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프랑스 전역 4 (1940) - 아르덴을 돌파구 삼아 진격하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16회 작성일 16-02-07 09:02

본문















14548033235149.png





낫질 작전의 극적인 채택



독일군 지휘부도 황색 작전에 따라 프랑스를 침공한다면 많은 아군의 희생이 불가피하며, 최악의 경우 1차대전 같은 지옥이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대규모 기갑부대의 산림지대 통과를 주장한 만슈타인의 제안이 실현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기각하였다. 그리고 5월 10일,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렇게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던 전쟁이 개시된 것이었다.





14548033246743





개전 당일 교량이 파괴된 뫼즈(Meuse) 강을 도하하기 위해 준비 중인 독일군. <출처: Bundesarchiv>



그런데 독일이 선택한 침공방법은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이었다.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아 거부되었던 이 계획이 채택된 과정은 상당히 극적이었다. 수 차례의 기각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이 황색 작전을 비판하고 계속 자신의 의견을 상신하자 이를 항명으로 판단한 참모총장 할더(Franz Halder)가 그를 후방의 제38군단장으로 좌천시켰다. 그런데 만슈타인이 군단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히틀러가 부대를 방문하였다.

이때 만슈타인은 총통에게 낫질 작전을 소상히 설명할 기회를 얻었고 이를 히틀러가 전격 채택함으로써 작전이 극적으로 실현된 것이었다. 1차대전 당시에 서부전선에서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던 히틀러는 참호전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황색 작전대로 작전을 펼치다가는 자칫 벨기에 평원에서 전선이 멈출 가능성이 크다고 내심 우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히틀러에게 그의 제안은 한마디로 귀가 번쩍 뜨이는 묘책이었다.





14548033258804





샤르빌 인근을 도하하는 독일군. 독일은 점령지와 본토 방위를 위한 소수를 제외하고 프랑스 침공전에 모든 전력을 집중 투입하였다. <출처: 위키미디어>



전통적으로 권력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독일 군부는 히틀러로부터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침공 계획을 변경하고 부대를 신속히 재배치했다. 독일은 당시 편제되었던 157개 사단 중 본토 방위와 폴란드, 노르웨이 등 점령지 관리를 위한 최소한을 제외한 총 136개 사단을 프랑스 침공에 할당했다. 프랑스 침공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고 그것은 지난 1차대전의 교훈을 상기한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당연한 조치였다.




아르덴을 향해 진격하라



OKH는 침공군을 A, B, C의 3개 집단군으로 나누었다. 최초 계획에서 북부의 B집단군이 네덜란드, 벨기에를 통과하여 프랑스로 쇄도하는 주공을 담당하고 중앙의 A집단군은 아르덴 삼림지대를, 그리고 남부의 C집단군이 마지노선의 프랑스군을 견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낫질 작전으로 인해 주공이 아르덴을 통과하기로 변경되면서 기갑부대를 비롯한 모든 예비대가 이곳을 담당한 A집단군으로 집중되었다.





14548033271976





1940년 6월 프랑스 전역에서 활약하는 독일군 4호 전차. 최고 성능의 전차는 아니었지만 현대식 전차의 효시로 인정받는 걸작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가 지휘하는 A집단군에는 침공군의 절반 가까이 되는 총 45개 사단이 증강 편성되었다. 특히 당시 독일이 보유한 10개 기갑사단 중 7개 사단을 하나로 모아 최초의 야전군 급 기갑부대인 클라이스트 기갑집단(Panzergruppe Kleist)을 창설한 것처럼, 기갑부대를 최대한 집단화하였다. 아직 실험적인 요소가 강했지만 이러한 혁신적인 모습은 구태의연한 전술을 고수하고 있던 프랑스와 확연히 다른 점이었다.

흔히 전격전의 상징으로 압도적인 독일의 전차부대를 상기하지만 당시 양측이 동원한 전차는 독일군이 2,400여 대, 연합군은 3,000여 대 수준이었고 개별 전차의 성능도 연합군 측의 전차가 약간 더 우세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프랑스가 전차들을 보병부대에 분산시켜 운용하였던 데 비하여, 독일은 여러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이를 집단화하여 전선을 가르고 종심을 신속 타격할 충격군으로 삼았다는 차이가 있다.





14548033283913





프랑스군의 솜무아 S35 전차. 당시 독일군의 1, 2호 전차보다 성능이 뛰어났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물론 독일군이 새로운 전략을 처음부터 맹신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군의 최고 지휘부도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달리 소장파의 주장에 그래도 귀를 기울이는 면이 있었다. 그들은 폴란드 침공전에서 시험 삼아 편제했던 집단화 된 기갑부대가 가능성을 보이자 이를 대폭 확대하는 데 동의하였다. 한마디로 독일은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여기에 모든 운명을 걸었다.




