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 (7) - 영국의 제국주의, 줄루와 충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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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6회 작성일 16-02-0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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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보어인들의 아슬아슬한 평화 관계



프레토리우스가 세운 나탈리아 공화국(Natalia Republic)은 오래가지 못했다. 선발대의 패배에 자극받은 영국이 적극적인 실력 행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영국의 식민장관이던 스텐리 경은 케이프 식민지의 총독 네이피어에게 나탈 지역의 독립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전하였고, 이에 네이피어는 상당수의 병력을 다시 포트 나탈로 급파하였다.

이 당시 나탈리아 공화국 내부의 사정 역시 좋지 못하였다. 나탈리아 공화국의 보어인들은 의회를 만들기는 하였으나 이전에도 뭉치지 못했던 보어인들 특유의 분열성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각 분파는 화합하지 못했고, 3개월마다 대통령이 교체되도록 한 제도로 인하여 정부의 명령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영국 정부의 명령이 싫어 대이주를 감행한 이주민들은 신생 공화국의 법령 또한 존중하지 않았다. 보어 지도자들은 계속되는 치안상의 불안과 주변 부족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공화국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자치권을 어느 정도 허용한 스탠리 경의 제안을 받아들여, 1843년 4월 그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였던 영국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지도층의 생각이었을 뿐, 나탈의 보어인들은 영국인들의 통치를 받기보다는 다시 이주를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845년, 나탈에 영국인 지사(知事)가 부임하였을 때, 대부분의 보어인들은 이주한 상태였고 이 지역에 남은 보어인들은 500여 가족에 불과하였다. 나탈을 떠난 보어인들 대부분은 하이벨드(Highveld)로 이주하였다. 하이벨드와 발(Vaal)강 너머의 지역 트란스발(Transvaal)로 이주한 보어인들은 영국이 나탈에 이어 하이벨드마저 식민지로 편입하려 하자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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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스발 공화국(오늘날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의 위치. 영국 정부는 샌드리버 조약과 오렌지리버 조약을 통해 보어인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비록 나탈을 차지하고 그 인근의 흑인 부족들을 속국의 명목으로 제국에 포함시키기는 하였지만, 영국에게 있어 드라켄즈버그 산맥(Drakensberg Mountains) 너머의 땅은 케이프에서 너무 멀었고, 나탈에서 다스리기에는 나탈에 있는 영국의 무력과 행정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 일단 영국 정부는 1852년에 샌드리버 조약(Sand River Convention)과 오렌지리버 조약(Orange River Convention)을 통하여 각각 트란스발 공화국(Transvaal Republiek: 이후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Oranje Vrystaat)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보어인들의 지도자인 안드리스 프레토리우스는 1853년에 사망하였지만 아들인 마르티누스 프레토리우스(Martinus Pretorius)가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이로써 영국과 보어계 공화국들은 제1차 보어전쟁이 벌어지는 1880년대까지는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줄루 왕국의 새로운 지도자, 세츠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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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 왕국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세츠와요(Cetshwayo kaMpande). 거구의 세츠와요는 형제들을 참살하고 아버지를 허수아비로 만든 다음 줄루의 왕위에 올라 보어인들과 영국인들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줄루 왕국 내의 사정은 달랐다. 실질적으로 백인들에게 땅을 내어주고 왕위를 차지한 뚱보왕 음판데는 자기 집안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수십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야심이 많은 것은 맏이인 세츠와요(Cetshwayo)와 둘째인 음부야지(Mbuyazi)였다. 이들은 각각 음판데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인의 아들들로, 이복형제 관계였다. 사실 음판데의 마음은 둘째로 기울어져 있었고 그의 둘째 부인에게 ‘대부인(大夫人)’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향후 왕위 계승권을 확실히 할 수 있었지만, 음판데는 그 누구도 대부인으로 삼지 않았다. 국왕으로서 자신의 권력이 분산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줄루 왕국에서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한 방책이기는 하지만 이는 음판데의 영향력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줄루 왕국과 접촉이 있던 보어인들은 세츠와요를 음판데의 뒤를 이을 세자(世子)로 보고 있었지만, 음판데는 이를 알고도 모호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주변 세력 간 줄타기를 하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에게는 둘째인 음부야지가 자신의 계승권자라고 하였다. 이에 영국인들은 음부야지의 환심을 사려고 접근하였다. 반면 줄루 왕국의 ‘군부(軍部)’에 해당하는 세력은 세츠와요가 군주로서 보다 나은 재목이라 여겼다. 국왕 휘하의 세력들은 왕의 두 아들들을 중심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두 아들 사이의 반목이 심해지자, 음판데는 갈등을 막기 위하여 음부야지에게 투겔라 강 인근의 땅을 영지로 주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아울러 영국인들과 가까이 지내고 유사시에 그들의 도움을 받으라는 조언을 하였다. 그러나 맏아들 세츠와요는 음부야지가 세력을 키울 시간을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제후들이 세츠와요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츠와요는 무서운 결단력을 발휘하여 1856년 12월에 자신을 따르는 제후들의 병력을 모두 소집하였다. 그는 이 병력을 휘몰아 질풍같이 음부야지의 영지로 진격하였다.

