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 (6) - 핏빛 강의 전투와 줄루 왕국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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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6회 작성일 16-02-0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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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에 나선 보어인들, 이탈레니 전투에서 참패하다



‘통곡의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보어인들은 하이벨드에 있던 유이스와 포트기터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이들은 즉시 병력을 모아 나탈로 보냈다. 그러나 유이스와 포트기터가 블라우크란즈에서 만났을 때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하였다. 기본적으로 유이스와 포르기터의 세력은 몇몇 대가족이 연합한 형태였고, 이들 이주민 집단은 실질적으로 ‘부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이스와 포트기터는 사실상 독립된 부족들의 추장이었다. 각자 자기 집단의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를 잃고 싶지 않았던 유이스와 포트기터는 반목하면서 다른 사람의 지휘는 받을 수 없다고 맞섰다. 결국 블로우크란즈 회의에서 유이스와 포트기터는 부대를 통합하여 지휘하는 대신 각자의 부대를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휘부의 분열은 재앙으로 이어졌다.

347명으로 구성된 보어인 ‘복수 부대’는 1838년 4월 5일에 줄루 왕국의 수도 움군군들로부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대부분 말을 타고 있던 이들의 진격 속도는 매우 빨랐고, 4월 9일에는 움군군들로부 외곽에 있는 바바낭고(Babanango) 산 인근까지 진출하였다. 이들 부대는 작은 임피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고, 정찰 부대를 보내 몇 명을 납치하여 심문하였다. 심문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의 줄루 임피들이 근처에 있지 않고, 왕을 지키기 위하여 왕도에 모여 있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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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레니 전투 지형도. 줄루군은 협곡으로 보어인들을 끌어들였고, 포르기터의 부대가 왼쪽을, 유이스가 이끄는 부대는 오른쪽 봉우리의 줄루 임피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후세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 임피는 일종의 미끼였을 가능성이 높다. 왕도로 향하는 길은 두 개의 높은 봉우리 사이에 난 긴 계곡이었는데, 줄루인들은 보어인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협곡으로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책을 쓴 것이었다. 복수심에 마음이 다급한 보어인들은 미끼를 물었고, 포트기터의 부대가 먼저 계곡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유이스의 부대는 옆 오른쪽 봉우리의 임피들을 공격하여 견제하기로 하였다.

협곡에는 약 8000명을 헤아리는 줄루 전사들이 있었고, 봉우리 아래에도 수천의 줄루 전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포트기터의 부대는 말 위에서 머스킷을 쏘면서 줄루 전사들을 쓰러뜨렸으나 일단 줄루 전사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줄루 전사들이 반격하면서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포트기터는 지체 없이 물러나왔다. 이에 비하여 유이스의 1차 공격은 성공적이었다. 불과 220명으로 일제히 돌격하여 수천의 줄루 전사들을 흩어놓았다. 그러나 유이스는 작전의 성공에 고무된 나머지 자신의 부대를 나누어 줄루 전사들을 추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길게 자란 풀에 덮여 잘 보이지 않던 산 밑 도랑에 숨어 있던 줄루 전사들이 뛰어나오면서 유이스의 흩어진 부대를 급습하였다. 포트기터의 부대가 구원을 하고자 하였으나 자신들도 수천의 줄루 전사들에게 쫓기고 있는 데다 유이스의 부대를 돕기 위해 움직이다가는 자신들도 모두 죽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포트기터의 부대는 유이스 부대의 구원을 포기하였고, 포트기터의 부대를 공격하던 줄루 임피는 동료들과 합세하여 고립된 유이스 부대를 겹겹이 에워쌌다. 결국 유이스의 부대는 혈로(血路)를 뚫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몰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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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레니 전투에서 유이스와 그의 아들은 줄루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급습을 당했고, 고립된 상태에서 부대가 몰살당하기까지 했다. <출처: (cc) Joonas Lyytinen at en.wikipedia.org>



