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부겐빌 전투 - 일본군 거점을 공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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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1회 작성일 16-02-0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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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의 서막을 연 일본은 기세 좋게 남부 태평양까지 밀고 내려갔다. 일본이 점령한 남태평양의 섬들 중에 부겐빌이 있었다. 이 섬은 우리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솔로몬 제도 최대의 섬이다. 일본군은 이 섬에 약 6만 명이 넘는 병력을 집결시켜 놓고 미군에 대한 반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겐빌의 일본군 병력은 과달카날 투입 병력보다도 많았고 유황도에서 미군과 싸운 병력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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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원이 부겐빌, 왼쪽 위 작은 원이 라바울, 오른쪽 아래 작은 원이 과달카날



부겐빌 전투에는 여러 특이점이 있다. 첫째, 부겐빌 전투는 과달카날 전투 이상의 대전투가 될 뻔 했지만 연합군은 대병력의 일본군을 섬의 한 구석에 묶어 놓는 정도에서 거점을 단단히 확보하자는 전략을 택했다. 둘째, 미군과 호주군이 군단 병력을 교대로 투입했지만 2년 간의 전투에서 연합군 전사자는 1,400명이 되지 않았다. 단 나흘 간의 타라와 전투에서 1,677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미군의 피해와 대조된다. 그런 면에서 부겐빌 전투는 저강도(低强度)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반면 일본군은 2만 명 내외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대량 전사자 발생 요인으로 연합군의 화력도 들 수가 있지만 그보다 큰 이유는 말라리아와 장티프스 등 열대성 풍토병들이었다. 넷째, 보급이 빈약했던 일본군이 전쟁 말에 채택한 자활(自活) 정책이 가장 성공한 섬이 이곳이었다. 부겐빌의 고구마 경작이 성공하여 많은 일본군을 아사 직전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다섯째, 일본군은 이 부겐빌에서 인정이 넘치는 선린정책을 베풀어 원주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점령지역에서 학정을 일삼던 다른 지역 일본군들과는 매우 다른 독특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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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겐빌 섬-중앙 왼쪽 원안이 최초 상륙지 토로키나.



일본군은 1942년 3월부터 4월 사이 부겐빌에 상륙했다. 이 섬에는 단지 20여 명의 호주군과 소수의 해안 감시자(coast watcher)들만 잔류하고 있었다. 호주군은 선박으로 탈출했으나 해안 감시자들은 잠적해서 계속 일본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수집한 정보를 무전으로 보고하였다. 부겐빌을 접수한 일본군은 이 섬 전역에 여러 개의 비행장을 건설해갔다. 다섯 개의 주요 비행장들은 부카 섬 북쪽의 보니스 반도, 남쪽의 카히리와 카라, 그리고 동쪽 해안의 키에타에 건설 된 비행장들이었다.

남쪽 부인 해안 근처의 토노레이항에 해군 함정들의 정박지가 건설되었다. 정박지는 인근 쇼틀랜드 섬에도 건설되었다. 이 섬은 과달카날 섬에서 발진한 미군 전투 항공기의 비행거리 밖이었기 때문에 각종 함선들이 과달카날로 돌입하는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다. 카히리 비행장은 일본군의 공식문서에 부인 비행장으로 기록된다.

부겐빌 섬의 비행장들은 쇼틀랜드 섬의 비행장과 함께 과달카날 섬이 속한 남부 솔로몬 섬들과 미국과 호주 사이를 잇는 보급선을 공격하는 발진 기지가 되었다. 미군은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낸 1943년 2월 이후에 과달카날이 속한 솔로몬 제도의 나머지 섬들을 점령해가기 시작했다. 1943년 후반, 일본군의 대기지 라바울을 고립시키고 부겐빌과 다른 섬의 점령을 목적으로 하는 카트휠(cartwheel)작전이 발령되었다.

미군이 부겐빌 작전을 개시했을 때 섬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들은 건설 노무자 포함 45,000명~65,000명이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일본군 제 17방면군 소속 6사단 주력 4만 명 병력에 해군의 제8연합 육전대와 설영대를 합친 총 6만 명의 병력이 부겐빌의 주요 거점에 산개해 있었다. 간다 마사다네 중장이 지휘하는 6사단은 중국 전선의 창샤(長沙) 공격에서 공을 세운 사단으로 부겐빌로 이동한 사단이었다.

카트휠이라는 작전명 아래 실시된 라바울 고립 작전의 하나인 이 부겐빌 섬의 상륙 작전명은 체리 블라섬(cherry blossom)작전이라는 서브 작전명이 있었다. 미군은 앞서 있었던 뉴 조지아 섬 점령 작전에서 비행장을 탈취하던 중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크게 고전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비행장을 탈취하기보다는 부겐빌 섬의 적당한 곳에 새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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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겐빌 비행장



상륙작전 개시 전, 미군은 잠수함으로 정찰대를 보내 지형 지질을 정밀 조사한 1943년 9월에 비행장 건설지를 토로키나로 결정했고 자연히 상륙 지점도 이곳으로 결정했다. 상륙 부대는 오스카 그리스올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 해병1상륙군단 소속의 3해병사단이었다. 과달카날 섬의 룽가 함대 집결지를 출발한 미 해병 사단 최초 규모는 약 7,500명이었다. 부겐빌 상륙작전은 1943년 11월 1일 부겐빌 서쪽 해안의 토로키나 곶에 해병들이 상륙함으로서 개시되었다.

