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스몰렌스크 전투 3 - 독일군의 일방적인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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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9회 작성일 16-02-0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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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재현된 상황



소련 제16, 19, 20군이 몰려 있던 스몰렌스크가 포위 될 가능성이 커졌지만 소련군은 그대로 제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민스크 전투에서 현지 사수를 포기하고 후퇴하였다가 분노를 사서 처형당한 서부전선군 사령관 파블로프의 비참한 말로를 잘 알고 있던 지휘관들은 방법이 없었다. 아직도 대 숙청의 공포가 여전히 남아있던 시기였기에 위기가 눈앞에 닥쳐왔어도 스탈린의 명령 없이 탈출은 불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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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강 인근의 모길레프를 지나는 독일군. 스몰렌스크의 함락은 임박하였는데 스탈린의 무의미한 사수 지시 때문에 소련군은 후퇴할 수 없었다.
<출처: wikipedia>



하지만 스탈린은 한 술 더 떠 공격을 명령하였다. 공세는커녕 방어도 어려워서 후퇴하여야 할 상황이었지만 스탈린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모한 공격의 결과가 어떤지는 레피옐과 보부루이스크에서 이미 증명되었지만 티모센코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는 새로 편성된 제24, 28, 29, 30군을 스몰렌스크 좌우로 배치하여 7월 21일 공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너무 넓은 전선에 산개하여 동시에 공격을 펼치는 실수를 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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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초기에 소련이 엄청난 패배를 연이어 기록한 데는 군사적으로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스탈린의 간섭도 크게 한 몫 하였다. 1941년 스몰렌스크 전투도 대표적인 사례다.
<출처: BBC>



비록 이런 예상 밖의 저항은 독일군을 잠시 긴장하게 만들기는 하였지만 당시 소련군의 상황으로는 도가 넘는 작전이었다. 공세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보급 문제로 전진이 둔화되었고 7월 23일이 되었을 때 독일의 반격으로 각개 격파당하며 뒤로 대책 없이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방어를 준비해도 시간이나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조급히 공격에 나서 그나마 준비된 전력마저 쉽게 소모해 버린 셈이 되었다.

7월 27일 마침내 독일군은 소련의 저항을 물리치고 스몰렌스크를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 순식간에 50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소련군이 퇴로를 차단당하면서 그렇게도 생각하기도 싫어하던 민스크의 악몽이 재현되었다. 지금까지 소련은 모든 것을 끌어 모아 쉬지 않고 공세로 나갔지만 독일을 격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완벽하게 몰락 당할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 스스로 자초한 결과였다.




스탈린이 이끈 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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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소련군의 극렬한 반격을 제압하고 스몰렌스크를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 소련군은 후퇴하여야 했지만 스탈린은 사수를 엄명하였다.
<출처: http://www.junebarbarossa.com/blog/430808-smolensk-1941>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이런 최악의 결과가 다시 재현된 데는 스탈린의 아집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전쟁 초기의 참패를 즉시 만회하고자 무조건 반격을 주문했는데, 이는 소련의 역량에 비추어 어려운 일이었다. 커다란 국토를 이용하여 지연전술을 펼치며 시간을 벌어 방어선을 강화하여야 했지만 그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도시를 너무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잣대로만 파악하여 무조건 사수를 엄명하였다.

이후에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시 자체를 철저히 군사적으로 이용하였지만, 당시 스탈린은 도시를 무조건 사수하여야 할 대상으로 보고 금송아지 같은 전력을 몰아넣는 자충수를 두고는 했다. 아무리 대군이더라도 배후가 차단되어 도시에 갇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군대가 아니라 예비 포로일 뿐이다. 굳이 독일이 공격을 하지 않아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고 오히려 규모가 클수록 버티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스크 당시와 달리 포위당한 소련군이 저항을 계속하였다. 물론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만큼 점령을 쉽게 허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외부와 단절 된 상태로 소련군이 도심에서 버틸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후퇴를 허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 동안 충직하게 스탈린의 명령을 그대로 받들어 공격만 하다가 참패를 당한 티모센코도 같은 의견을 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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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스탈린의 허락으로 약 15만의 소련군이 포위망을 탈출하였으나 그 중 절반이 2주도 되지 않아 다시 잡혔다.
<출처: http://www.allworldwars.com>



이런 상황에 스탈린은 분노하였지만 그렇다고 고스란히 몰락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절망적인 스몰렌스크를 구하러 얼마 안 되는 예비대를 보냈다가는 모스크바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국에서 징집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군복만 입혀 전선에 보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였다. 결국 스탈린도 후퇴를 허락하였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제20군 일부가 탈출에 성공하였지만 사실 이들도 스탈린의 허락 전에 무서워서 본능적으로 후퇴한 병력이었다.




