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사이판 전투 1 - 전략적 요충지 사이판으로 진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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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4회 작성일 16-02-0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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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발발로부터 2년이 흐른 1944년, 전선은 남쪽의 바다로부터 일본의 심장부를 향해 점점 북상하고 있었다.

일본군에게 밀리던 연합군은 1942년 8월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에서 반격을 시작한 지2년이 안되어 솔로몬 제도를 모두 점령하고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와 뉴 기니아 섬의 파푸아 지역을 확보했다.

거침없이 진격해가던 연합군이 다음으로 겨누고 있는 지역은 중부 태평양의 마리아나 제도였다. 그 마리아나 군도에 사이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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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섬- 상륙 공격은 서쪽 해안에 가해졌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괌 다음으로 큰 섬인 사이판은 16세기에 스페인이 발견한 이후 식민통치를 하다가 1899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스페인이 독일에게 매도하였고, 1차대전 이후에는 일본이 위임 통치령을 차지하게 된 복잡한 사연을 지닌 섬이다.

일본이 위임 통치령을 갖게 된 이유는, 1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연합국 측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독일 조차지(租借地)였던 중국의 칭타오를 점령하고 지중해에 초계 함대를 파견했다. 독일이 패전하자 승전국 일본은 국제 연맹의 승인으로 사이판의 위임 통치령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차모로족 원주민이 살고 있는 사이판에서 일본은 사탕수수 재배와 수산업을 육성하는 한편 일본인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사이판이 일본 통치령이 된 후 약 2만5천 명의 일본인이 사이판으로 이주했다. 대부분 오키나와나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는데 이들 민간인 중 5천 명은 사이판 전투 전에 일본으로 귀환하지만 나머지 2만 명은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전투 발발 직후 미군과 일본군의 작전에 변수가 생기면서 비극적인 참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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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전의 사이판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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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신형 폭격기인 B-29의 폭격 장면



사이판은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미국의 신형 폭격기인 B-29는 항속 거리가 5천km에 달해, 사이판에서 출격하면 일본의 심장부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대형 4발 폭격기인 B-29를 벌써 실전에 배치하고 있었고, 실제로 중국 쓰촨성 청두에 건설한 비행장에서 출격하여 만주의 중공업 시설이나 일본 규슈의 야하다 제철까지 폭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쓰촨성을 기지로 삼았을 때 도쿄나 오사카의 주요 표적들은 아직 비행거리 밖에 있었다.

하여 일본은 사이판을 빼앗기면 국토의 심장부가 무방비 상태에 처하게 되는 셈이라 미군 격퇴에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1943년 9월 일본 대본영은 절대국방권을 설정하고 사이판 일대를 절대국방권의 핵심 거점으로 삼았다. 요새화 공사에 착수하여 사이판 남부에 아슬리토 비행장을 건립하는 한편 타포차우산에는 일본군에 흔치 않았던 최신 레이더 기지도 설치했다. 일본 육군은 사이토 중장이 지휘하는 제43 사단과 9 전차 연대를 사이판 수비 병력으로 파견하였으며 육군 약 2 만 8천 명, 해군의 육전대와 병참 부대 1만 5천 명, 합계 4만 3천 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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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단을 이끌었던 사이토 중장. 사이판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나구모 중장- 한때 일본 연합함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그가 이런 죽음의 장소로 온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당시 사이판에 주둔한 여러 고위직 해군 간부들을 통솔할 사람으로서 경력이 많은 나구모가 적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중부 태평양 방면 함대 사령관에 나구모 주이치 해군 중장이 부임해와 있었는데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후 육상의 한직을 돌다 사이판으로 이동한 경우였다. 이외 6함대 사령관 다카키 중장, 제 1연합통신대 사령관 이토 소장, 제 3 수뢰전대 사령관 나카가와 소장, 남동방면 항공창장 사토 중장 등 고급 해군 지휘관들이 사이판에서 결집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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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의 일본 해군 간부들



그러나 일본 해군이 예상하기에, 미군의 다음 침공선은 더 남쪽인 캐롤라인 군도를 거쳐 필리핀으로 향할 것이고 사이판 공격은 그보다 뒤인 연말쯤일 거라는 추측이 우세했다. 그런 판단 아래 일부 병력은 티니언이나 괌으로 빠져나가 사이판의 실제 병력은 3만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사이토 사단이 사이판으로 이동해온 것은 미군의 침공이 있기 불과 20일 전으로 준비 시간이 부족한 편이었으며, 이동 중 잠수함의 뇌격을 받아 다량의 군수품을 잃는 허술함을 보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사이판은 일본군이 그 전의 타라와섬 전투나 그 후의 이오지마 전투에 비하면 방어 준비를 비교적 느슨히 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의 발발



사이판 공격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44년 6월 11일 미 해군 함재기 1100기가 사이판을 기습해서 맹렬한 폭격을 했다. 이어서 6월 13일, 해안에 접근한 함대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공격은 사방이 낭떠러지 해안인 사이판에서 유일하게 모래 사장이 있던 남부 해안에 집중되었다. 사이판 침공은 타라와에서 싸웠던 미 2해병 사단과 4해병 사단이 전면을 담당했고 그 뒤를 육군 27사단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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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사이판 포격



상륙 직전, 7척의 최신 전함들이 2400발의 16인치(410mm) 포탄을 발사했고 다음날은 임무를 교대한 8척의 전함과 11척의 순양함이 다시 포탄을 날렸다. 양일 간 16만5천 발의 포탄이 발사되면서 사이판 기지의 일본군 전투기가 모두 파괴되었고, 섬에 정박해 있던 10여 척의 본토 왕복 수송선단도 궤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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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 왕래 일본 4611 수송선단이 폭격으로 불타고 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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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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