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부겐빌 전투 2 - 치열한 공방 끝에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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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9회 작성일 16-02-0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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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본군은 전투보다는 자활의 방법을 찾아 헤맸고 미군은 일본군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채택해서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간헐적인 전투만 있었다. 1944년 4월 5일, 아메리칼 사단의 132 보병 연대는 엠프레스 어거스타 베이 일대에 위력 정찰을 실시하던 중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마바비아 촌을 탈취했다. 연대는 계속 해안을 따라 수색하다가 이틀 뒤에 일본군이 구축한 주력 방어선과 만났다. 미군은 바주카 포와 긴 공병 폭파봉으로 일본군이 잘 구축해놓은 20개의 토치카를 파괴하였다. 전투 후 132연대는 피지[Fiji] 섬 방위군 부대와 함께 사우아 강 서쪽의 정상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연대와 피지군은 작전을 개시하여 치열한 전투를 되풀이 하며 155고지, 165고지, 500고지, 501고지를 연달아 점령하였다. 끝까지 저항하던 마지막 일본군들이 섬멸되거나 패주한 후에 산의 정상을 모두 점령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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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겐빌 참전 피지 섬 방위군



부겐빌의 일본군에게 바다를 통한 대규모 지원은 불가능했었다. 잠수함과 구축함에 의한 야간 수송이 있었으나 미군의 감시와 항공 공격이 너무 거세서 1944년 3월에는 거의 중단상태에 들어갔다. 보급 없이는 전투도 불가능했기에 일본군은 전투 대신 자활(自活) 생존에 집중했다. 일본군은 부겐빌 섬의 점령 지역 여기 저기에 밭을 만들어 식량 확보에 나서는 독특한 행동을 하였다.

앞서 말 한대로 일본군에서도 아사자들이 많이 발생했었다. 이 문제의 극복에 닛다라는 한 해군 중위가 큰 활약을 하였다. 그는 부인[Buin] 방어 부대 사세보[佐世保] 제 6 특별 육전대 소속 주계 중위였었다. 그는 착임 이후 현지 자활의 방법을 찾다가 현지인들이 타로라는 토란 비슷한 뿌리 식품을 주식으로 하고 있고 현지 토양도 고구마에 알맞은 것을 발견하고 대대적으로 고구마를 재배하였다. 고구마 농사는 잘 되어 농사를 잘 지은 부대의 병사들은 고구마를 하루 약 3키로 씩을 배식 받아 과달카날과 같은 대규모 굶주림의 고통을 면하였다. 그간 미군은 흑인으로 구성된 미군 최초의 흑인 사단인 93 보병 사단이 추가 투입되었다.

일본군들이 살아남기 위한 농사에 급급할 때 미군은 여러 개의 비행장 건설에 집중했다. 이들 비행장은 북서쪽의 일본군 거점인 라바울, 캐비엥 등 남태평양의 여러 일본군 기지들을 타격하기 위한 폭격기와 전투기들의 발진 기지가 되었다.

부겐빌 육상부대의 항공 지원은 미 해병 비행단과 미 육군 항공대가 수행했었고 추가적으로 뉴질랜드의 공군이 합세했다. 일본군은 미군에 이어 뉴질랜드 공군의 폭격에 계속 시달려야 했었다. 1944년 10월과 11월 두 달 동안 미군들은 부겐빌의 작전을 호주군 2군단과 호주 민병대에게 넘겨두고 섬에서 철수했다. 피지 보병 연대가 증원된 호주군 3사단과 11여단은 부겐빌에 전개하고 23여단은 부겐빌 인근의 섬들에 분산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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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겐빌 작전을 인계 받은 호주군



11월 말, 일본군도 부겐빌의 기존 거점의 방위 강화를 위하여 보병 81연대를 파견해서 섬 북단 타리나 지구의 동해변에 있는 누마누마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 연대는 후에 증편되어 독립 혼성 38여단이 되었다. 섬의 전투를 인계 받은 호주군 정보 부대는 여러 정보들을 분석하고 미군이 전투를 수행하던 기간에 일본군 8,200명이 전사하고 16,600명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다고 추측했었다. 결과 부겐빌에 있는 일본군 잔여 병력을 약 4만 명으로 추산했고 이들 병력중 20%는 일선에 배치된 전투 부대라고 판단 했다.

