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레이테 해전 1 (1944) - 태평양 전쟁 최대의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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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7회 작성일 16-02-0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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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해전은 태평양 전쟁에서 최대의 해전이었으며, 일부 평가에 의하면 역사상 최대의 해전이기도 했다.

레이테 해전은 1944년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레이테섬과 사마르섬, 그리고 루손섬 해역에서 있었던 네 번의 해전을 말하는데, 시부얀 해전, 수리가오 해협 해전, 사마르 해전, 케이프 엥가노 해전이 이에 속한다.

몇 차례의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전투 가능한 주력함들을 대거 잃고 더 이상 정상적인 함대 해전이 불가능해졌다. 소수의 군함이 남아 있었지만 전투력이라 보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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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의 유명한 상륙 장면이 바로 레이테섬에서 촬영한 것이다.






레이테 해전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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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 초록색 원이 레이테섬이다.



해전은 1944년 10월 20일 미군의 대부대가 레이테섬에 상륙 작전을 감행하면서 시작되었다. 레이테섬은 필리핀 점령의 교두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레이테 해전 전에 미국은 하나의 전략적 목표에 직면했다.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잇는 석유, 고무 등의 공급 루트에 전개해 있는 일본군들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어느 쪽으로 진공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두 개로 갈라졌다.

해군의 니미츠 제독은 타이완을 점령하자는 쪽이었고, 육군의 맥아더 원수는 필리핀을 점령하자는 쪽이었다. 이 대립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 하에 맥아더의 주장대로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약간의 갈등은 있었으나 결정된 바에 따라 미군이 레이테섬을 점령하는 킹 Ⅱ 작전이 즉시 발동되었다. 킨케이드 제독의 7함대와 홀지 제독의 제3 함대가 레이테해전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킨케이드 제독의 7함대는 맥아더의 지휘 아래 있었고 홀지 제독의 3 함대는 니미츠 제독의 지휘 아래 있었다. 이러한 양분된 지휘 체계는 양 함대의 소통을 약화시켰는데 이는 사마르 해전에서처럼 지원이 늦어져 미 함대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미군은 10월 20일 레이테 섬의 타크로반과 파로강 중간 해안에 맹렬한 함포 사격을 가한 뒤에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미군은 당일 60,000명의 병력과 107,000여 톤의 군수품을 상륙시켰다.

미군이 레이테섬를 공격하자 일본 해군은 미군의 필리핀 침공에 대비해서 미리 입안했던 쇼 이치고 작전을 발령하며 미 함대에 맞섰다.

일본군은 1944년 6월, 필리핀 해전에서 다수의 항공기와 조종사들을 잃고 아직도 그 손실을 보충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필리핀 일대에 있었던 일본 육해군의 항공기 숫자는 침공 작전을 시작했던 미군 함정의 숫자보다도 적었다. 항공 결전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본 해군은, 하나의 부대를 유인용으로 활용하고, 루손섬에 있는 육상 항공 부대의 지원을 받아 수상 함대로 결판을 내는 전략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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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지사부로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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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타 다케오 중장



미군과 맞설 일본군은 3개 부대로 편성되었다. 먼저 제3함대 사령관 오자와 중장이 직접 지휘하는 기동부대가 있었다. 이들은 필리핀을 공격하는 홀지 제독의 기동부대를 북으로 유인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전력이 허약해진 상태라 유인용으로 선택되었다.

다음으로 남방부대라 불리는 그룹은 남쪽에서 수리가오 해협을 통과하여 미군의 상륙 지점을 직접 공격할 임무를 부여 받았다. 두 개 함대에서 파견한 유격 부대가 혼성 부대로서 임무 수행을 맡았다. 선도 부대는 니시무라 쇼지 중장의 제3함대가 맡았고(구리타 해군 중장의 제2함대 소속 제1 유격 부대로 편성), 후속 부대는 시마 기요히데 소장의 5함대가 맡았다(미카와 중장의 남서 방면 함대에 제2 유격 부대로서 임시 편입).

