로 끌려갔다. 그리고 1838년 2월 6일에 콰-마티와네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보어인들에게 닥친 ‘통곡의 학살’



딩가네는 보어인들이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레티프를 처형한 뒤 곧바로 그를 따라온 이주민들에 대한 공격에 나선 것이다. 레티프가 줄루 왕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주민들은 현 콰줄루-나탈 지방 콜렌소(Colenso, 이곳은 이후 영국-보어 전쟁의 격전지가 된다)에서 윌로우-그레인지(Willow Grange)까지 약 70km에 걸쳐 가족 단위로 흩어져 있었다.

1838년 2월 17일, 보어인 이주민들에 대한 줄루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가장 멀리 나와 있어 고립된 가족들부터 줄루 전사들의 습격에 각개격파를 당했다. 가장 멀리 나와 있던 리벤베르그(Liebenberg) 가족은 자고 있던 새벽 1시에 습격을 받아 몰살당했고, 이어 루소우(Roussouw), 베쥐든하우트(Bezuidenhout), 보타(Botha) 가족도 줄루 전사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어 줄루족 전사들이 판 렌스베르그(Van Rensberg) 가족을 습격할 때 조금 떨어져 있던 이주민들이 싸움과 총소리에 잠에서 깨, 마리츠와 실러스(Sarel Cilliers)가 재빨리 이주민들의 마차를 윤형진으로 배치하고 반격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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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가네가 보낸 줄루 전사들에게 급습을 당한 보어인 가족. 이날의 습격으로 보어인 이주민들과 이들을 따라온 흑인 노예 및 노동자들 약 500여 명이 몰살을 당하였다.



레티프와 그 기마대를 모두 죽인 줄루 전사들은 보어인 남자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마음 놓고 공격하던 중, 뜻밖의 강력한 반격에 당황하였다. 보어인 남자들이 윤형진과 함께 남아 있는 말들을 이용하여 기마대를 편성, 줄루 임피를 공격하자 줄루족 임피는 보어인들의 가축을 몰고 재빨리 달아났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야간에 상대가 완전히 방심한 상태에서 완벽한 기습(Total surprise)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줄루족 임피들은 그들의 목표(보어인 전멸)를 이루는 데 실패하였다. 2만 5천 마리의 소를 빼앗음으로써 보어인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타격을 입히기는 하였지만, 군사적으로는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비록 절반의 성공이었다 하더라도 이날 보어인들이 입은 피해는 여전히 심각하였다. 성인 남성 41명, 여성 56명, 그리고 185명의 청소년과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보어인 이주민들을 따라다니던 흑인 노예와 노동자 200여 명도 전투에 휩쓸려 죽었다. 거의 500명에 가까운 인원이 하룻밤 사이에 죽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전투 인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100명이 넘는 성인 남성이 죽었다는 것은 심대한 타격이었다.

이날의 싸움은 남아프리카 역사에 블라우크란즈 학살(Bloukransmoorde)로 기록되었으나 이후 보어인들에 의하여 통곡의 학살(Weenen Massacre)로 알려지게 된다. 레티프와 그의 측근들이 전멸당함으로써 보어인들은 지휘부가 모두 몰살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일단 마리츠가 살아남은 보어인들을 수습하였고, 즉시 줄루 왕국에 대한 보복을 천명하였다.

 

참고자료


· E.A. Ritter, [Shaka Zulu:The Rise of the Zulu Empire]

· Brian M. Du Toit, [The Boers in East Africa: Ethnicity and Identity]

· James O. Gump, [The Dust Rose like Smoke: The Subjugation of the Zulu and the Sioux]

· Louis Creswicke, [South Africa and the Transvaal War]

· G.W. Eybers (ed.), [Selected Constitutional Documents Illustrating South African History, 1795-1910]

· Oliver Ransford, [The Great Trek]

· 김성남, [전쟁세계사]

· www.sahistory.org.z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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