‘복수혈전’에 나선 보어인들은 도리어 줄루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복수를 하기는커녕 이후 이탈레니 전투(Battle of Italeni)라 명명된 이 싸움에서 200명 이상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야만인들이라고 적을 얕잡아보았다가 다시 한번 뼈아픈 패배를 당한 것이다. 경적필패(輕敵必敗: 적을 얕보면 반드시 패함)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영국인들의 ‘나탈 대군단’ 역시 줄루에게 패하다



이탈레니에서 패전하고 블라우크란즈로 돌아온 포트기터의 부대는 ‘도망자 부대(Vlugkommando, Flight Commando)’라 불리며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이에 지도자로서 홀로 남은 마리츠가 아직은 소중한 전력이라며 포르기터에게 남을 것을 요청하였으나, 원래 나탈에 애착이 없던 포트기터로서는 ‘겁쟁이 도망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면서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포트기터는 다시 하이벨드로 떠나버린다.

그러나 이탈레니가 끝이 아니었다. 포트 나탈에 있던 영국인들이 보어인들을 도와준다는 명분하에 ‘나탈 대군단(Grand Army of Natal)’이라는 부대를 모집하여 줄루 왕국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름은 거창했지만 백인 17명에 나머지는 흑인 노동자들과 하인들을 모아서 만든, 오합지졸 부대였다. 1100명 규모의 나탈 대군단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딩가네는 즉시 임피들을 소집하였고, 이탈레니에서 백인들을 격파한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전사들은 즉시 왕의 명령에 따라 영국인들과 싸우기 위하여 줄루 왕국을 가로질러 행군하였다.

1838년 4월 17일, 1100명의 ‘나탈 군단’은 포트 나탈로부터 약 120km 떨어진 은돈다쿠수카(Ndondakusuka)라는 크랄에 도착하여 이를 점령하고 불태웠다. 그러나 크랄을 불태운 지 얼마 안 되어 1만에 달하는 줄루 전사들이 전장에 도착하였다. 한 부대가 나탈 군단이 건너온 강을 확보하고 퇴로를 막는 동안 나머지 임피들은 총공격에 나섰다. 1만의 줄루 대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나탈 대군단을 일격에 쳐부쉈다. 지휘를 한답시고 나섰던 영국인들 17명 가운데 13명이 죽었고, 나탈 대군단은 순식간에 전멸하였다.

지독한 참패의 와중에서 천행으로 살아남은 몇 명이 포트 나탈로 도망쳐 줄루의 대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지만, 포트 나탈에는 줄루 대군을 막을 병력이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항구에 영국 군함 한 척이 정박하여 있어 백인 주민들은 이를 타고 탈출할 수 있었다. 무주공산이 된 포트 나탈은 줄루의 임피들에게 9일 동안 철저히 약탈을 당하였다. 허영이 심하고 광포한 데다 소심쟁이 폭군이었으나 일단 딩가네는 모략과 기습으로 자신의 땅에 들어온 백인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둔 듯하였다.




