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마른 전투 3 - 독일군의 배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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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2회 작성일 16-02-0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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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기회



파리로 향하던 클루크가 방향을 틀면서까지 노렸던 목표는 후퇴하던 영국군이었다. 먼저 영국군을 격파하면 그 우측에 있는 프랑스 제5군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들의 제거 없이 파리로의 진격이 힘들 것이라 생각하여 임의적으로 방향을 꺾었고 이에 대해 몰트케는 경악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사후 승인해 버렸다. 1차대전처럼 커다란 전쟁을 치르기에 몰트케의 능력은 이처럼 너무 부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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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을 쫓기 위해 클루크의 독일 제1군이 임의적으로 방향을 들었는데 바로 우측면에 프랑스 제6군이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둘 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몰랐다.
<출처: wikipedia>



그런데 방향을 꺾은 곳 바로 앞에 공교롭게도 조프르가 시급히 편성하여 놓았던 프랑스 제6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 제1군의 길게 신장되어 버린 우측면이 고스란히 프랑스군에게 노출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프랑스도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고 독일도 시급히 창설 된 프랑스 제6군의 존재를 몰랐다. 놀랍게도 전쟁의 향방을 가를 거대한 세력이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도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독일 제1군에 쫓기고 있던 영국군도 프랑스군과 공조가 이루어 진 상태가 아니어서 이런 상황을 몰랐다. 놀랍지만 전쟁 말기인 1918년에 가서 겨우 연합사령부 결성에 합의하였을 만큼 영국과 프랑스는 별개로 전쟁을 치렀다. 섬나라다 보니 영국 육군은 규모가 크지 않았음에도 전원이 장기 복무자로 구성되어 자질이 우수하였고 특히 사격술은 최고 수준이었다. 따라서 영국 원정군은 처음부터 보병과의 대결에서 독일에게 밀리지 않는 용맹함을 발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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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강 일대에서 기회를 엿 보던 조프르는 마침내 반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출처: wikipedia>



하지만 대 구경 대포를 앞세운 압도적인 화력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무턱대고 도망친 것은 아니었지만 참전한 이래로 계속 밀려다녔다. 독일 제1군이 방향을 바꾸어 추격을 계속하자 영국군은 지연전을 펼치면서 9월 3일 마른 강을 건너 후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실시 된 공중 정찰에 독일 제1군의 측면이 취약하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9월 7일 기회를 엿보던 조프르는 공세를 명령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의 운명을 바꾸었다.




스스로 무너진 독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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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을 전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징발되었던 파리의 택시 <출처: wikipedia>



독일군의 배후를 차단하기 위해 프랑스 제6군이 이틀에 걸쳐 맹공을 퍼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격에 클루크는 당황하였으나 우르크(Ourcq)로 돌파를 시도하는 프랑스군을 가까스로 막아내며 위기를 넘겼다. 모누리(Michel-Joseph Maunoury)가 지휘하는 프랑스 제6군은 사실 급조된 부대였기 때문에 병력이 부족하여 공세를 지속하기 힘들었다. 바로 이때 파리의 택시들이 징발되어 병력 수송에 이용되었다.

비록 프랑스군의 공세로 독일군이 멈칫 한 것은 맞지만 패하거나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독일 제1군과 제2군의 간격이 벌어졌다. 독일 제2군도 후퇴만 하다가 갑자기 공세로 전환한 프랑스 제5군을 물리치느라 부대 간 연결을 신경 쓰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사실 일련의 전투에서 피해를 더 많이 당한 것은 연합군이었다. 하지만 9월 9일 전투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너무 지쳐있던 독일이 먼저 전의를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영국군이 마른 강을 건너 독일 제1, 2군 사이의 벌어진 간격을 파고 들어오자 소심하였던 독일 제2군 사령관 뵐로브는 퇴각을 명령하였고 때마침 몰트케의 대리인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파견 나온 헨취(Richard Hentsch) 대령도 철수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당시 영국군은 공세에 나선 것이 아니라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위력 수색에 돌입한 것이었고 또한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독일군의 간격도 그리 우려할 만큼 크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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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은 엔 강 일대에서 머무른 후 급속도로 고착화되었다. 이것은 이후 종전 시까지 계속 이어질 참호전의 시작이었다. <출처: wikipedia>



독일 제2군이 후퇴하자 가장 앞에 있던 독일 제1군도 제자리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클루크는 우르크에서 맹공 중이던 선두 부대의 전투를 중지시키고 후퇴를 명령했다. 비록 연이은 교전과 장거리 행군으로 개전 초기의 막강함을 잃어버린 상태이기는 했지만 독일 침공군 중 가장 강력하였던 제1, 2군이 후퇴에 돌입하자 좌측에 있던 제3, 4, 5군의 퇴각도 불가피했다. 결국 독일군 주력은 9월 11일 엔(Aisne) 강까지 완전히 철수하였다.