프랑스군의 대응



미리 개척된 숲 속의 좁은 통로를 헤쳐 나가던 A집단군은 개전 당일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서전을 통렬하게 장식한 것은 원래 황색 작전에서 주공으로 예정되었다가 지금은 조공으로 임무를 변경한 북부의 B집단군이었다. 낫질 작전에서도 이들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다. 연합군 주력인 프랑스 제1집단군이 자신들을 독일군 주력으로 착각하도록 유도한 후, 최대한 저지대 국가 지역으로 끌어당겨서 배후를 길게 노출시키도록 미끼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14548033296442





전선으로 이동하는 프랑스군 모터싸이클 부대. 하지만 대부분의 프랑스군의 기동력은 기대 이하였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면서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향하는 대규모의 독일군이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연합군 최고 수뇌부에 긴급하게 보고되었다. 영국 원정군을 포함하여 연합군을 책임진 인물은 가믈랭이었다. 1939년에 실시된 자를란트 진공을 어이없는 쇼로 만들어 버리며 전쟁의 증폭을 막을 수 있던 천추의 기회를 날려버린 인물이 300만 연합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자체가 어쩌면 비극의 시작이었다.

결론적으로 가믈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무장된 300만 대군을 가지고도 허무하게 패전한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으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었다. 그는 독일 B집단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능욕하자 자신의 계획대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연합군의 주력인 프랑스 제1집단군에게 다일-브레다 계획에 의거해서 국경을 넘어 벨기에로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에게는 다른 대안이나 생각은 없었다.





14548033308367





어느 정도 역할을 해줄 것으로 예상하였던 에방에마엘 요새와 알베르 운하가 조기에 점령당하면서 벨기에는 몰락하였다. <출처: 위키미디어>



당시 프랑스는 강력한 3개 집단군이 전선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는 식민지 관리를 위해 해외에 주둔한 전력을 제외한 프랑스 본토 전력의 9할에 이르는 규모였다. 이들 3개 집단군은 북서에서 남동 방향으로 제1, 2, 3집단군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핵심은 벨기에로 진입할 예정인 제1집단군으로 여기에는 30만의 영국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1집단군은 약 150만 규모였는데 병력이나 장비가 여타 집단군에 비해 앞서는 최정예였다.




운명적이었던 순간



이보다 전력이 뒤지는 2선급 부대로 구성된 제2, 3집단군은 마지노선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프랑스는 제1집단군에게 전쟁의 모든 것을 건 상황이었다. 결국 독일 B집단군을 응징하기 위해 연합군 주공인 프랑스 제1집단군이 벨기에로 진입하였고 이러한 소식은 시시각각 OKH에도 보고되었다. 프랑스는 26년 전에 있었던 마른의 기적(Battle of Marne)을 벨기에에서 재현하고자 하였지만 독일에게 속아 서서히 함정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14548033319304





벨기에로 이동하는 프랑스 제1집단군 소속의 기병대. 사전에 계획을 세워 놓았음에도 프랑스의 대응은 중구난방이었다. <출처: Bundesarchiv>



프랑스 전역에서 가장 운명적인 순간은 바로 독일의 침공 당일인 5월 10일이었다. 9개월 전에 먼저 선전포고를 하였음에도 공격은 포기하고 스스로 방어자의 입장을 선택한 프랑스였지만 독일의 도발을 충분히 예견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한 개전 당일 독일의 기습이 프랑스군을 향한 것이 아니라 길목이라 할 수 있는 저지대 국가로 향하였기 때문에 초전에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처럼 장기간의 경계에 지쳐있긴 하였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춘 150만의 프랑스 제1집단군은 다일-브레다 계획에서 설정한 예정 방어선을 향하여 나갔다. 우익을 담당하는 제9군과 제2군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해안선을 따라 동진하는 제7군과 모든 부대가 차량화된 영국군의 전개는 흠잡을 데 없이 빨랐다. 이들이 예정선에 이동 완료하면 현지에서 벨기에군까지 합세하여 강력한 방어선을 완성할 것으로 보였다.





14548033331099





전차라고 언급하기에는 성능이 민망한 수준이어서 프랑스 전역 당시에 2선 급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독일군 기갑부대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1호 전차. 독일은 이러한 전차도 적극 이용하여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출처: Bundesarchiv>



하지만 역사는, 겉으로 별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던 전선 중앙의 아르덴 숲 속에서 착착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규모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된 독일의 주공인 A집단군 예하 부대들이 사전에 은밀히 개척된 험로를 차례차례 돌파하여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만슈타인이 아르덴을 돌파구로 지목한 이유는 프랑스가 이곳을 침공로로 전혀 예상하지 않았을 만큼 기습의 효과가 컸기 때문이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5.02.0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