새로운 지도자 프레토리우스의 출현



보어인들은 블라우크란즈에서 겨우 전멸을 면했지만 레티프의 살해와 유이스의 전사, 그리고 포트기터의 이탈로 인하여 지휘부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들은 참사의 현장인 블라우크란즈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블라우크란즈를 떠나 두른콥(Doornkop), 가츠란드(Gatsrand), 로스콥(Loskop) 등지에 자리를 잡았다. 로스콥에 자리 잡은 마리츠는 일종의 성채를 쌓고 그곳을 쉴라에르(Sooilaer)라 불렀다. 그러나 병약한 노인이었던 마리츠에게 지도자로서의 임무는 너무나 힘에 겨운 것이었다. 결국 그는 1838년 9월 23일에 숨을 거둔다. 그렇지 않아도 지도자가 없던 보어인들의 대이주가 실패로 돌아갈 수 있는 위기였다. 그러나 타바은추에서 레티프가 등장하였듯이, 나탈에서 또 다시 다른 지도자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프레토리우스(Andries Pretorius)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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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마리츠를 잃고 구심점이 없던 보어인 이주 집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프레토리우스(Andries Pretorius).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 수도인 프리토리아(Pretoria)는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케이프 식민지와 흑인 영역의 경계 지역인 그라프 레이넷(Graaf Reinet) 출신의 프레토리우스는 원래 농부였으나 농업과 사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어 그 지역의 유지가 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영국인들의 통치에 실망한 나머지 1838년 10월에 마차 68대로 구성된 이주단을 이끌고 대이주 행렬에 동참하였다. 현재 오렌지 주에 있는 모데르 강(Modder River) 유역에 도착한 프레토리우스는 나탈에 있는 보어인들과 그들의 위급한 상황에 대하여 듣게 되었고, 먼저 60명의 기마 선발대를 편성해 쉴라에르로 향했다. 마리츠가 죽고난 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나탈의 보어인들은 명망이 있던 프레토리우스를 환영하였고, 그는 쉴라에르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나탈 지역 보어인들의 총사령관(Commandant)으로 선출되었다.

총사령관이 된 프레토리우스에게 있어 가장 먼저 할 일은 흩어진 나탈 지역의 보어인들을 통합하고 줄루 왕국에 대한 복수전을 이끄는 것이었다. 다행히 프레토리우스는 군사작전은 물론 행정과 조직 능력이 뛰어나 흩어진 보어인들을 다시 규합하는 데 성공하였고, 포트 나탈에서 탈출한 백인들도 자신의 휘하에 둘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레토리우스는 전투 가능한 성인 남성 병력을 약 500명까지 늘릴 수 있었다. 아울러 후방과 포트 나탈을 통하여 물자와 무기를 들여왔고, 많은 수의 총기와 함께 2.5인치 전장포(muzzle-loading cannon) 3문을 확보하였다. 이로서 준비를 마친 프레토리우스는 줄루 왕국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프레토리우스는 보어인들이 넓은 개활지에서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형(地形)에 익숙치 않은 상태에서 줄루군을 섣불리 공격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했다. 섣부른 공격은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었고, 이는 이탈레니의 전투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군사작전의 요체(要諦)는 적의 강점을 무력화하면서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프레토리우스가 본 보어인들의 강점은 총기의 사용과 함께 마차를 이용한 방어형 공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 전군을 몰아 줄루 왕국의 왕도인 움군군들로부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의 계획은 간단하면서도 보어인들의 강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작전이었다. 계속 진격하다가 선발대가 줄루군과 조우하면 수비에 유리한 지형에 단단한 마차 요새를 구축한 후, 기마대로 줄루군을 도발하여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마차 요새의 방어력과 총기의 화력을 바탕으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이는 보어인들이 이전에 마차 요새를 구축하여 줄루군에게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데서 착안한 것이다. 베그코프에서도 그러하였고, 블라우크란즈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마차로 요새를 만들고 저항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유이스의 전사와 마리츠의 죽음, 포트기터의 이탈은 오히려 행운이었다. 지휘부의 분열 없이 프레토리우스가 유일무이한 총수(總帥)로서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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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강의 전투에서 쓰인 보어인들의 마차 요새와 대포. 보어인들은 ‘라거(laager)’라고 불리는 마차를 이용한 단단한 요새를 구축한 뒤, 요새의 방어력과 총기의 화력으로 줄루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출처: (cc) Renier Maritz at en.wikipedia.org>



프레토리우스는 줄루 왕국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매우 단호하고도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마치 고대의 로마군이 그러하였듯이, 야영을 하게 되면 일단 마차로 윤형진을 만들고 빈틈을 사다리로 막는 등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요새화를 시킨 후에야 취침을 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면서도 정찰과 정보 수집에 철저하였다. 움군군들로부로 진격하던 보어인들은 1838년 12월 14일에 겔라토(Gelato)라 불리는 야산 인근에 도착한다. 인근의 지형을 살핀 프레토리우스는 이곳이 전술상 매우 유리한 지형임을 깨닫고 바로 마차 요새의 구축을 명했다.

