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우만 전투 1 (1941) - 소련과 독일의 필연적인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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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32회 작성일 16-02-0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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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火魔)를 피할 수 없던 곳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전격 침공한 독일의 3개 집단군은 목적지를 향하여 전진하였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향하여 쾌속 진군 중이었고, 독일 원정군의 주공을 담당한 중부집단군은 놀라운 포위섬멸전을 연이어 펼치며 엄청난 규모의 소련군을 초반부터 붕괴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우크라이나로 진격하던 남부집단군(Heeresgruppe Süd)이었다. 여타 병단과 비교하여 전과가 상당히 부진하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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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로 진격하던 독일 남부집단군은 여러 이유로 말미암아 개전 초기부터 진격에 애로를 겪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남부집단군이 목표로 하는 흑해 연안의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러시아는 가히 소련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비옥한 흑토지대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무궁무진하게 묻혀있는 지하자원은 소련을 먹여 살리는 보물창고라 하여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닐 정도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가 정치적, 명분상으로 중요한 곳이라면 이곳은 소련의 생존과 직결된 지역이었다. 전쟁 전부터 히틀러가 관심을 가진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1940년 8월,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에 설치 된 별도의 부서에서 침공안을 연구하던 제18군 참모장 마르크스(Erich Marcks)가 처음 내 놓은 바바로사 계획의 초안에 따르면 독일의 우선 목표는 모스크바와 키예프(Kiev)였다. 반면 그 해 12월, 하달 된 총통 명령 21호에 따르면 히틀러는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를 우선시 하였다. 이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키예프를 거론하였을 만큼 우크라이나는 중요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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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키예프. 이곳은 소련 침공안을 계획한 모든 이들이 우선 목표로 거론한 우크라이나의 중심지다.



당연히 소련도 마찬가지여서 다른 곳보다 이 일대에 대한 대비를 많이 하여 놓았다. 때문에 독일군은 전쟁 초기부터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고 키예프로 다가갈수록 진격이 어려웠다. 곤란에 빠진 독일은 돌파구를 만들려고 성동격서(聲東擊西)식으로 소련 방어선의 남 측방을 먼저 무너뜨리면서 남부집단군 최초의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만 전투(Battle of Uman)다. 그런데 이 승리는 이후 역사에서 두고두고 논쟁을 야기하는 중대한 결정을 독일이 선택하도록 강요하여 버렸다.




거대했지만 부족한 소련군



전쟁 발발 당시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우크라이나 일대를 담당한 소련군은 약 150만의 병력으로 구성된 키예프 특별군관구(Kiev Special Military District)였다. 남서전선군(Southwestern Front)과 남부전선군(Southern Front)의 2개 전선군으로 이루어진 키예프 특별군관구는 1939년 소련이 폴란드 동부를 점령한 후, 기존의 우크라이나 군관구를 증강하여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일대로 전진 배치하면서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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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인 1940년 베사라비야를 합병 후 진주한 소련 키예프 특별군관구 소속 부대 <출처: RIA Novosti>



키예프 특별군관구는 소련군 전체 기갑전력의 1/3 정도인 약 6,000여대의 전차를 보유하였는데, 그 중 3,000여대가 개전 당일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이처럼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전력으로는 독일군을 충분히 압도하였다. 하지만 대숙청(Great Purge) 동안 지휘 체계에 엄청난 공백이 발생하면서 훈련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이것은 비단 키예프 특별군관구만이 아니라 소련군 전체의 공통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전쟁이 발발하면 적을 국경 밖에서 격퇴할 것이라 호언장담하였고, 한 술 더 떠 기회가 생기면 오히려 선제 타격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소련군은 공격 대형인 제대(Echelon)로 배치되었는데, 특히 남서전선군은 폴란드를 우회하여 곧바로 서유럽으로 향하는 위치여서 장비나 병력의 질이 소련군 내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전쟁 발발 전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지리적으로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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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프리페트 소택지와 카르파티안 산맥으로 인하여 소련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초입에 프리페트(Pripet) 소택지(沼澤池)와 카르파티안(Carpathian) 산맥이 위치하였는데, 만일 독일이 선제공격을 개시한다면 이러한 지리적 장애물로 말미암아 부대를 분리하여 작전을 펼쳐야 했고, 이 때문에 독일군 특유의 포위 섬멸전을 펼치기 곤란하였다. 여기에 더해 사전에 진지 구축도 충분히 편성하여 놓았다. 따라서 전쟁이 개시되었을 때, 여타 전선과 달리 독일의 돌파가 지지부진하였던 것이다.




