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마른 전투 2 - 마른강으로 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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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0회 작성일 16-02-0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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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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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전을 대비하여 독일의 장차 전쟁 계획을 수립하여 놓은 슐리펜 <출처: wikipedia>



독일은 적극적인 대외 팽창으로 말미암아 갈수록 고립되었고 1905년이 되었을 때 외교적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 이르렀다. 따라서 만일 전쟁이 벌어진다면 양면전도 고려해야 할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당시 독일군 참모총장이던 슐리펜(Alfred Graf von Schlieffen)은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양면 전쟁에 대비한 전략을 수립하였다. 이른바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이었다.

그는 동원 체계를 고려한다면 러시아가 전쟁에 뛰어드는데 약 6~8주 정도가 소요된다고 판단하였다. 바로 이때 서부에 전력을 집중하여 프랑스를 제압한 다음에 러시아를 상대하면 둘 다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를 위해 슐리펜은 독일군 전체 전력의 80퍼센트를 서부전선에 할당하였고 그 중 가장 강력한 순서대로 우익부터 배치하였다. 이들은 전쟁 발발 시 플랑드르(Flandre)를 통과하여 파리로 쇄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에 대한 신뢰가 너무 크다는 점이 사실 문제였다. 슐리펜은 양면전이라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여 계획을 수립하였을 뿐이지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양면전이 옳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후임자들은 계획이 너무 완벽하다고 믿어 양면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부의 경우는 당연하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독일은 거의 동시에 러시아와 프랑스에 먼저 선전포고하는 무모한 행동도 삼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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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슐리펜 계획(적색)과 프랑스의 제17호 계획(청색). 독일의 침공 계획에 비해 프랑스의 계획은 소극적이고 제한적이었다. <출처: wikipedia>



반면 프랑스는 참모총장 조프르(Joseph Joffre)의 주도로 ‘제17호 계획(Plan XVII)’을 세워 놓았다. 주력을 독불 국경에 집중 배치하여 놓고 있다가 독일의 공격을 철저히 차단시킴과 동시에 즉시 반격을 개시하여 알사스와 로렌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슐리펜 계획에 비해 너무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독일의 작전과 달리 독일을 굴복시켜 항복을 받아 내거나 점령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극히 제한적인 전략이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시작 된 소용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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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침공군 중 최강의 부대인 제1군을 지휘한 클루크. 하지만 그는 연속된 오판으로 말미암아 마른 전투 후 해임되었다. <출처: wikimedia>



1914년 8월 4일, 독일이 당시 영세중립국이던 벨기에를 전격 침공하면서 전쟁의 막이 올랐다. 이틀 전 영토 통과를 요구하였지만 벨기에가 이를 단호히 거부하자 독일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들이 받든 슐리펜 계획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벨기에는 단지 독일이 프랑스로 쳐들어가기 위한 침공로에 위치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되었다.

당시 독일이 동원한 8개 야전군 중, 무려 7개 부대가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고 그 중 개전 당시에 대부분이 현역으로만 구성된 가장 강력한 3개 야전군이 벨기에를 통과하여 파리를 포위할 예정이었다. 클루크(Alexander von Kluck)가 지휘하는 32만의 제1군이 가장 우측에 섰고 뵐로브(Karl von Bulow)의 제2군, 하우젠(Max von Haussen)의 제3군이 순서대로 배치되었는데 각각 26만, 18만의 규모였다.

독일의 예상치 못한 벨기에 침공은 비록 프랑스, 러시아와 협상을 맺어놓았지만 참전 의무까지는 없었던 영국을 자극하여 조기에 전쟁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다. 약소국 벨기에는 8월 7일 요충지인 리에주(Liege)를 함락당하는 등, 초전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밀려나기는 했지만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계획이 차질을 빗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강한 벨기에의 끈질 긴 저항에 독일은 당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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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주 전투에서 결사 항전하는 벨기에군. 약소국 벨기에의 끈질긴 저항은 독일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출처: wikipedia>



하지만 이때까지도 프랑스는 벨기에에 몰려든 독일군이 주력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오판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독일군 조공이 워낙 선방하였기 때문이었다. 8월 6일 독불 국경에 배치 된 프랑스군 주력이 제17호 계획에 의거 진격하였지만 처음부터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퇴각하였고 이후 우여곡절 보주(Vosges) 산맥 일대를 점령하는 것으로 공세를 마쳤다. 그렇다 보니 프랑스는 그곳에 독일군 주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이었다.




