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마른 전투 - 독일군을 저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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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2회 작성일 16-02-0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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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순간



역사를 살펴보면 이후의 방향을 바꾸어버린 결정적인 순간들을 종종 발견 할 수 있다. 당시에는 당장의 상황이 급박해서, 혹은 반대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찰나(刹那)에 담겨있던 진정한 의의를 알기 힘든 경우가 많다. 대개 시간이 흐르거나 사건이 끝난 후 혹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때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 뒤늦게 깨닫고는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앞날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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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묘사한 마른 전투. 한참 싸움을 벌이고 있을 당시에는 그 전투가 지닌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출처: Wikimedia>



당연히 끊임 없이 충돌이 벌어지는 전쟁에서도 그러한 순간, 즉 결정적인 의의를 지닌 전투가 있다. 전쟁은 그 기간 동안 벌어진 전투의 총합으로, 규모가 클수록 당연히 전투도 많고 성격이나 의의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아무리 각론이 다르더라도 전투에 임하는 모든 이들은 예외 없이 최선을 다하는데, 그 이유는 전투 자체가 오직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극단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투 중에는 교양이나 예절 같은 겉치레 없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본성이 극명하게 노출된다. 그런데 그 많은 전투가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다. 물론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싸웠던 이들에게 이런 세세한 구분은 용납되지 않겠지만, 전쟁이라는 거대한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끼칠 만한 순간은 분명히 별도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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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전투 당시 돌격하는 프랑스군. 1914년에 벌어진 마른 전투는 1차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은 극적인 전투였다. <출처: wikipedia>



1914년 9월, 파리 외곽에서 벌어진 ‘마른 전투(Battle of the Marne)’는 이에 가장 합당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연합국이 독일군을 극적으로 격퇴한 전투였지만 그 이후의 충격파는 실로 대단하였다. 앞으로 4년 동안 현실에 등장한 지옥으로 평가 받는 1차대전의 서부전선이 바로 마른 전투를 기점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역설적인 가정이지만, 만일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하였다면 이후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커다란 그러나 정적이었던 전쟁



당연히 1차대전이라는 명칭은 2차대전 이후에 붙여졌다. 그런데 세계대전이라고 하기에 1차대전은 교전 당사자나 전역(戰域)의 규모가 작은 편이다. 아시아에서 연합국에 가담한 일본이 당시 독일의 조차지(租借地)였던 칭다오(靑島)를 공격하였고, 중동이나 아프리카 일대에서 식민지군 사이에 일부 전투가 있었으나 대부분의 싸움은 유럽에서 벌어졌다. 그 때문에 1940년 이전 우리나라 신문에서는 이를 구주대전(歐洲大戰)이라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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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에 상륙하는 일본군. 이처럼 일부 전투가 다른 곳에서도 벌어졌지만 1차대전의 주 전장은 유럽이었다. <출처: Wikimedia>



지금까지 벌어진 전쟁들을 생각한다면 4년은 그다지 긴 시간이라 할 수 없지만, 그러한 시간 동안 1,500만 명이 죽어간 사례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변이었다. 게다가 당시 주요 교전 당사자들은 세계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들이어서 이론상으로 전 세계가 전쟁에 뛰어든 모양새였다. 이처럼 피해가 컸고 세계사를 선도한다는 우월의식이 결합되어 전쟁의 주역이었던 서양에서는 이를 대 전쟁(Great war)이라 표현하고 있다.

표현이 어찌되었건 1차대전은 인류사에서 처음 겪어 본 참화였다. 비록 20여 년 만에 더 큰 전쟁을 다시 시작할 만큼 인간의 망각 능력이나 전쟁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지만 적어도 종전 직후에 반전, 염전(厭戰) 사상이 전 세계를 휩쓸었을 만큼 그 후유증이 대단하였다. 또한 전쟁 발발 이전과 이후의 과정도 세계 정치, 외교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서 외무고시 같은 국가 시험에 꾸준히 기출 문제로 나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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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군축조약에 따라 건조가 중단된 전함의 포신. 이처럼 1차대전의 무서운 결과는 다음 전쟁을 막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불러왔다. <출처: wikipedia>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은 우리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진 전쟁이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전쟁 자체가 그다지 관심을 끌만한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정작 피해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인하고 컸지만, 비슷한 상대가 너무 팽팽하게 대치하다 보니 정작 거시적인 전쟁의 흐름은 정적(靜的)이라 표현하여도 무리가 없을 만큼 상당히 단순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마른 전투 이후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순식간에 발발한 대(大)전쟁