일선 일본군의 전투 부대들은 기존의 6사단과 증파된 38혼성 여단의 부대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전투 가능 부대들은 비록 미달된 정원으로 편성되었지만 그 부대들의 무장 정도는 충분해서 정규전을 치를만한 전투력를 보유하고 있었다. 호주군 2군단은 공세적인 전략으로 압박 작전을 계속하여 이들 일본군을 소탕하고 부겐빌을 완전 점령하기로 하였다. 부겐빌에 배치된 호주군의 작전은 11월 29일부터 시작되었다. 부겐빌 전투의 제 2차 단계가 개시된 것이다. 12월 30일 호주군의 공세가 부겐빌 섬의 세 방향으로 실시되었다. 북쪽 공세에서는 일본군을 좁은 보니스 반도에 몰아놓고 그 곳에 가두어 놓는 전략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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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겐빌의 호주군



중앙 방향의 호주군은 부겐빌의 동서 축선을 감제할 수 있는 능선인 펄 릿지를 점령하여 혹시라도 발생 할 수 있는 일본군의 반격에 대비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 능선을 점령하면 부겐빌을 관통하여 동해안으로 갈수 있는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남쪽 전선은 더욱 중요하였다. 이쪽 방향엔 부겐빌의 수도격인 부인[Buin]이 있었는데 이곳에 일본군의 주력이 집결하고 있었다.

중앙의 펄 릿지가 제일 먼저 점령되었다. 그 뒤에 중앙의 군 작전은 누마누마 산길을 순찰하는 수준으로 단순화하고 이제 작전의 포커스는 북쪽과 남쪽에 맞추어졌다. 북쪽 방향에서 호주군은 해안선을 따라 겐가 강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해안선 진격동안 호주군은 계속 내륙으로 정찰대를 보내 고지의 일본군을 소탕했다. 북쪽의 호주군은 씸바 강을 건너 1945년 2월 라수아를 점령하고 드디어 목적했던 대로 일본군을 좁은 보니스 반도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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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스 반도



일본군이 구축한 견고한 방어선을 만나자 호주군은 그 해 7월 이를 우회하여 상륙정으로 일본군 후방 해안의 포튼 농장에 침투 상륙하는 작전을 기획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작전의 실패는 보닌 반도에 갇힌 일본군을 섬멸할 공격을 잠정 중단하는 결과로 발전했다.

호주군은 보니스 반도로의 진격을 유보하고 대신 일본군을 보니스 반도의 라쑤아 전선에 묶어두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하였다. 북쪽 보니스 반도 침공에 투입 예정이었던 병력들은 대신 남쪽으로 돌려 부겐빌 최대 거점인 부인을 공격하는 부대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공세 초기 슬레이터 언덕이라는 곳에서 일본군의 제 13연대와 이어 투입 된 23연대의 격렬한 반격이 있었으나 호주군은 이를 물리치고 남쪽 진격의 승기를 확실하게 굳혔다. 일본군은 이 마지막 공세에서 1,600명의 병력을 잃었다. 남쪽으로 진격해가던 호주군은 부겐빌에 흐르는 많은 강중에 하나인 홍고라이 강, 하리 강, 모바이 강에 도하했다. 그러나 호주군의 순조로운 진격은 미보 강에 도달했을 때 장벽에 부딪혔다. 쏟아지던 폭우에 강이 크게 불고 급류로 인해 많은 다리와 도로가 유실되어 호주군의 진격과 보급에 큰 지장을 주었다. 기상은 호주 사단의 작전 행동을 한 달이나 묶어두었다. 보병들은 7월말이 되어서야 날씨가 좋아져 겨우 미보 강을 건너 다시 진격을 할 수 있었다.

약화될대로 약화되어서 살길을 찾기에 급급했던 일본군에게 대규모 공세를 하는건 무의미한 상황이었는데도 호주군은 쓸데없는 강공을 벌여 전사자만 516명이 발생했다는 비판이 전후에 있었지만 호주군 사령관 스탠리 새비지 중장은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원주민의 해방을 위해서 필요한 공세라고 주장했다.

부겐빌 전투는 1945년 8월 21일 부겐빌의 일본군이 정식으로 항복함으로서 끝이 났다. 이로서 과달카날 전투가 한창이던 1943년 11월 부겐빌에서 감행된 미군의 상륙은 2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작전을 인계 받은 호주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음으로서 그 긴 전투를 종식시킬 수가 있었다. 부겐빌에서 간다 6사단장이 항복할 당시에 일본군의 남은 생존 인원들은 병사들과 노무자들을 합쳐 23,500명이었다. 일본군의 전사자는 18,500–21,500 명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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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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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문서에 조인하는 일본군 간다 사령관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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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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