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스몰렌스크 전투 2 - 참담하게 끝난 소련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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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28회 작성일 16-02-0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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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계획



중부집단군 사령관 보크는 제2기갑집단이 남쪽으로, 제3기갑집단이 북쪽으로 스몰렌스크를 크게 우회한 후 도시 동쪽 외곽에서 합류하도록 하였다. 민스크 전투의 재판이라 할 수 있었는데, 바바로사 작전 초기에 중부집단군이 이런 포위 전술을 연이어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두 개의 주먹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한 개의 기갑집단을 보유한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은 구조적으로 이런 기동전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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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7월, 독소전쟁 당시의 독일군 기갑부대. 2개의 기갑집단을 보유한 중부집단군은 대 포위 전술을 연이어 펼칠 수 있었다.
<출처: Budesarchiv>



1940년 프랑스 침공전에서 보듯이 독일군은 보병부대가 측면에서 모루 역할을 하는 동안 망치 임무를 담당한 기갑부대가 종심 깊게 파고들어 일격을 가하였다. 따라서 보병부대의 속도에 맞추어 기갑부대가 진격을 조절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하지만 중부집단군은 기동력이 뛰어난 두 부대가 이 역할을 나누어 담당하였으므로 전광석화 같은 대포위전을 연이어 펼칠 수 있었다.

비록 후방에 있는 제4, 9군은 민스크를 완전히 정리한 후 출발하여야 했으므로 당장 보조를 맞추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43여 만의 병력과 1,000여 대의 전차를 보유한 제2, 3기갑집단은 충분히 성공을 자신하였다. 여기에 더해 그 동안 OKH의 예비대로 후방에 있던 독일 제2군이 중부집단군에 배속되어 함께 진격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1941년 7월 6일 제2, 3기갑집단이 다시 남북으로 나뉘어 평행하게 진격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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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렌스크 전투 당시 돌격하는 소련군 전차부대. 독일이 공세를 재개한 바로 그날 소련군도 공격으로 나왔다.
<출처: http://albumwar2.com>



소련 서부전선군이 붕괴 된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은 민스크에서 스몰렌스크까지 텅 빈 상태라고 보았다. 따라서 특별히 다른 전략이나 작전이 필요 없이 그 동안 해왔던 대로 그냥 앞으로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워낙 민스크 전투에서 당한 타격이 컸기 때문에 설령 소련군의 대응이 있어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독일이 공세를 재개한 바로 그때, 앞으로 달려오는 엄청난 소련군이 눈에 보였던 것이었다.




소련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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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센코가 스몰렌스크 방위의 중책을 맞았지만 사실 그다지 지휘 능력이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소련이 망신을 당한 겨울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엄밀히 말해 핀란드 침공전은 그 정도 전력을 동원하고도 이길 수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가 될 만한 전력이었다.
<출처: wikimedia>



스탈린도 스몰렌스크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그는 당장 동원할 수 있던 예비대를 모두 투입하여 간판만 남아있던 서부전선군을 즉시 복구하였고 좌우 측의 중앙전선군(Central Front)와 브리얀스크전선군(Bryansk Front)도 이 일대로 투입하는 등, 약 60여 만의 대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이를 통합하여 티모센코(Semyon Timoshenko)가 지휘하도록 하였는데, 그는 겨울전쟁 후반기에 소련의 반격을 성공시켰던 인물이었다.

스몰렌스크는 1812년 제정 러시아의 맹장 쿠투조프(Mikhail Kutuzov)가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힌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미리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러시아군은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며 이동 방어에 나서 그랑드 아르메(Grande Armée)의 출혈을 유도하였었다. 그 결과 나폴레옹은 격전 끝에 스몰렌스크를 점령하였지만 12,000명의 커다란 손실을 입었던 반면 러시아군은 4,000명의 손실만 보았다.

결국 러시아의 이런 대응에 피해가 누적된 프랑스군은 이후 모스크바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풀에 지쳐 후퇴하였다. 총참모장 주코프(Georgy Zhukov)도 쿠투조프처럼 지연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일의 전력이 앞서고 있는 현재 상태에서 소련이 정면으로 맞대응하고 나선다면 민스크의 비극이 재현될 수도 있으므로 스몰렌스크의 포기도 염두에 두고 탄력적으로 방어전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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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쿠투조프의 동상. 스탈린은 그를 흉내 내고 싶어 했지만 그가 남긴 1812년 스몰렌스크 전투의 교훈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출처: wikipedia>



하지만 스탈린은 명장 쿠투조프가 대등한 병력에, 더 많은 야포를 보유하였음에도 프랑스의 진을 빼기 위해 수세적인 방어 전술을 구사하였던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대대적으로 반격을 개시하면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을 만큼 아직도 정확한 현실을 모르고 있었다. 스탈린은 민스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채 하루 빨리 독일의 진공을 막으려고만 했고 그의 이런 아집은 결국 참사를 불러왔다.