형인 세츠와요가 그의 영지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음부야지는 영국인들에게 급히 도움을 청했고, 영국인들 수십 명이 소총을 가지고 음부야지의 편을 들어 줄루 왕국 왕위 계승전에 개입하였다. 두 왕자의 병력은 이전에 딩가네의 임피들이 ‘나탈 대군단’을 전멸시켰던 은돈다쿠수카(Ndondakasuka)에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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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하는 줄루 전사들. 세츠와요는 은두나들의 지지를 얻어 줄루 왕국의 군권을 장악하고 강력한 철권 독재를 시작한다.



세츠와요의 군에 의해 선공이 이루어졌다. 음부야지는 영국인들의 도움으로 세츠와요 군의 1차 공격을 격퇴하지만 병력의 차이가 너무 현격하였다. 음부야지를 따르는 줄루 전사의 수는 불과 7천이었던 데 비하여, 대부분의 제후들로부터 세자로 인정받은 세츠와요에게는 무려 2만의 대군이 있었다. 세츠와요는 첫 번째 공격이 좌절되자마자 남은 병력을 예비대로 투입하였고, 음부야지와 영국인들은 병력의 열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패한 음부야지는 물론이고 다른 5명의 왕자들도 모두 세츠와요의 손에 죽었다.

이날 전투에서 승리한 세츠와요는 의기양양하게 왕도로 향하였다. 경쟁자들을 모두 죽여 없애고 모든 제후들과 전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마당에 이제 그의 앞을 막을 자는 없었다. 그는 당당하게 세자로서의 지위를 확인하였고, 아버지로부터 실권을 박탈하였다. 음판데는 1872년까지 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들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고 그의 치세는 사실상 끝났다. 이제 줄루 왕국은 세츠와요의 것이었다.




트란스발의 금맥과 탐욕의 제국주의



세츠와요를 본 사람들은 그의 거대한 체격에 압도당하였다. 세츠와요는 6피트 8인치(205cm)의 키에 체중 150kg의 거구였고, 목소리도 걸걸하여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거구의 세츠와요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서양인들의 거대한 욕심이었다.

이 무렵 보어 공화국의 경제 사정은 좋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보어인들은 기본적으로 상업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농민들이었고, 자급자족에 익숙한 이들은 화폐 사용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았다. 여기에 주된 산업이 농업이라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도 어려웠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중시하는 개척민으로서 오랫동안 살아왔기에 정부의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법령의 적용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농부들에게서 세금을 걷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농부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자꾸 납세를 피하였고, 이로 인해 공화국의 경제적 어려움은 커져갔다. 심지어 민병대를 위한 탄약을 마련하는 일이나 공화국 내의 흑인 노동자들에게 급료를 지불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결국 트란스발(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는 1857년에 강제 권한을 발동하여 세금을 걷게 된다. 정부는 물물 교환과 금(金), 은(銀) 등의 현물로 화폐를 대신하는 상황을 타개하고, 상업과 교역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1866년에 지폐를 발행하지만, 그 인쇄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아무나 마구 찍어내는 현상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화폐가치가 급락하였다.