전후좌우를 제외하고 1차대전과 2차대전을 단지 전쟁이라는 흐름에서만 비교하자면 가장 큰 차이는 발발 과정이었다. 2차대전은 전쟁이 순차적으로 벌어졌고 그때마다 교전 상대가 달랐다. 예를 들어 독일을 기준으로 본다면 1939년 폴란드, 1940 프랑스, 1941년 소련과 전쟁을 벌였다.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에는 소련은 군사적 행동을 함께한 동맹국이었지만 1941년 이후에는 가장 큰 전쟁을 벌인 적대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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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하며 전쟁을 선언하자 빌헬름 2세와 동맹국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초상화를 들고 환호하는 베를린 시민들
<출처: http://germanhistorydocs.ghi-dc.org>



반면 1차대전은 마치 육상 경기처럼 모두가 출발선에 도열하고 있다가 총소리와 함께 달려 나간 모양새였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8월 2일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8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에 선전포고

8월 10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

8월 12일 영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

8월 23일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

그 해 11월에 참전한 오스만투르크나 전쟁 말기에 참전한 미국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주요 교전국들은 이처럼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미친 듯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러한 현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전쟁 발발 이전에 서로 편을 나누어 팽팽히 대립하였고 같은 편이 전쟁을 벌이면 군사적으로 개입하도록 조약을 맺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전쟁 개시의 명분이 생기자 유럽 전체가 전쟁터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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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저격한 프린시프의 체포 장면. 이 사건은 1차대전의 시작을 불러왔다. <출처: wikipedia>



사실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을 당시만 해도 국지전으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 한 달 전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황태자 부처의 피살 사건에 대한 세르비아의 책임을 묻기 위한 보복적 성격이 강했고 나름대로 명분도 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를 발판으로 호시탐탐 발칸반도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견제하기 위한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후견인 자격으로 적극 개입하면서 전쟁의 판은 커졌다.




원한의 대상



특히 뒤늦게 통일을 달성하고 국력을 비약적으로 신장시키기 시작한 독일의 패권 의지는 대단하였다. 통일 재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의 ‘프랑스 고립을 통한 평화 유지’정책을 호전적이고 변덕이 심한 빌헬름 2세(Wilhelm II)가 파기하면서 주변국과 급격한 마찰이 벌어졌다. 야심만만한 젊은 황제는 통일 후 거대하게 성장한 국력에 맞먹게 대외 팽창을 적극 시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해외 식민지를 선점한 프랑스, 영국과 마찰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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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만만한 빌헬름 2세의 대외 팽창정책은 주변과 마찰을 불러왔다. <출처: wikipedia>



그 중에서도 프랑스는 독일과 철천지원수지간이었다. 일찌감치 유럽 대륙의 강자가 되었던 프랑스는 인접 한 독일(신성로마제국)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에 통일의 기운이 돌면 여차 없이 개입하여 이를 방해하였다. 17세기에 30년 전쟁이나 19세기에 있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결국 독일은 1871년 보불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프랑스의 간섭을 물리치고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반면 이 전쟁은 프랑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독일과 일대일로 대결을 벌여서 당한 최초의 패배였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가 포로가 되고 파리가 함락당하는 굴욕을 겪은 것으로도 모자라 알사스와 로렌(Alsace-Lorraine)을 돌려주고 전쟁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분열된 독일은 프랑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어느덧 커다란 호랑이가 옆에 있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굴욕을 겪은 프랑스는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그 동안 프랑스에게는 100년 전쟁이래 영국이 가장 큰 적이었지만 어느덧 주적이 바뀌었다. 독일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보불전쟁 이후에도 사사건건 독일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고 대외 팽창을 막는 프랑스를 다시 한 번 철저히 응징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이러한 프랑스와 독일의 심각한 대립은 장차전을 예고하였고 결국 1차대전에서 가장 커다란 싸움의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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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전쟁 당시 세당 전투에서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와 비스마르크. 이 전쟁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가장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출처: wikipedia>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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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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