마지막으로 미 함대를 격멸할 임무가 주어진 가장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부대가 있었다. 중앙부대라고 통칭되는 이들은,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와 그 자매함 무사시, 그외 나가토, 공고(金剛), 하루나 등의 강력한 전함 부대가 주축이 되었다. 소속은 일본 해군 제2함대 소속 제1 유격 부대였다. (남방부대와 중앙부대로 분류하는 것은 미국의 기술 방식이며, 일본에서는 사령관의 명칭을 붙인 함대명을 쓰고 있다.)

중앙부대의 사령관은 제2함대 사령관 구리타 다케오 중장이었다. 이 중앙부대는 샌 버너디노(San Bernardino) 해협을 통과하여 필리핀해로 진입한 뒤 남쪽 레이테만으로 돌입하여 상륙 함대를 격멸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팔라완 섬 근해의 잠수함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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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타 함대는 브루나이(당시 보르네오 섬)에서 북상하였다. 좌측 하단 초록색 원 부분.



강력한 중앙부대의 구리타는 브루나이의 정박지에서 출동했다. 구리타 함대는 10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팔라완섬을 통과하였다. 이 항로 해역에 미 잠수함 다터와 데이스가 수상 초계를 하고 있었다.

23일 자정이 조금 지나, 다터의 레이더는 3킬로미터 거리에서 일본 함대를 탐지하였다. 함장은 이어서 접근하는 일본 함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확인 후 두 잠수함은 이 함대를 앞지르기 위해 전속으로 달렸다.

추적 중 다터는 본부에 세 번이나 일본 함대의 출현 사실과 규모 위치 항로 등의 정보를 타전하였다. 다터와 데이스는 몇 시간 동안 수상 질주하여 구리타 함대의 전방으로 이동한 뒤에 잠항했다. 이들은 시야가 좋아지는 여명에 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새벽 5시가 조금 지난 시간. 매복하던 다터가 먼저 함수에서 어뢰 여섯 발을 부챗살로 발사하였다. 그중 네 발이 구리타가 기함으로 삼은 중순양함 아타고(愛宕)에 명중하였다. 함이 너무 신속하게 침몰하는 바람에 구리타 제독은 구명정으로 옮겨탈 여유도 없이 바다에 떠있다가 구조되었다.

다터는 어뢰 발사 후 신속하게 방향을 틀어 함미에서 네 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두 발을 중순양함 다카오(高雄)에 명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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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식 때의 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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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터의 공격으로 격침된 구리타의 기함 아타고



새벽 6시가 가까울 무렵, 데이스가 발사한 네 발의 어뢰가 중순양함 마야(摩耶)를 타격했다. 아타고와 마야는 빠르게 침몰했고, 다카오는 두 척의 구축함이 호위하는 가운데 브루나이로 회항하였다. 두 척의 미군 잠수함은 함대 추적을 멈추고 격침하기 쉬운 다카오를 뒤쫓았다. 그러나 잠수함 다터가 봄베이 모래톱에 좌초되어 침몰하고 승조원들은 모두 동료함 데이스에 의해 구출되었다

한편 구리타는 지휘기를 야마토로 옮기고 앞으로 다가올 해전을 지휘하게 된다. 구리타 함대가 해전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단 두 척의 잠수함에 큰 피해를 당한 것은, 레이테 해전에서 일본 함대가 맞게 될 대재앙의 전조와도 같았다. 그래도 구리타 함대는 작전을 강행했다.

팔라완의 잠수함 기습은 큰 전과임에도 불구하고 레이테 해전의 일부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시부얀 해전 -1O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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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아래쪽 녹색 원이 시부얀해이다.



1944년 10월 24일, 미 해군은 일본 중앙부대가 시부얀 해로 진입한 사실을 탐지했다.