그러나 1867년에 보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바로 타티(Tati) 강가에서 거대한 금맥이 발견된 것이었다. 금맥의 발견으로 한동안 보어 화폐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고, 광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870년에 킴벌리(Kimberley) 근처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많은 수의 보어인들이 농사짓던 손을 놓고 다이아몬드를 캐러 나섰다. 어렵게 살던 보어인들이 일거에 부의 원천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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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남아프리카 킴벌리(Kimberley). 금과 다이아몬드를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킴벌리는 1885년 케이프타운에서 연결되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광산업자들로 인해 인도의 골콘다(Golkonda)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생산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양날의 검이었다. 금과 다이아몬드가 보어인들의 새로운 부의 원천이 되는 것과 동시에 외부인들, 특히 영국인들의 탐욕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보어인들이 농사를 그만두고 금과 다이아몬드를 찾으러 나선 것과 마찬가지로 케이프 식민지에서도 일확천금을 노리고 트랜스발로 향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였다. 이들의 수가 하도 많아 케이프 식민지에서 트란스발을 잇는 도로를 두 개나 새로 개통해야 할 정도였다. 농사와 목축 외에는 신경쓰지 않으며 조용히 살아가던 보어인들의 사회에 갑자기 외국인들의 수가 늘어났고, 바깥세상과 동떨어져 있던 보어인들은 다시 국제 정세의 격랑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와중에 줄루 왕국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비록 실권은 없었지만 명목상으로 아직 왕이었던 음판데가 죽고, 야망이 크고 호전적인 세츠와요가 공식적으로 왕이 된 것이다. 세츠와요에게는 이전 왕들로부터 물려받은 수만의 전사들로 구성된 군대가 있었고, 그는 이 군대의 힘을 최대한 보여주고자 하였다. 사실 줄루 왕국은 봉건제 왕국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최고의 수장으로서 왕이 있었지만, 각자의 추장들이 어느 정도 자신들의 부족과 땅에 대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줄루의 위명(偉名)을 드높인 샤카조차도 다른 부족을 복속시키고 조공과 전사들을 받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세츠와요가 원하는 것은 강력한 중앙통치적 독재국가였다. 그는 온 나라를 군사력으로 직접 통치하고자 하였고, 많은 추장들이 세츠와요의 군사력에 굴복하여 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세츠와요는 왕위 세습의 과정에서 영국인들이 그의 이복동생을 도운 것을 비롯하여 줄루 왕국의 내정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서양인들을 혐오하였다. 그는 자신의 왕국에 들어와 있는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모든 서양인들을 내쫓았다. 이도 모자라 그는 주변 부족들 사이에서 백인들에 대한 증오감을 부추기고 보어인들을 비롯한 모든 백인들에 대한 공격과 약탈을 조장했다.

비록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기는 하였지만 보어 공화국들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더욱 심해지고 화폐가치는 또 다시 급락하였다. 세금도 다시 끊기는 바람에 보어인들의 정부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가 되어 무정부 상태의 혼란이 벌어졌다. 결국 보어인들은 그들이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영국인들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국 식민청의 특사인 솁스톤(Theophilus Shepstone)이 1877년 프레토리아에 도착하여 트란스발을 영국령으로 선포하였다. 솁스톤은 트란스발을 영국령으로 합병하면서 보어인들에게 자치권을 약속하였지만, 본국의 훈령을 받기가 어려운 데다 케이프 식민지 관료들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결국 자치권 부여는 정치적인 불씨로 남았고, 이후 제1차 영-보어 전쟁의 발발 요인이 된다.




영국인이 보여주는 문명인의 오만



트란스발을 합병한 영국은 이제 줄루 왕 세츠와요를 만나 경계 지역에서의 분쟁을 중지시키려 하였다. 우선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백인(보어인)들과 줄루 왕국 간의 국경과 영역을 정하는 것이었다. 트란스발의 보어인들과 줄루 왕국은 그동안 서로 싸우기만 하였을 뿐, 경계 문제로 협상을 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협상 없이 야금야금 영역을 확장하여 줄루인들을 밀어내고, 이렇게 확장한 영역에 시나브로 사람들을 이주시켜 자신의 땅으로 굳히는 것이 트란스발 공화국의 암묵적인 정책이었다.

합병 이후 트란스발 지사로 부임한 솁스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나섰다. 어려서부터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남아프리카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러 부족의 언어에 능했던 그가 중재인으로 나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솁스톤은 트란스발의 지사가 된 이상 보어인들의 관점을 대변하여야 했기에, 보어인들의 주장이 더 정당하다고 하며 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겠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그 어떤 증거도 내어놓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는 차원에서 보어인들과 줄루인들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양다리를 걸쳤다.

