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사이판 전투 2 - 미군의 사이판 상륙과 자살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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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8회 작성일 16-02-0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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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 오전에는 8천 명의 미 해병들이300척 이상의 LVT(수륙 양용 장갑차-Landing Vehicle Tracked)를 이용해 사이판 서쪽 해변으로 돌진하여 두 시간 만에 상륙했다. 상륙 작전을 위해 11척의 화력 지원함이 엄호를 맡았는데 그 중심에는 전함 테네시와 캘리포니아, 두 척의 순양함이 있었고, 버밍햄과 인디애나폴리스가 보조를 맡았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 포병들은 미군 침공 전 해안 앞 얕은 바다에 일정한 간격으로 깃발을 꽂아 거리를 표시해놓고 포 사격 때 이를 기준으로 명중도를 높였다. 이들의 치밀한 포사격 준비로 20량의 수륙양용 장갑차가 파괴되었다. 미군의 상륙에도 미리 대비하여 요소 요소마다 철조망과 전차, 포병, 기관총들을 배합한 저지선을 설치하여 해병들의 피해를 극대화하고 전차를 동원하여 역습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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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해안에 상륙한 미 해병대



그렇지만 압도적인 화력 앞에 일본군의 저항은 곧 한계에 달해, 해안 방어를 맡았던 일본군 독립 혼성 47여단 병력과 전차 9연대의 4 중대 전차들이 전멸했다.

그날 늦은 오후 무렵, 총 2만 명의 미 해병이 상륙하여 폭 1km의 교두보를 내륙 10km까지 진출시켰으며, 일본군의 상투 전술인 야습은 오히려 대비하고 있던 미 해병에 의해 격퇴되었다.

6월 16일, 미 육군 27사단이 상륙하여 그날 야간에는 아슬리토 비행장으로 진격하였는데 일본군 전차 제 9연대와 약 8천 명의 보병이 미군들에게 반격을 가했으나 그 역시 화력을 앞세운 미군들에게 전멸을 당했다.

18일, 사이토 중장은 비행장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일본군 대본영은 교범에 따라, 적이 상륙하는 순간 가장 취약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해변에서 이를 격멸하려고 하였으나 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이 작전은 휴지 조각이 되고 만 것이다.

일본군은 사이판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방어 계획을 짤 때 해변보다 내부의 지형을 요새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본 대본영에서 상륙 시점을 노리는 수변 작전을 근간으로 사이판 방어 계획을 짰던 하루게 마모루 소좌는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계속 괴로워하다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자살하였다.

그 시점에 도요다 소에무 제독이 지휘하던 일본 연합함대는 연합군의 항공력 격멸을 목표로 항공기 700여대를 동원하는 아고[ア號] 작전을 막 발령하고 있었다. 도요다 제독은 이 작전에 참가하고 있던 해군 전력을 사이판 공략 부대 분쇄에 전환하기로 하였다.

두 해군은 곧 격돌하였으나 일본 해군은 3척의 항모와 육상 발진기 및 함재기를 600기 정도 잃고 거의 궤멸되었다. 이제 사이판의 일본군은 증원이나 지원 없이 싸워야 하는 고립무원의 절망적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사이판의 일본군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가 옥쇄하기로 하였다.

사령관 사이토는 잔존 일본군을 중부 사이판의 타포 차우의 산악지대로 후퇴시키고 방어선을 쳤다. 이곳에는 동굴이 많았다. 일본군은 이 화산지대의 동굴을 활용해서 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며칠간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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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들의 동굴 공격



일본군은 낮에는 동굴에 숨어있다가 밤에 나와서 미군을 공격하는 전략을 취했다. 애를 먹은 미군들은 이들 동굴 속의 일본군들을 소탕하는 전술을 개발했는데 화염방사기 팀이 접근하여 동굴 안에 휘발유 등 가연성물질을 쏟아 부은 것이다.

미군이 상륙하고 3 주가 지난 7월 초, 일본군은 더 이상 버틸 여력도 후퇴할 후방도 없었다. 이제 사이토 중장이 지휘하는 43사단에는 잔존 병력 4천 명, 타부대 소속 병력 2천 명 정도가 생존해있었으며 온전하게 움직이는 전차는 3량 정도, 야포는 전부 파손된 상태에 식량이나 의약품은 물론 마실 물도 없는 상태였다.

사이토는 최후의 자살 돌격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군인들은 어찌하든 죽는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만 군만 바라보고 있던 민간인은 어찌할 것인가. 여기에 사이토는 비정한 명령을 내린다.

“이제부터 민간인과 군인의 구분은 없다. 민간인도 죽창이라도 들고 최후 돌격에 합류하는 것이 포로가 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7월 7일 새벽, 커다란 적색 깃발을 든 12명의 향도가 앞선 가운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3천 명의 병력이 미군을 향해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다. 놀라웠던 것은, 그들 뒤로 무장은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반신 불비 상태의 부상병들이 비틀거리며 따라나선 것이다.

태평양 전쟁 사상 최대의 자살 돌격이 실행되었다. 미군은 포로들로부터 자살 돌격이 곧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자기 목숨을 잊은 일본군의 광폭하고 맹목적인 돌격은 미군의 화력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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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사이판 거리를 행군하고 있는 미군



이 대규모 자살 공격에 압도되어 미 육군 105 연대의 1대대와 2대대에서 65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5시간이나 계속된 전투 끝에 미군들은 4천3백 명의 자살 돌격대를 사살하고 돌격을 저지시켰다. 직후 일본군 최고 사령관 사이토와 부하 지휘관인 히라쿠시와 이케타는 동굴에서 할복하는 하라키리 의식으로 자결하였고 나구모 주이치도 자결로 생을 맺었다.

7월 9일 미 해군 사령관 터너 중장은 사이판이 점령되었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사이판 전투는 일본군 3만 명이 전멸하고 미군은 3천 명이 전사, 1만 명이 부상당한, 양쪽 모두 큰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 일본군 중 포로로 살아남은 사람은 921명뿐이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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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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