강화된 독일 남부집단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가 지휘하는 독일 남부집단군은 제6, 11, 17군과 더불어 700여대의 전차를 보유한 제1기갑집단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여기에 루마니아 제3, 4군이 힘을 보태었다. 비록 2개 야전군과 2개 기갑집단으로 구성된 중부집단군에 비해 기갑 전력이 적기는 하였지만 소련에게 영토를 강탈당하여 복수심이 컸던 루마니아군이 대거 참전하면서 전체적인 규모는 오히려 컸던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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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의 루마니아군. 루마니아는 독소전쟁 개전 초에 60만을 동원한 주요 참전국이었다.



독소전쟁에는 독일과 소련 이외 많은 조연들이 등장한다. 워낙 거대한 두 세력이 충돌한 전쟁이다 보니 타의적으로 가담한 나라들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전세가 유리한 독일 편에 붙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의용군 형식을 빌려 소규모 부대를 파견한 스페인 같은 나라들도 있었지만 핀란드처럼 별도로 전선을 구축한 나라도 있었다. 그 중 전선 남부에서 활약한 루마니아는 단순한 조연이 아닌 당당한 또 하나의 주연이었다.

원래 중립 노선을 걷던 루마니아는 1940년 소련의 겁박으로 베사라비야(Bessarabia), 북부코비나(North Bukovina)를 강탈당한 후 반소의식이 고조 되어 있었다. 극우적 성향을 가진 군부의 실세 안토네스쿠(Ion Antonescu)가 정권을 장악한 후 급속히 친독 노선으로 선회하며 추축국에 가담하였다. 특히 플로에슈티(Ploiesti)에 있는 유전은 전쟁 내내 독일의 생명선 노릇을 하였다. 이러한 루마니아에게 독소전쟁은 복수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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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남부집단군은 카르파티안 산맥에 의해 분리되어 있어 남북에서 나누어 진격하여 드네프르 강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독일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를 북부와 남부에서 포위하여 일거에 석권하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 카르파티안 북쪽에서 제6, 17군, 제1기갑집단이 전선을 돌파하면 동시에 남쪽의 루마니아 일대에 전개한 제11군과 루마니아 제3, 4군이 베사라베야를 거쳐 진격한 후, 약 650여 킬로미터 후방인 드네프르(Dnieper) 강에서 합류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주공이라 할 수 있는 제1기갑집단이 지나갈 키예프였다.




고심 그리고 대응



독소전쟁 개시 전인 1939년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면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에 리비우(Lviv)는 소련의 점령지였는데, 1940년 헝가리와 루마니아가 추축국에 가담하면서 일순간 이곳은 독일 쪽을 향한 돌출부가 되어 버린 형국이었다. 독일은 플로에슈티 유전에서 가까운 이곳을 심각한 위험 요소라고 보았다. 더구나 카르파티안 산맥으로 말미암아 전선이 소련 측에 유리하게 분리 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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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은 2차대전 내내 독일의 생명선 노릇을 하였다. 히틀러는 이곳의 안위를 걱정해 개전 초에 독일 11군과 루마니아군의 공격을 유보시켰다.



만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였을 때, 이곳에 배치 된 소련 남서전선군이 남하하여 플로에슈티 유전을 장악한다면 독일군 전체가 제자리에 멈출 수도 있는 최악의 경우까지 예상하여야 했다. 히틀러는 전세가 확실하게 우위에 서기 전까지는 이곳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루마니아에 전개한 독일 제11군과 루마니아군에게 일단 공세에 참가하지 말고 국경 수비에만 전담하도록 조치하였다.

따라서 독일 남부집단군은 북쪽으로만 공격에 나서야 했는데, 이것은 자칫하면 애초 계획한 양면 포위 계획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개전 당시에 동부전선 전체의 절반 정도를 담당하였을 정도로 남부집단군의 작전 영역이 넓었음에도 이처럼 정작 진출할 수 있는 돌파구는 극히 한정 된 상태였다. 더구나 프리페트 소택지를 기준으로 중부집단군과 전선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협조를 구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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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집단군은 앞으로 진격 하고는 있었지만 소련군을 격멸하거나 심각한 타격을 가하지 못한 상태였다. <출처: Bundesarchiv>



초전에 독일의 기습으로 소련이 수세에 몰리고 있기는 하였지만 이런 상황이 독일에게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소련도 전력을 한곳으로 집중할 수 있어 방어가 수월했다. 게다가 소련 남서전선군은 예비대를 적절히 투입하여 독일군이 측면으로 치고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함으로써 폴란드와 서부전선은 물론 비알리스토크와 민스크에서 연이어 독일이 선보인 양면 포위 전술이 쉽게 먹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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