결과



엔 강 북쪽의 슈멩 데 담(Chemin des Dames)까지 물러난 독일군은 위치를 선점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그런데 곧바로 추격하여 올 줄 알았던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지쳐 있어 곧바로 다음 작전을 벌이기 힘들었던 것이었다. 사실 연합군은 마른에서 방어를 위한 수세적인 공세를 벌였을 뿐이지, 독일이 후퇴할 경우 어떻게 다음 작전을 펼칠 지까지는 고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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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는 전세를 반전시켰지만 더 이상의 추격을 실시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으로 그것이 최선이었다. <출처: wikimedia>



독일군의 사기를 고려하여 11월 3일까지 명목상으로 참모총장직을 유지하였지만, 몰트케가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에게 지휘권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난 9월 12일에 전투는 종결이 되었다. 전략적으로 독일이 후퇴하면서 패하였지만 전술적으로 연합군이 입은 피해가 더 컸다. 양측 합쳐 150여 만의 대군이 충돌한 이 전투에서 독일은 약 22만의 전사상자를 기록하였지만 연합군은 그 보다 조금 많은 26만의 피해를 당하였다.

이로써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던 파리는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마른 강의 기적(Miracle of the Marne)’이라고도 부르는 이 혈전이 바로 마른 전투다. 1918년 같은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와 구분하여 제1차 마른 전투라고도 하는데, 워낙 역사적 비중이 커서 마른 전투라고 하면 이 전투를 의미한다. 마른 전투의 여파는 단지 파리를 구했다는 프랑스의 생각보다 훨씬 컸다. 바로 전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일찌감치 쓸모 없어진 프랑스의 제17호 계획과 더불어 불과 한 달 만에 독일의 야심만만한 슐리펜 계획도 완전히 용도 폐기되면서 전쟁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9월 13일 영국군이 엔 강을 도하하였지만 높은 능선에 위치한 독일군 공략에 실패하였다. 그러자 양측은 그 자리에서 진지를 깊게 파고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하며 방어전에 돌입하였고 진지는 하나 둘 연결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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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전투 기념 메달. 1차대전에서 가장 역사적 의의가 있는 전투를 하나만 고르라면 단연코 마른 전투다. 이후 벌어진 여타 전투에 비해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그 여파는 실로 대단하였다. <출처: wikimedia>






의의



전투가 본격 개시된 9월 초에 겉으로 드러난 양측 전력은 거의 대등했으므로 마른 전투의 결과를 결정지은 것은 순전히 양측 지휘관의 의지였다. 전혀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고 계속 공세로 나가도 되었지만 몰트케(엄밀히 말해 헨취)와 뵐로브는 지레 겁먹고 전의를 상실하였다. 반면 후퇴 와중에도 조프르는 기회를 노려 반격을 성공시켜 파리를 구했지만 그 다음에 추격을 계속하여 독일군을 섬멸할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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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 달려가겠다고 호기를 부리며 전선으로 향하던 개전 초기의 독일군.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마른 전투에서 패하며 전쟁은 그때부터 본격 시작되었다. <출처: wikimedia>



이후 독일군은 프랑스 영내에 주저앉게 되었는데, 이때만 해도 양측 모두는 일시적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땅은 거대한 참호로 바뀌었고 앞으로 4년간 하루 평균 5천 여 명의 생명이 끓임 없이 숨져가는 지옥으로 변해갔다. 호기를 한 번씩 상실한 양측은 이후부터 1차대전의 서부전선을 상징하는 참호전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쟁 발발 한달 만에 있었던 마른 전투를 기점으로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양측 모두는 마른 전투의 피해 규모에 놀랐다. 하지만 이 전투로 고착되어 버린 전선을 뛰어 넘으려 이후 벌어진 수많은 전투에서 발생한 피해에 비하면 마른 전투의 사상자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다만 그때는 이런 결과를 상상조차 못하였다. 만일 독일이 마른 강을 돌파하여 파리를 점령하고 전쟁이 조기에 끝났다면 프랑스는 굴욕을 당하였겠지만 이후 양측 합쳐 무려 500여 만 명이 숨져가고 1,000만 명이 부상당한 참상은 없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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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의 참호전은 1차대전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출처: wikipedia>



하지만 이는 단지 가정이다. 26년 후 2차대전에서 독일이 프랑스를 6주 만에 굴복시켰을 때 양측이 입은 전사상자는 약 50만 정도였지만 기고만장한 독일은 전쟁을 확대하였고 그 과정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이 유럽에서만 3,500여 만이었다. 이미 시작부터 양면전쟁이었던 1차대전에서도 그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어쩌면 지옥이 등장할 운명이었다면 단지 그것이 서부전선에서 나타난 것이었을 뿐이었고 그랬다면 그 순간의 시작이 바로 마른 전투였을지 모른다. 끝.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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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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