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스몰렌스크 전투 - 모스크바로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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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9회 작성일 16-02-0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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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 뒤에 다가온 또 다른 격전



1941년 7월 3일, 독일 중부집단군(Heeresgruppe Mitte)의 거대 포위망에 갇힌 소련군이 항복하면서 민스크 전투는 막을 내렸다. 전쟁 발발 열흘 만에 무려 40여 만의 소련군이 붕괴되었고, 이런 놀라운 결과에 히틀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다음날 그는 “러시아(소련)는 전쟁에서 졌다”고 득의양양 하게 단언하였는데, 군부도 총통의 섣부른 전망에 대체로 동의하며 아무리 늦어도 겨울 전에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낙관적으로 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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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스크 전투에서 항복한 소련군 포로. 엄청난 전과에 고무 된 히틀러는 전쟁 발발 열흘 만에 러시아(소련)의 패배를 단언하였을 정도였다.
<출처: wikimedia>



하지만 전쟁 개시 열흘 만에 놀랄만한 대승을 거두고 400여 킬로미터를 진격하였어도 아직도 갈 길은 멀었다. 바바로사(Barbarossa) 작전의 최종 목표인 A-A선은 고사하고 1차적으로 진출하여야 할 모스크바까지 겨우 1/3만 왔을 뿐이었다. 물리적으로 지금까지 온 것보다 더 많은 거리를 남겨 놓은 상태였고 더 많은 싸움이 예정되어 있었다. 초전의 대승에 감격할 여유도 없이 독일은 계속 진격을 하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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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스크에서의 대패에 자존심이 상한 스탈린은 즉시 반격을 명령하였다. 소련의 이러한 즉시 대응과 계속 이어진 독일의 다음 공세로 말미암아 스몰렌스크 전투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출처: http://www.militaryphotos.net>



반면 소련 서부전선군(Western Front)의 처참한 붕괴에 스탈린은 경악하였다. 독일의 기습으로 일단 밀린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그 정도로 참혹하게 대패를 당할지는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서부전선군 사령관 파블로프(Dmitry Pavlov)와 지휘부를 즉시 처형하여 버렸을 정도로 분노하였다. 자존심이 상한 스탈린은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즉각적인 반격을 STAVKA(소련군 최고 사령부)에 지시하였다.

이처럼 독일의 중단 없는 진격과 소련의 즉시 대응으로 다시 한 번 동부전선의 중앙부는 거대하게 불타올랐다. 그런데 세부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뿐이지 결과는 민스크 전투의 완벽한 재판이었다. 사실 이 전투에서 소련은 참패를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지만 스탈린의 고집으로 말미암아 불과 한 달 만에 굴욕적인 재방송을 스스로 연출하였다. 바로 1941년 초여름에 러시아 초입에서 벌어진 스몰렌스크 전투(Battle of Smolensk)다.




승리 뒤에 찾아 온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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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데리안의 주장에 강력히 반발한 제4군 사령관 클루게. 영리한 한스라고 불리던 그는 작전에 관한 소신이 상당히 강한 인물이었는데, 나중에는 부하들 앞에서 결투까지 벌였을 만큼 특히 구데리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출처: wikipedia>



독일 중부집단군의 선봉대인 제2, 3기갑집단이 민스크(Minsk) 동쪽에서 합류하면서 소련군의 배후를 차단한 것은 전쟁 개시 6일 만인 1941년 6월 27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두 기갑집단 사령관인 구데리안(Heinz Guderian)과 호트(Hermann Hoth)가 포위망 안에 갇힌 소련군의 소탕은 후속한 보병들이 담당해도 충분하니 자신들은 계속 전진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중부집단군 지휘부내에서 엄청난 논쟁이 벌어졌다.

그들은 포위망 소탕이 완료된 상황이 아니지만 어차피 끝난 전투이므로 기세를 살려 계속 앞으로 내달리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반면 뒤에서 후속하여 진군하던 보병부대 지휘관들은 이에 반대하였는데, 특히 제4군 사령관 클루게(Gunther von Kluge)의 반발은 격심하였다. 당시 중부집단군에는 선봉을 담당한 두 기갑집단 외에도 보병을 위주로 편성 된 제4군과 제9군이 속해 있었는데, 이들은 날이 갈수록 기갑부대와 간격이 벌어져서 곤란을 겪던 중이었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 곧바로 전진을 재개하면 연결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으니 일단 민스크 전투부터 완벽히 마무리 지은 후 진격하는 것이 옳다고 보병부대 지휘관들은 주장하였다. 또한 새로운 공세를 위해 부대 재편과 재보급도 선결되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하였다. 사실 양측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기회를 잡았을 때 공격을 하여야 한다는 것도, 부대 간 간격을 유지하며 작전을 벌여야 하는 것도 모두 옳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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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루시 평원을 가로 질러 러시아로 향하는 독일 중부집단군의 모습. 다음 공세를 위해 부대를 재편할 시간을 갖자는 보병부대 지휘관들의 의견도 충분히 타당하였다.
<출처: http://www.allworldwars.com>



이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 논쟁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그렇다 보니 신중하였던 중부집단군 사령관 보크(Fedor von Bock)도 섣불리 어느 쪽 편을 들어 지시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논란의 속사정에는 지휘관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도 크게 한 몫 하였다. 그러했던 이유는 기갑부대를 집단화시킨 것에서부터 찾아야 했다.