프레토리우스가 선택한 전장은 강과 도랑이 직각으로 만나는 지역이었다. 우선 남쪽으로 강이 가로막고 있는데다 습지를 형성하면서 갑자기 넓어지는 곳이었다. 그 습지에는 수초(水草)가 무수히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도강이 거의 불가능했고, 습지의 끝 두 지점에서만 건너기가 가능하였다. 도강 지점 중 한 곳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보어인들의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도강할 수 있는 지점은 사실상 한 곳밖에 없었고, 만약 적이 이 지점을 건너 공격할 경우 보어인들은 도강 지점에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 옆쪽으로 도랑이 뻗어 나와 있었는데, 마침 건기라 말라 있었기는 하지만 멀리서는 눈에 보이지 않고 가까이 와서야 비로소 보였기 때문에 공격자의 관점에서는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는 격이 되었다. 게다가 그 깊이와 넓이가 5미터가 넘었고 양옆의 경사도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한 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 마디로 공격자에게는 극악, 방자(防者)에게는 최상의 지형이었다.

프레토리우스는 64개의 마차를 지형에 맞추어 요새로 만들었고, 세 문의 소포(小砲)들을 각각 진영의 서북쪽(정면), 남쪽(도랑과 강이 만나는 곳), 그리고 서쪽(요새의 끝 부분이 습지와 만나는 곳)에 배치하였다. 또한 프레토리우스는 보어군의 움직임을 줄루군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고, 기마대를 내보내 가까이 있을지도 모르는 줄루군을 찾게 하였다.




줄루 전사들의 피로 물든 핏빛 강의 전투



다음날인 12월 15일 선발대가 줄루군 본대를 찾았고, 이에 프레토리우스는 소규모 공격대를 보내 줄루군을 공격하였다. 줄루군은 공격을 당하자마자 후퇴하였는데, 이는 다시 이탈레니 방향으로 보어군을 끌어들이려는 유인책이었다. 척후대를 이끌고 있던 실러스(Sarel Cilliers)는 줄루인들을 추격하려 하였으나 프레토리우스는 우리(보어)가 그들(줄루)을 따라갈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우리에게 그들이 오게 해야 한다면서 성미 급한 실러스를 제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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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코메 강 인근의 습지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한 보어군 진영의 모습. 유인책에 실패하자 줄루군 사령관 은드렐라는 야밤을 틈타 기습 공격을 가하기로 한다.



이에 근처에서 줄루군 1만 5,000명을 지휘하고 있던 은두나(Nduna)인 은드렐라(Ndlela)는 크게 실망하였다. 보어인들을 유인하려는 계책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은드렐라는 보어인들이 강력한 요새를 구축한 것을 정찰을 통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끌어내려 한 것이었다. 유인책이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보어인들의 요새를 넓게 에워싸 그들을 굶기거나 지루함에 못 견뎌 뛰쳐나오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줄루 전사들에게 있어 적을 장기간 포위하여 굶겨 죽인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샤카 이래 근접전을 통한 적의 격멸이 줄루의 전술적인 패러다임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장기간 포위 명령을 내릴 경우, 싸움을 기대하고 모인 전사들이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작전을 망치거나 아예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빠른 승리를 바라는 딩가네의 은근한 압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은드렐라는 보어군 요새에 대한 총공격을 명한다. 다만 당장 공격하지 않고 요새가 있는 곳까지 은밀히 이동한 다음, 밤에 야습을 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은드렐라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은드렐라의 계획은 마차 요새(라거, laager)로 후퇴하고 있는 보어 척후대를 추적하여 바로 들이친다는 것이었으나, 일단 적의 요새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아무리 강인한 줄루 전사들이라 한들 지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날 밤에는 별도 없었고 안개마저 자욱하게 끼어 줄루군에게 익숙한 지역임에도 보어인들을 추격하는 임피들이 자꾸만 길을 잃고 헤맸다. 게다가 며칠 전에 내린 폭우로 인해 보어인들이 진을 치고 있던 은코메(Ncome) 강의 수위가 크게 불어나 있었고 습지도 넓어져 있었다. 아침에 동이 틀 무렵 보어인들의 라거 근처에 도착한 줄루군은 반수(半數)인 5천에 불과하였다.