홀지 제독이 지휘하는 제3 함대의 기동부대가 일본 함대를 막아야 했다. 그러나 일본 기동부대와의 거리가 너무 먼 데다가 부대 집중이 안되어서 전투력을 완벽하게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10월 22일 홀지 제독은 그의 항모 그룹 중 두 개 부대를 후방 기지 울리히 환초로 보내 정비와 재무장을 하도록 하였다. 덕분에 막강한 3함대 세력의 40%가 격감된 상태에서 전투를 하게 되었다.

3함대 소속의 여러 항모 부대에서 가장 약한 제럴드 보건 제독의 38.2 기동부대(38 기동부대의 2그룹 부대 )가 일본 중앙부대의 막강한 전함 부대를 상대하게 되었다.

보건 제독의 38.2 기동부대에는 정규 항모인 인트레피드함 한 척과 두 척의 경항모가 편성되어 있었다.

비록 약체의 전투력을 보유한 작은 기동부대였지만 보건 제독은 일본 함대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지 않고 공격대를 출격시켰다.

1944년 10월 24일 오전 10시 넘어 출격한 공격대 1 파는 시부얀 해로 들어와 항진하던 일본 함대를 급습, 전함 나가토, 야마토, 무사시를 명중시키고 중순양함 묘코(妙高)를 대파하였다.

곧 제2파가 뒤를 따랐다. 이들은 인트레피드와 다른 기동부대 소속인 에섹스, 그리고 렉싱턴에서 출격한 공격대였다. 이들은 무사시를 상대로 10발의 명중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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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24척이 건조된 에섹스급 항모 인트레피드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의 자매함인 무사시는 시부얀 해전에서 침몰했다.




그래도 세계 최대 규모의 전함인 무사시는 침몰하지 않았다. 단지 피해가 커서 출동을 취소하고 귀로에 오르게 된다. 좌현으로 기울어 느린 속도로 귀환하는 무사시에게 미 항공대의 제3파가 쇄도해왔다.

이들 공격대는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프랭클린에서 출격했던 전투기, 급강하 폭격기, 뇌격기의 혼성 부대였다. 3파 공격대는 11발의 폭탄과 8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중상을 입은 무사시는 해상에서 표류하면서 신음했지만 이 7만 톤의 거함은 좀체 침몰하지 않았다.

구리타 제독은 미 항공대의 공격이 드세지자 공격 거리에서 벗어나고자 함대에게 일시 후퇴를 명령한다. 함대는 표류하는 무사시 옆을 그대로 통과하여 후방으로 철수한다.

구리타는 오후 5시 조금 넘은 시각까지 기다렸다가 재차 방향을 돌려 원래 통과 목적지인 샌 버너디노(San Bernardino) 해협으로 향했다. 그러나 17발의 폭탄과 19발의 어뢰에 명중 당한 무사시는 결국 못 견디고 저녁 7시 30분에 전복되어 침몰하였다.




같은 날, 루손섬



한편 필리핀 루손섬을 지키던 일본 해군 제1 항공 함대 사령관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은 그의 휘하 항공대를 총동원하여 셔먼 제독의 38.3 기동부대를 공격했다. 셔먼의 부대는 루손섬의 비행장들을 폭격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셔먼의 기동 함대를 공격한 일본기들은 대부분 함대 영공을 전투 초계하던 미 해군기들에게 격추당했다. 그러나 오전 10시 경, 신형 급강하 폭격기 스이세이(彗星 혜성) 한 기가 초계선을 교묘히 뚫고 날아 들어와 경항모 프린스턴에게 250kg짜리 철갑탄 한 발을 투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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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이세이 급강하 폭격기



이 작은 폭탄은 마(魔)의 일탄이었다. 폭발은 프린스턴의 격납고에 큰 화재를 일으켰는데 이 화재가 겉잡을 길 없이 확대되어 연쇄 폭발을 일으켰고 급기야 오후 3시 경에는 함체 후방의 항공기용 폭탄 저장고가 유폭(誘爆)되어 대폭발이 일어났다.