참담하게 끝난 소련의 선공



독일이 진격을 재개한 바로 그날 소련도 공격에 나섰다. 티모센코는 지난 겨울전쟁에 구원 투입되어 최종적으로 승리를 이끌었지만 지휘력은 평범한 수준이었고 상명하복에 철저한 인물이었다. 주코프의 우려가 있었음에도 스탈린의 엄명을 금과옥조처럼 받든 그는 앞으로만 내달렸다. 민스크와 스몰렌스크 사이의 레피옐(Lepiel)에 포진하고 있던 소련 제20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돌진하는 모습이 독일군의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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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초기 소련의 주력 전차 중 하나였던 T-26. 하지만 독일군을 막아내기에는 성능이 미흡하였다.
<출처: wikipedia>



이때 제20군이 동원한 1,500여 대의 전차는 당시 STAVKA가 예비로 보유한 전차 전력의 80퍼센트였을 만큼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전방의 상황이 어떤지 그리고 어디에 독일군이 있는지 제대로 몰랐고 단지 앞으로만 달려갈 뿐이었다. 소련군은 스스로 독일 제2, 3기갑집단이 벌려 놓은 함정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소련군의 이동을 파악한 독일은 이미 위치를 선점해 놓고 이들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소련군은 드비나(Dvina) 강에서 드네프르 강에 이르는 전선 서쪽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당하였다. 비테프스크(Vitebsk)와 오르사(Orsha) 일대에 있던 후위 부대가 이들을 구하려 달려 나왔지만 모닥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 꼴이었다. 5일 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소련 제20군은 832대의 전차를 상실하면서 완벽하게 격파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이 스몰렌스크에서 당할 비극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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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렌스크 전투에서 격파 당한 소련 제20군 소속 T-26 전차를 조사하는 독일군.
<출처: Budesarchiv>



추격을 개시한 독일군은 드네프르 강을 순식간에 도하하였다. 사수를 엄명한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소련군의 간헐적인 저항이 계속되었지만 7월 13일이 되었을 때, 비테프크스, 벨리기예루키(Velikiye-Luki), 폴로츠크(Polotsk), 모길레프(Mogilev), 로스라블(Roslavl), 로가체프(Rogachev), 즈로빈(Zhlobin) 등, 스몰렌스크로 향한 일대의 모든 요충지들이 독일군에게 거의 동시에 점령되었다. 그런데 상황을 오판한 티모센코는 또 다시 공세를 지시하였다.




무모한 돌격



제2기갑집단 본진에서 떨어져 보부루이스크(Bobruisk)까지 전진하였던 제24장갑군단의 남 측방이 길게 노출되자 티모센코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전선 전체가 뒤로 밀리는 불리한 와중에도 불구하고 반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민스크에서 격파된 후 긴급 재건 된 제4, 13군과 새로 전선에 투입된 제21군을 긴급히 동원하였다. 7월 13일 이들은 동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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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렌스크 전투 당시 항복한 소련군 전차병. 소련은 무모하게 돌격만 감행하다 귀중한 전력을 순식간 소모시켜 버렸다.
<출처: Budesarchiv>



250여 대의 전차를 보유한 제21군이 첫날 로가체프까지 독일군을 밀어버리는데 성공하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사방이 포위 된 제24장갑군단은 후퇴하지 않고 오히려 그냥 앞으로 50여 킬로미터를 더 치고 나와 북동쪽에 있던 독일 제46장갑군단과 연결에 성공한 것이었다. 덕분에 소련 제13군은 모길레프 인근에서 고립되었다. 방어를 하여야 할 시점에서 공세로 나온 티모센코, 아니 스탈린의 무모함이 비극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제2기갑집단은 7월 16일 스몰렌스크 남측을 통과하여 외곽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19일이 되었을 때 그 동안 뒤쳐져 있던 독일 제9군이 벨리기예루키까지 이동 전개하여 힘을 보탰다. 더불어 독일 제2군이 드네프르강 일대까지 전개하여 소련군의 측면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그런데 그 동안 보조를 맞추어 비테프스크까지 일사천리 진군하였던 호트의 제3기갑집단에서 문제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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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초기였던 7월 8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보크(좌)와 작전을 숙의하는 제3기갑집단 사령관 호트.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거친 환경과 날씨 때문에 제3기갑집단의 진격 속도가 둔화되었다.
<출처: wikimedia>



습지를 지나고 몇 일간 계속 비가 퍼붓자 스몰렌스크 북쪽 초입에서부터 진격 속도가 현저히 둔화된 것이었다. 7월 18일이 되었을 때 호트의 부대는 제2기갑집단과 약 16킬로미터 지점까지 접근하였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고 이틈을 타 소련군은 밖으로 빠져 나가 재편에 들어갔다. 그런데 스탈린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않고 다시 공격을 명령하였고 돌쇠 티모센코는 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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