이런 경우 나머지 병력이 오기를 기다려 공격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마차 요새 근처에 모인 5천 병력은 끝내 스스로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였다. 아침 무렵 강에서 피어난 안개가 자욱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요새 안 보어인들의 귀에는 갑자기 소나기가 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줄루군이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일종의 사전 의식으로서 소가죽 방패를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보어인들은 줄루군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알고 수비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줄루군은 방패 흔들기가 끝나자마자 보어군 마차 요새의 정면으로 맹렬한 돌격을 시작하였다.

줄루군이 돌격할 때 즈음 안개가 걷히면서 별안간 날씨가 맑아졌다. 이로 인해 총을 쥐고 마차 밑이나 사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어인들은 줄루의 전사들이 불과 수백 미터 밖에서 마치 온 벌판을 덮으면서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줄루군의 방패 흔들기는 스스로의 사기를 드높이는 방법일지는 몰라도 적군인 보어인들에게 돌격을 한다고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단한 방벽 뒤에서 적군이 수백 정의 머스킷과 대포를 발사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서 장애물 없이 넓게 트인 벌판을 수백 미터나 가로질러 하는 공격…….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새까맣게 벌판을 뒤덮은 줄루군을 본 보어인들의 머스킷이 지체 없이 불을 뿜었고, 소형포에서 나오는 포탄이 벌판 곳곳에 작렬하였다. 줄루 병력이 워낙 밀집이 되어 있어 빗나가는 총탄이나 포탄도 거의 없었다. 줄루군의 제 일파(一波, first wave) 공격은 거의 시작되자마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돌격이 좌절되었다. 이후 두 시간에 걸쳐 2파, 3파에 의한 공격이 이루어졌으나 충분한 탄약과 뛰어난 사격술을 지닌 보어인들의 총격에 여지없이 분쇄되었다. 보어인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사격하였다. 후일 이들이 남긴 회고담을 들어보면, 그날의 전투에서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오직 화약 냄새와 폭음, 그리고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뿐이었다고 하며, 첫 전투에서 벌어진 일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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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강의 전투(Battle of Blood River)를 묘사한 그림. 새까맣게 벌판을 뒤덮은 줄루 전사들은 뛰어난 사격술을 지닌 보어인들의 총격에 여지없이 격파당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줄루군의 공격은 모두 실패하였으나 보어인들에게도 뜻밖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보어인들의 마차 요새 안에 있던 소들이 총소리와 폭음에 놀라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혹시라도 폭주(stampede)하게 된다면 요새의 방벽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때 벌판의 반대쪽인 도랑 근처에도 줄루군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리더 중의 한 명인 실러스는 소들의 폭주를 막기 위하여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도랑 쪽으로 구축된 방벽으로 향했다. 이 병력은 방벽에 도착하자마자 도랑 건너에 모여있는 줄루군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사격을 가하였다. 반대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놀란 소들은 남쪽으로 오던 걸음을 멈추고 요새 중간으로 돌아가 잔뜩 웅크렸다. 이에 줄루 전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도랑에 당황하면서 무리해서라도 도랑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도랑에 갇히게 되었고, 도랑 바닥은 순식간에 사람으로 가득 찼다. 보어인들은 마치 연습을 하듯이 도랑에 갇힌 줄루군을 향해 사격하였고 결국 도랑은 끔찍한 학살의 현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줄루군은 여전히 많았고, 충분한 것으로 보였던 보어군의 탄약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총사령관 프레토리우스는 상당히 위험한 도박을 하였다.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수비하기보다는 기마대로 공격을 가하여 줄루 병력을 흩어놓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요새 방벽의 문이 네 곳에서 열렸고, 각 문에서 수십의 기마 병력이 나와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줄루군에게 총격을 가하였다. 북쪽 정면으로 나갔던 두 부대는 비록 많은 수의 적을 죽였지만 적 대열의 돌파에는 실패하였다. 왼쪽 끝에서 나간 부대는 100명이 넘었는데, 이들이 마침내 줄루군 대형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면서 줄루 본대가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둘로 갈라진 줄루 본대의 병력 일부는 보어 기마대의 기세에 눌려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프레토리우스는 추가로 기마대로 편성하여 친히 진두지휘하며 공격에 나섰고, 힘을 잃고 강쪽으로 혼란스럽게 도주하고 있는 줄루군을 추격하였다. 보어군 기마대에 쫓기는 줄루군은 사기를 잃고 오합지졸로 변하여 도망갈 생각에 반격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보어인 기마대가 오면 습지의 갈대 사이에 숨어 있다가 총에 맞아 죽거나 공포를 못 이겨 뛰쳐나왔다가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공포의 줄루 전사들이 천하의 겁쟁이들로 변해버린 것이다. 일부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습지를 건너려고 하였으나 불어난 물에 수백 명이 빠져 죽었다.