프린스턴 옆에서 진화 작업을 돕던 경순양함 버밍엄도 이 대폭발로 인해 대파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인적 손실은 프린스턴보다도 더 컸다. 버밍엄뿐 아니라 근처의 다른 경순양함 한 척과 구축함 두 척도 큰 피해를 입을 만큼 엄청난 폭발이었다.

결국 프린스턴을 포기한 채 생존 승조원들은 탈출하였다. 오후 6시 경, 미 항공대는 경순양함 레노로 어뢰를 발사하여 프린스턴을 자침(自沈)시킨다. 승조원 108명이 전사하고 1,361명이 구출되었다. 프린스턴은 레이테 해전 중 격침된 미 해군의 최대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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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이세이기의 공격으로 불타는 항모 프린스턴



일본 해군의 중앙부대는 이날 야음을 틈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샌 버너디노 해협을 통과했다. 다음 날인 25일 아침, 일본 중앙부대는 기습적으로 레이테섬 인접 사마르섬 근해에 출현해서 미 함대를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일본 중앙부대가 샌 버너디노 해협를 통과해 접근할 수 있던 것은, 오자와가 이끄는 북방부대의 유인 작전 덕분이기도 하다. 홀지 제독은 이 유인 작전에 걸려들었을 뿐 아니라 오자와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북으로 이동한다는 결정을 킨케이드 제독의 7 함대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홀지 제독의 3 함대와 킨케이드 제독의 7함대가 니미츠와 맥아더로 지휘 및 보고 체계가 이원화 된 결과 이런 실수가 나왔다고 볼 수도 있다. 홀지 제독은 일본 중앙부대가 샌 버너디노 해협을 통과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이에 대비하여 전함 함대를 편성해서 해협 부근에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

이 임시 편성한 함대의 명칭은 34 기동부대(TF34)였다. 지휘관은 윌리스 리 소장이었고 편성된 부대는 4척의 전함, 5척의 순양함, 그리고 14척의 구축함이었다. 이 전함 부대를 지원하는 것은 랄프 E. 데이비슨 소장 아래 TG38.4의 항모 부대가 맡았다. 용의주도한 대비 같았지만 홀지 제독이 내린 메시지가 아주 모호하여 함대 편성부터 지체되다가 실시되지 못했다.

홀지 제독은 오자와의 북방 함대가 일본 함대 중 가장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오자와 기동부대가 이미 필리핀 해전에서 무참히 패하여 별다른 전투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홀지 제독의 3 함대는 오자와의 북방 함대를 정밀하게 수색했지만 24일 늦은 오후까지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후 5시 경 오자와 기동부대의 존재를 탐지한 홀지 제독은 그의 기동부대에게 북상을 명령한다.

북방의 오자와 기동 함대는 미군 함대의 교신을 감청하다가 구리타 제독의 중앙부대가 공습에 못이겨 후퇴한 것을 알았다. 이 후퇴는 공습을 피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였지만 그 내막을 알 수 없었던 오자와 제독은 홀로 홀지 부대와 대결할 수는 없다고 판단, 함수를 돌려 북방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한참 철수 중인 저녁 8시, 연합 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대장으로부터 전군 돌격의 명령을 받았다. 그는 구리타 부대가 다시 방향을 돌려 샌 버너디노 해협 통과를 목표로 기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오자와에게 협공을 지시한 것이다.

한편 이날 야간에 경항모 인디펜던스함에서 출격한 정찰기는 구리타 함대가 샌 버너디노 해협 입구에 나타난 것을 탐지하여 보고했지만 홀지 제독의 참모나 일부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 보고에 신빙성을 두지 않았다.

홀지 제독의 함대는 계속 오자와 함대를 잡기 위해서 북상 중이었다. 샌 버너디노 해협을 방어해야 할 TF34 부대도 편성만 된 채 홀지 제독의 함대와 같이 북상하고 있었다. 미 기동부대는 중요한 샌 버너디노 해협을 비워놓은 채 공허한 북상 해역을 항해하고 있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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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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