기갑부대를 바라보는 시선



전차의 효용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지휘관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거대한 규모의 편제인 기갑집단(Panzergruppe)에서 보듯이 당시 독일은 전차를 한 곳에 몰아 운용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런 시도가 처음에는 군부 내에서 상당한 논란을 야기하였지만 1940년 프랑스 침공전 후 독일군 작전의 대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갈수록 보병부대를 지원할 전차나 차량이 부족하였고 이것은 당연히 다른 쪽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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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로 이동하는 독일군. 흔히 독일군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기갑부대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로 전차와 차량의 수량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의 독일군은 이처럼 걸어 다니며 전투를 벌였다.
<출처: wikimedia>



흔히 기갑부대를 독일군의 상징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독소전쟁 당시에 독일이 동원한 전차는 소련의 30퍼센트 수준에 불과하였고 거의 대부분의 독일군은 두 다리로 진격하였다. 게다가 기갑부대는 보병부대보다 더 많은 보급이 필요하므로 한정 된 보급로를 우선 사용하거나 후방의 보병부대를 통해 군수를 충당하고는 했다. 그러니 또 다시 기갑부대가 먼저 출발하겠다고 주장하자 기겁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갑론을박과 별개로 전투는 계속되었고 민스크와 비알리스토크를 중심으로 벨로루시에 형성된 거대 포위망 안에서 42만의 소련군이 붕괴되는 역사적인 대승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런데 싸움이 완전히 종결되기도 이전인 7월 1일, 호시탐탐 앞으로 나갈 궁리만 하던 구데리안과 호트는 전차들을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목인 베레지나(Berezina) 강 동쪽으로 전개시켰다. 진격은 아니었지만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나 중부집단군 사령부에게도 통보하지 않은 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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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집단군 내에서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구데리안은 민스크 전투가 종결되기 이전에 부대를 동쪽으로 이동시켜 다음 공세를 준비하였다.
<출처: wikimedia.org>



공세 시 가장 중요한 것이 속도라고 철저하게 믿던 그들은 최대한 빨리 그리고 더 멀리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확신하며 미리 공세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클루게는 아직 민스크 전투도 완전히 종결이 되지 않았고 후속한 제4, 9군이 150킬로미터나 후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두 기갑부대가 움직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반대하였다. 특히 부대를 명령도 없이 임의로 이동 시킨 행위는 군법 회부 감이라며 위협하고 나섰을 정도였다.




운명의 장소



이처럼 민스크 전투 말기에 불거진 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데리안과 호트는 전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총통 때문이었다. 전쟁 전 모스크바로 주공을 향하자는 군부의 의견에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를 우선 목표로 생각하였던 히틀러는 초기에 벨로루시를 완전히 석권하자 모스크바의 점령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는 6월 29일 OKH를 방문하여 명령까지는 아니었지만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조속히 여는 것이 좋겠다고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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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스크 전투 종결 직후 동부전선을 방문하여 병사들을 격려하는 히틀러. 직접 지시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히틀러로 인해 공세는 곧바로 재개되었다.
<출처: http://www.allworldwars.com>



전선에서의 논쟁과 관련 없이 벌어진 별개의 지시였지만 결국 히틀러가 문제를 정리해준 셈이 되었다. 이에 따라 중부집단군은 벨로루시에서의 작전을 완전히 마무리 짓기도 전에 소련의 몸통인 러시아 영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선봉은 제2, 3기갑집단이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구데리안과 호트는 준비를 완료하고 공격 개시만 기다렸고 있던 상태였다. 이들이 향할 목표는 스몰렌스크(Smolensk)였다.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드네프르(Dnieper)강 상류에 위치한 스몰렌스크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 중 하나로 유럽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천혜의 길목이었다. 동서남북으로 향하는 각종 철도, 도로는 물론 수운이 집중된 교통의 요충지여서 유럽을 향한 러시아의 출발점이었다. 반대로 유럽에서 러시아를 공격할 때는 거대한 드네프르강을 방어막 삼아 가장 외곽에서 적을 격퇴하는 요새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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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당시의 스몰렌스크. 유럽에서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가도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스몰렌스크는 거대한 전투의 배경이 될 운명이었다.
<출처: wikipedia>



아무리 독소전쟁 당시에 독일이 동원한 원정군이 대규모이고 이를 막기 위해 나선 소련군도 어마어마했지만 지도에 그려진 전선을 촘촘히 메우며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결국 사람과 자원이 집중된 요충지를 확보하거나 방어하는 형태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독일의 일방적 공세 시기였던 전쟁 초기에는 전선의 변동이 커서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중부집단군의 다음 목표가 이곳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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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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