줄루 왕국의 몰락



습지 건너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줄루군 지휘관 은드렐라는 전황을 타개하고자 휘하의 예비대를 투입하였다. 습지 건너편에 모이기 시작한 줄루군 예비대 3천 명은 두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각각 ‘흰 방패’와 ‘검은 방패’로 불리었으며 줄루군에서 훈련이 가장 잘 되어 있고 전투력이 뛰어난 최정예부대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은드렐라는 정예부대를 투입하려면 싸움이 가장 치열하고 보어인들이 마차 요새에 웅크리고 있을 때 투입하여 중과부적의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정예군이 투입되었을 때 이들은 오랜 기다림으로 지쳐 있었고, 이미 일반 부대가 입은 타격이 심하여 전황이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두 개의 정예부대는 습지의 얕은 곳을 건너려 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목숨을 구하려고 도주하는 일반 부대의 전사들과 뒤엉켜버렸다. 이들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는커녕 습지를 건너는 데도 애를 먹었고, 심지어는 건너기도 전에 말 탄 보어인들의 표적이 되어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하얀 방패’와 ‘검은 방패’ 부대 역시 보어인들의 공격에 격파당하자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줄루 전사들의 사기는 급락하였다. 은드렐라는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으나 헛수고였다. 정예병들을 포함하여 줄루군은 사방으로 정신없이 달아났다. 그리고 그 뒤를 보어인들의 기마대가 뒤쫓으면서 마치 사냥하듯이 낙오된 전사들을 쏘아 죽였다. 살아남은 전사들이 전장에서 멀리 달아났을 때, 은코메의 전장에는 3000명이 넘는 줄루 전사들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줄루 전사들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는 도랑을 가득 채우고 은코메 강의 물은 짙은 핏빛으로 변하였다. 보어인들은 이날의 전투 이후 은코메 강의 이름을 바꾸어 불렀다. 은코메 강은 새 이름은 블로드 리비르(Bloodrivier, 영어로는 Blood River), 즉 ‘핏빛의 강’이었다.

핏빛의 강에서 줄루군을 대파한 보어군은 전장을 수습하는 동시에 일대(一隊)를 왕도 움군군들로부로 보냈다. 자신의 전사들이 블러드 리버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줄루 왕 딩가네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보어 기마대원들은 딩가네를 압박하여 땅을 내놓게 하려고 하였으나 왕도 인근에서 일부 대원이 날아가는 새를 보고 놀라 총을 쏘았고, 이에 겁쟁이 폭군 딩가네는 혼비백산하였다. 그는 왕도에 불을 지를 것을 명함과 동시에 황망히 왕도를 빠져나갔다. 줄루 왕국의 왕도에 입성한 보어 기마대는 인근 콰-미티와네로 가서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기후에 미라가 되어버린 레티프와 그 사절단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들은 내친 김에 도망친 딩가네를 추격하였으나 인근 움폴로지 강에서 딩가네의 줄루군 복병을 만나 70명을 잃고 황망히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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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아 공화국의 국기. 핏빛 강의 전투에서의 승리로 줄루 왕국으로부터 영토를 넘겨받아 1839년 나탈리아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1843년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 존속하고 영국에 점령당하였다.