결과



8월 5일, 스몰렌스크 전투가 종결되었다. 독일은 35만 여명의 소련군을 생포하고 전차 3,400대와 화포 3,000문 이상을 격파, 혹은 노획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약 15여 만의 병력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지만 2주 동안 이들 중 절반이 후방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추가로 잡혔다. 한 달간의 공방 끝에 무려 50여 만의 소련군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민스크 전투를 능가하는 대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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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렌스크 전투 종결 후 포로가 된 소련군. 슬라브 포로에 대한 나치의 혹독한 관리 정책 때문에 이들 대부분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설령 귀환했어도 부역했다는 혐의로 고초를 겪었다.
<출처: wikimedia>



민스크에서는 소련군이 쉽게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였지만, 이번에는 무모하게 수시로 공세를 하였고 포위당한 후에도 상당기간 저항하였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었다. 이미 지난 1939년 폴란드 침공전에서부터 선보인 독일의 이중 포위 전술은 이제는 굳이 새로울 것도 없는 레퍼토리였다. 하지만 소련은 두 번이나 같은 방법에 똑같이 참패를 당하면서 군사적 무능을 만천하에 공개해 버렸다. 그런데 소련은 앞으로도 계속 그런 방식대로 굴욕을 더 겪어야 할 운명이었다.

독소전쟁 개전 후 두 달 동안 중부집단군 지역에서만 무려 120여 만의 소련군이 소멸되었고 수천 대의 전차와 야포 그리고 항공기가 격파되었다.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 관할에서도 40여 만의 소련군이 붕괴된 상태였다. 불과 2개월 만에 전쟁 전에 유럽에 배치되었던 소련군의 최정예 부대들과 대다수와 중장비가 전투력을 상실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이런 결과에 흥분하였고 이제 소련이 항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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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공습으로 파괴 된 런던 시내를 순방하는 영국 국왕 부처와 처칠 수상.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위기에 몰렸던 영국은 겨우 한숨을 돌렸지만 소련의 조기 패전이 예상되자 실망하였다.
<출처: BBC>



사실 이 정도의 피해를 보고도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동원령이 내려져 병력이 계속 충원되고 무기 생산에도 박차를 가하였지만 소련의 상황은 어두웠다. 아직 소련과 동맹관계를 맺지 않았던 영국도 몹시 실망하였다. 지난 1년 간 독일의 맹폭에 커다란 시련을 입은 영국은 독소전쟁의 발발로 위협이 감소하였는데, 소련이 조기에 몰락하면 다시 칼날이 영국으로 향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의의



그런데 전선의 독일군 현실은 낙관적인 생각과 달랐다. 그 동안의 격전으로 중부집단군, 특히 가장 선봉에 서서 전선을 돌파한 제2, 3기갑집단은 일단 전진을 멈추어야 했다. 구데리안은 여전히 승기를 잡았을 때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그의 의지만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대승을 거둔 대가로 소모된 것이 많았지만 보충 된 것은 거의 없었고 멀리 전진할수록 보급에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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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보급품의 상당 부분은 이처럼 재래식 수송 수단에 의존하였다. 광대한 소련 땅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보급에 애를 먹은 것은 당연하였다.
<출처: wikimedia>



독일은 연이어 엄청난 대승을 거두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진격하면 할수록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1940년 8월 경쟁관계에 있던 OKH와 OKW(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에서 각각 소련 침공 계획을 입안하였을 때, 소련의 도로망이 워낙 부실하여 공통적으로 철도를 보급의 중추로 보았다. 그런데 소련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조밀하였던 철도망이 급속히 줄어들어 전쟁 개시 두 달이 지나자 철도에서 멀리 떨어진 부대들은 보급 부족에 심각한 곤란을 겪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스탈린은 엄청난 참사가 이어지자 분노보다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서쪽 400킬로미터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다. 특히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계속 공격만 가하다가 참패를 당하면서 의기소침해졌다. 하지만 독일의 생각과 달리 항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은 스탈린의 생각이전에 소련 국민들의 꺾이지 않는 불굴의 항전의지였다. 그렇다 보니 스몰렌스크에서의 대패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 격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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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에 자원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묘사한 선전 사진. 조기 종전을 예상한 독일의 생각과 달리 소련의 저항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였다.
<출처: http://demons.swallowthesky.org/post/11397320398>



독일 육군 참모총장 할더(Franz Halder)는 전투 개시전인 7월 3일 일기에 ‘드비나강과 드네프르강을 건너면 소련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낙관적으로 예상하였었다. 그런데 스몰렌스크에서 엄청난 소련군을 다시 격파하고 이 강들을 건너왔지만 전쟁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 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연이어 거둔 엄청난 대승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수뇌부는 서서히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하였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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