프랑스로 쇄도한 독일군



사실 독불 국경을 전담하던 독일 제6, 7군은 제자리를 고수하는 것이 역할이었고 만일 프랑스의 공세가 거셀 경우 독일 영내로의 후퇴도 용인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들이 프랑스군 주력을 최대한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잡아 놓을수록 파리 점령은 쉬워질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러한 독일군 2선급 부대에 막혀 자르부르크(Sarrebourg), 모랑주(Morhange) 등에서 연이어 손실을 입고 혼비백산하였을 정도로 무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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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 파리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출정하는 프랑스 기병대. 하지만 프랑스는 초기에 독일을 공격하다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출처: wikipedia>



프랑스는 지난 보불전쟁에서 참담한 패배를 겪고 와신상담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오히려 독일군의 동원 능력을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예단하여 버리는 우를 범하여 벨기에에 그 정도로 많은 독일군이 집결하였을 것이라는 가능성조차 일찌감치 배제하여 놓고 있었다. 8월 18일이 되었을 때 벨기에군은 앤트워프로 철수했고 8월 23일에는 알베르(Albert) 벨기에 국왕이 총사령관으로써 직접 방어에 나섰던 나무르(Namur)도 함락되었다.

시급히 달려온 영국 원정군(BEF-British Expeditionary Force)이 길목인 몽스(Mons)에 전개하였지만 독일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였다. 프랑스가 남쪽에 정신이 팔려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북쪽에서 벨기에를 돌파한 독일군과 이에 밀려 후퇴하는 영국군의 모습이 눈에 보이자 프랑스는 기겁하였다. 벨기에가 항복하거나 독일이 벨기에를 완벽히 점령한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8월 22일이 되자 독일군 주력이 프랑스로 진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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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8월 22일 벨기에 몽스에 전개한 후 휴식 중인 영국 원정군 <출처: wikipedia>



예상보다 독일이 엄청난 예비군을 동원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북쪽의 독일군이 주공임이 가시화되자 제17호 계획은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프랑스군 주력은 남쪽의 알사스-로렌 일대에 몰려 있던 상황이었다.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프랑스 제4, 5군 만으로 노도와 같은 독일군 주공을 막아내기는 어려웠고 순식간 파리는 위험에 노출되었다. 조프르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예비대를 긁어 모아 제6군을 편성하였다.




결전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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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케의 우유부단함으로 말미암아 독일은 연속적으로 자충수를 두었다. 그는 결국 보불전쟁을 이끈 백부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고 마른 전투 이후 좌천되었다. <출처: wikipedia>



위기의 순간에 조프르의 이러한 시도는 뒤에 대단한 빛을 발하였다. 그는 8월 말, 전군을 후퇴시키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회심의 한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이때 사용할 수 있게끔 예비대를 아껴두었다. 그는 퇴각하는 동안에도 독일군에게 지속적으로 포화를 퍼부어 출혈을 강요하고 있었고, 정부 또한 수도를 보르도(Bordeaux)로 옮겨 필사의 저항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반면 독일은 갈수록 상황이 어려워 졌다.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을 총괄 지휘하는 참모총장 몰트케(Helmuth J. L. von Moltke)의 우유부단함 때문이었다. 그는 슐리펜이 세워 놓은 계획에 의거하여 전쟁을 시작하였지만 정작 그대로 따르지 않고 툭하면 여기저기 손을 봐서 상태를 악화시켰다. 우선 우익을 강화하라는 슐리펜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동부전선에 러시아군이 등장하자 이곳에서 2개 군단을 차출해서 파견하는 자충수를 두어 버렸다.

덕분에 8월의 무더위에 가뜩이나 먼 거리를 돌아서 공격하는 주공은 전력이 고갈되면서 탄력을 잃었다. 더불어 제1, 2, 3군 지휘관 사이의 비 협조로 말미암아 툭하면 부대 간에 간극이 발생하였다. 문제는 몰트케는 이런 일선의 상황을 거의 방임하다시피 하였다는 점이었다. 가장 최악의 사태가 8월 30일 제1군의 좌측이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자 클루크가 승인도 받지 않고 진격방향을 남쪽으로 꺾어버린 사건이었다.

당시 독일군 주공, 특히 제1군은 하루 평균 30킬로미터의 강행군을 계속하였으나 이런 속도를 한 달 이상 계속 지속한다는 것은 보병들에게 무리였다. 거기에다가 갈수록 보급이 제 때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병력을 빼가기까지 하였다. 그렇다 보니 상황을 임의적으로 판단하여 진격로를 바꾸는 상황까지 내몰린 것이었다. 이렇게 정신 없이 연합군을 추격한 독일군은 운명의 장소인 마른 강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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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무더위에 하루 평균 40킬로미터를 한 달 간 계속 전진한 독일군은 몹시 지쳐있었다.
<출처: http://www.theapricity.com>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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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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