그는 어린 시절 교류가 많았던 줄루인들과의 친분을 내세워 1877년 블러드 리버로 줄루의 귀족들을 초대하였다. 솁스톤은 줄루인들에게 문제를 더 이상 크게 만들지 말고 현상 유지를 하자며 그들을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줄루 귀족들은 오히려 솁스톤이 무조건적인 양보만을 강요한다며 크게 화를 냈다. 그리고 그를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배신자로 취급하였다. 줄루인들은 이후 백인들과의 어떠한 대화도 거부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설상가상으로 줄루 왕 세츠와요는 백인들에 대하여 이전보다 더한 경멸감을 가지게 되었다.

선의로서 문제를 ‘좋게 좋게’ 해결하려고 생각했던 솁스톤으로서는 줄루인들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 역시 줄루인들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솁스톤이 식민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줄루인들이 오직 전쟁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악평으로 가득했고, 이는 새로이 영국 정부의 남부 아프리카 특사로 부임한 프레르 경(Sir Bartles Frere)의 결정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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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아프리카 특사로 본국에서 부임한 프레르 경(Sir Bartle Frere, 사진 왼쪽)과 영국 식민청의 특사로 부임해 트란스발 공화국의 지사가 된 솁스톤(Theophilus Shepstone, 사진 오른쪽). 이 두 사람의 책동으로 영국과 줄루 왕국은 피할 수도 있었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프레르는 인도총독부의 관리 출신으로, 식민지의 모든 원주민들이 ‘문명개화’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당시의 전형적인 서양 문명 우월론자였다. 아울러 이러한 문명개화는 문명인의 통치하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전쟁만을 일삼는’ 줄루 같은 원주민들은 우선 철저히 제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영국 식민장관인 카나본 경(Earl of Carnarvon)의 ‘연방제’ 지령을 따르고 있었다. 이는 모든 식민지를 연방제라는 이름하에 그 자치권을 축소하고 영국 정부가 직접 통치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정책적인 기조하에서 줄루 왕국은 영국 정부의 계획에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프레르 경은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펴고 있었던 케이프 자치 정부를 무력으로 압박하여 해체시키고, 총독으로서의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였다. 아울러 영국인들은 트란스발을 위시한 내륙 지역의 흑인 부족들에게 영국 여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영국의 통치를 받을 것을 종용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영국인들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문명’에 편입된 부족들도 있었는데, 펭구(Fengu)가 바로 그러한 부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상당수의 부족에게서 영국인들은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줄루 왕국의 눈밖에 나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부족 중에 코서(Xhose)라는 대부족을 구성하는 갈레카라는 부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1877년에 펭구 출신 경찰관들이 있는 파출소를 공격하였다. 영국은 여왕의 ‘신민’들인 펭구족 편을 들어 줄루 전쟁의 전초전이 된 ‘제9차 변경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분쟁은 영국이 남부 아프리카에 대군을 파견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갈레카 족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잘 싸우기는 하였지만, 결국 2년 만에 영국에게 패하고 그들의 땅은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이 전쟁으로 변경 지역이 시끄럽기는 하였지만, 이는 남부 아프리카 전체로 볼 때 그리 큰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러한 분쟁을 크게 부풀려 마치 대전쟁이 임박한 것처럼 꾸몄다. 아울러 영국인들에 패한 한 갈레카 전사의 말을 전하며 영국인들의 전의를 부추겼다. 다음은 루이스 크레스위크(Louis Creswicke)의 저서 [남아프리카와 트랜스발 전쟁(South Africa and the Transvaal War)의 한 대목이다.


“그래. 당신들은 우리를 꺾었어, 아주 보기 좋게 이겼지. 그런데 말야…….”

그는 동쪽을 가리켰다.


“저쪽에는 아마줄루(줄루)의 전사들이 있거든. 그들도 무찌를 수 있나? 그들은 전혀 아니라고 하는 것 같던데? 할 수 있으면 해봐. 우리 일 신경쓰지 말고, 우릴 건드리지 말아줘. 당신들이 가서 줄루족을 꺾으면 알아서 조용히 살테니까.”