이곳을 방어하던 일본군은 보병 제23연대의 증강된 1개 중대였다. 중대는 산포(山砲) 한 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은 방어가 약하다고 보고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일본군 중대 병력의 저항이 예상 밖으로 거세서 미 해병들은 78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3일 간의 격전 끝에야 교두보 확보에 성공했다. 교두보 확보에 성공한 해병 사단은 일본군의 강력한 거점인 북쪽의 일본군 라바울 기지를 전투기로 타격할 수 있도록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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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겐빌 1944년 3월



일본 해군은 미 상륙 작전 개시 당일 발 빠르게 도전해왔다. 11월 2일 자정이 넘은 야간에 해전이 벌어졌다. 후에 엠프레스 어거스타 베이 해전으로 알려진 이 야간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레이더로 조준하는 미 함대의 포사격에 순양함 센다이와 구축함 하츠카제가 격침되었다. 타격을 입은 일본 함대는 상륙저지 작전을 포기하고 라바울로 철수하였다.

일본 육군은 미군이 쇼틀랜드 섬이나 부겐빌 남쪽에 위치한 부인 부근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했다가 엉뚱한 곳에 상륙하자 놀라서 반격을 서둘렀다. 일본군은 17보병사단 제54연대의 1개 대대를 급거 파견하여 역상륙(逆上陸)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이 엠프레스 어거스타 베이 해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역상륙은 며칠 연기되었다. 11월 7일 구축함 4척에 분승한 역상륙 부대는 경순양함 아가노의 엄호 아래 토로키나 근처의 코로모키나 초호에 상륙하여 미 해병 9연대의 2개 대대와 이틀간 전투를 벌였으나 신속하게 증강된 미 해병들에게 패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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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프레스 어거스타 베이 야전



11월 6일과 19일 사이, 미군은 3 해병 사단의 예비 연대와 미 육군 37 사단을 투입해서 교두보를 크게 확장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토로키나 부근에서 6사단 제 23연대로 하여금 이를 막아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일본군은 11일 후퇴해 버렸다. 미군은 계속 추격하며 점령 지역을 넓혀갔다. 교두보 확대 목표로 진격하는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다. 그 전투들은 코이아리 급습, 피바 통로 전투, 코코넛 그로브와 피바포크스 전투들이었다.

부겐빌은 말라리아와 장티푸스가 풍토병화해서 미군이나 일본군에서 병자들이 속출하면서 전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1월 후반기와 12월 상반기에 걸쳐 일본군은 교두보 언저리 토로키나 강 옆 능선 주변에 포들을 배치하고 포사격을 해왔다. 교두보 내의 비행장 활주로와 보급품 집결지들이 포사격의 주요 목표였다. 12월에 미군이 건설하던 토로키나의 비행장이 완성되었다. 미군 항공대는 대폭 증강되어 능선의 일본군 포병은 물론 부겐빌 전역의 일본군들을 폭격했다. 해병 3사단은 12월 9일부터 27일까지 2주 간 연속 작전을 벌여 토로키나 일대 일본군을 축출하고 교두보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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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겐빌 전투 참가 미해병들



교두보 확장 전투에서 헬자포핀 능선 전투는 격렬했다. 이 능선은 높이가 100미터도 되지 않았으나 경사가 급하고 능선이 아주 좁아 교두보 전체를 훤히 내려다 볼 수가 있었다. 일본군은 교두보가 내려다보이는 사면의 반대편 사면에 절묘하게 위장한 여러 진지들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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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겐빌 능선에 가해진 포격



미 해병 21연대는 12월 12일 헬자포핀 능선을 공격했다가 격퇴당했다. 공격 중 미군기가 능선을 몇 번이나 폭격했으나 결정적인 명중탄을 내지는 못했다. 6일 뒤인 18일, 미 해병들은 공지 합동에 막강한 포병 화력의 힘을 입어 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점령할 수 있었다. 다음 날 해병들은 600A 고지를 공격하여 며칠간의 격전 끝에 점령했다.

교두보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고 판단한 미군 지휘부는 부겐빌 투입 부대인 육군 14군단을 해병1상륙군단과 교체하였고 3해병사단은 미 육군의 아메리칼 사단과 교체하였다. 미군의 병력 교체기에 일본군 6사단은 미군이 건설한 토로키나 비행장 점령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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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로키나 비행장을 향한 일본군의 공세



1944년 3월, 일본군 6사단은 작전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의 공세는 일차로 교두보 지역의 700고지와 캐넌 힐을 노렸다. 공격은 3월 8일 개시되었으나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미군의 방어와 일본군 보급의 고질적인 문제로 큰 피해를 입고 3월 25일 중단되고 말았다.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남쪽과 북쪽으로 흩어져 섬 내부로 깊숙이 패주하였다.

이 무리한 전투에서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은 23연대를 필두로 약 1만3천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중 4천 명은 병으로 죽은 병사들이다.

쓰라린 패배를 당한 일본 6사단장 간다중장은 전후에 출판한 그의 회고록에서 명언을 남겼다.


“군기(軍紀)건,칙유(勅諭)건,전진훈(戰陣訓)이건,백만 번의 정신훈화건, 굶주림 앞에서는 전혀 무가치[無價値]하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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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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