비록 딩가네를 잡는 데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보어인들은 대승을 거두었다. 프레토리우스는 딩가네(그리고 샤카)의 이복동생인 음판데(Mpande)와 동맹을 맺었다. 그가 줄루의 왕이 되는 대신 보어인들이 요구하는 영토를 넘겨주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피터마리츠버그(Pietermaritzburg: 나탈 주의 주도(州都)가 되는 도시로 레티프와 마리츠의 이름을 땄다)를 중심으로 1839년에 ‘나탈리아 공화국(Natalia Republic)’ 건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는 줄루 왕국의 잔존 세력은 물론 영국 케이프 식민지 총독의 신경을 건드렸다.

프레토리우스와 동맹을 맺은 음판데는 몹시 뚱뚱해서 가마를 타지 않으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인물이었다. 줄루족 내에서의 명망도 높지 않아 한마디로 이용해먹기에 알맞았다. 음판데의 줄루 세력과 동맹을 맺은 프레토리우스는 1840년 1월, 딩가네의 잔존 세력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보어-음판데 동맹군은 마콩코(Maqongqo)에서 딩가네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딩가네의 곁에 남아 있는 병력조차 모두 흩어져 각자의 크랄로 도망했고, 딩가네는 지금의 스와질란드(Swaziland: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모잠비크 사이의 남부 아프리카의 국가)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살고 있던 니요와 족과 스와지 족에게 잡혀 굴욕적인 죽음을 당하였다.

보어인들은 드디어 그들의 독립국가를 세웠고 줄루 왕국은 보어인들의 복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이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영국 케이프 식민지의 총독 네이피어(Sir George Napier)는 나탈리아의 보어인들이 여왕의 신민(臣民)들이라며 이곳 또한 영국의 영토임을 주장하였고, 보어인들은 당연히 반발하였다. 보어인들이 계속해서 영국 여왕의 권위를 거부하자 그는 1841년 스미스(J. Charleton Smith)에게 정규군 260명을 주어 나탈리아의 보어인들에게 여왕의 권위를 주지시키려 하였다. 이에 보어인 의회(Volksraad)는 나탈리아 공화국을 당시 네덜란드의 왕이던 빌렘 2세(Willem II)의 영토로 선포하였으나 영국을 두려워한 네덜란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보어인들은 영국인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고, 1842년 5월 23일 콩겔라(Congella)에서 영국군은 나탈리아 공화국의 보어군에게 대패하고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다.

그러나 보어인들의 관점에서 이는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보어인들의 대이주를 변방의 소소한 문제로 여겨왔던 영국의 본격적인 개입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아울러 줄루 왕국에는 뚱보왕 음판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야심만만한 맏아들 세츠와요(Cetshwayo)는 아버지에 맞서 은연중에 세력을 키워나갔다. 블러드 리버의 대승은 줄루 전쟁의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전쟁의 전조에 불과했다.

 

참고자료


· E.A. Ritter, [Shaka Zulu:The Rise of the Zulu Empire]

· Brian M. Du Toit, [The Boers in East Africa: Ethnicity and Identity]

· James O. Gump, [The Dust Rose like Smoke: The Subjugation of the Zulu and the Sioux]

· Louis Creswicke, [South Africa and the Transvaal War]

· G.W. Eybers (ed.), [Selected Constitutional Documents Illustrating South African History, 1795-1910]

· Oliver Ransford, [The Great Trek]

· 김성남, [전쟁세계사]

· www.sahistory.org.z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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