사실 프레르의 식민 정부는 1878년부터 줄루 왕국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차차 진행시키고 있었다. 주변의 많은 부족들은 여전히 줄루족의 위세를 두려워하고 있었고, 결국 영국인들은 줄루 왕국을 멸망시키지 않고는 흑인들을 복속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이는 영국인들이 줄루 왕국을 격파하기만 하면 남부 아프리카의 나머지 부족들에게 영국군의 위엄을 보여줄 수 있고, 이를 통해 이들을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국의 입장에서는 줄루 왕국이 흑인들의 구심점이 되어 “백인들에 대한 대전쟁”을 부추기는 일은 없어야 했다. 이제 영국이 나아갈 방향은 확실하였다. 남부 아프리카를 완전히 지배하려면 줄루 왕국을 멸망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는 영국 식민장관인 카나본 경이 프레르 경에게 보낸 1878년 1월 24일 편지의 끝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기세를 꺾음에 있어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줄루의 왕을 깨부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전쟁,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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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 왕국으로 진격하는 영국군 본대. 줄루 왕국을 무너뜨림으로써 주변 남부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기세를 꺾어 영국군의 위엄을 보이고자 했던 프레르의 식민 정부는 본국의 훈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줄루 왕국을 향한 침공에 나섰다.



케이프 식민 정부 관료, 특히 총독인 프레르 경은 남부 아프리카에 왔을 때부터 전쟁을 피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그는 경계 지역에서의 분쟁을 해결하기는커녕 계속하여 줄루 왕국과 다혈질인 세츠와요를 자극하는 행동으로 일관하였다. 줄루와의 전쟁은 필연적인 것이고, 오히려 전쟁을 빨리 일으켜 영국의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878년 7월에는 세츠와요 밑에 있던 시하요(Sihayo)라는 추장의 아내들이 달아나는 일이 있었고, 이에 시하요의 아들과 전사들이 영국령이 된 나탈에 들어가 그 아내들을 잡아간 일이 있었다. 물론 나탈이 영국령이기는 했지만 어떠한 파괴 행위도 없었고 약탈도 없었다. 그러나 프레르는 이를 핑계 삼아 세츠와요를 ‘엄중 문책’하고자 하였다. 그는 당장 시하요의 아들과 그 전사들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다. 세츠와요는 ‘우리가 무단으로 들어간 것은 인정하지만 분탕질이나 약탈은 전혀 없었다’며 벌금을 내겠다고 했다. 그리고 당사자인 나탈의 관리들과 본국 정부도 50파운드의 벌금을 받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지만 정작 프레르는 이 문제를 크게 확대시켰다. 그는 ‘범죄자’들의 신병을 계속 요구하면서 “이들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끝이 나더라도 줄루 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78년 11월 2일에 줄루 왕국 사절단에게 전달된 최후통첩에는 여러 조항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세츠와요의 신경을 건드린 구절이 있었다. 그것은 줄루 왕국은 그 임피들을 30일 내에 해제할 것이며 군사 크랄들을 폐쇄시키라고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발생되는 사태의 책임은 왕국에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본국의 정부조차 “전쟁을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하였는데 줄루 왕이 받아들일 수 없는 최후통첩을 그리 급히 보내야만 했는가”라며 프레르를 나무랐다. 그러나 이제는 엎질러진 물이었다.

세츠와요는 당연히 프레르의 ‘최후통첩’을 묵살하였다. 1879년 1월, 본국의 훈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테시거 중장(Frederick August Thesiger/ Lord Chelmsford) 휘하 1만 5,000여의 병력이 줄루 왕국을 침공한다. 줄루 왕국에서는 3만 5천의 전사들이 왕의 명령하에 백인들과 싸우기 위해 나섰다.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참고문헌


  • E.A. Ritter, [Shaka Zulu:The Rise of the Zulu Empire]
  • Brian M. Du Toit, [The Boers in East Africa: Ethnicity and Identity]
  • James O. Gump, [The Dust Rose like Smoke: The Subjugation of the Zulu and the Sioux]
  • Louis Creswicke, [South Africa and the Transvaal War]
  • G.W. Eybers (ed.), [Selected Constitutional Documents Illustrating South African History, 1795-1910]
  • 김성남, [전쟁세계사]
  • www.sahistory.org.z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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