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줄루전쟁 (12) - 뒤집히는 전세와 무너지는 줄루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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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26회 작성일 16-02-0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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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드 대령은 그를 따라온 우호적인 줄루 전사가 갑자기, 그리고 급하게 외치는 것을 보고는 산 밑을 내려다 보았다. 비록 동굴 공격에서 그의 통역관이었던 로이드(Llewelyn Lloyd)가 전사하는 바람에 그 전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산 밑에 있는 줄루 본대의 모습을 본 이상 통역은 필요 없었다. 줄루 본군이 나타난 이상 공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공격은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것이고 이제는 목숨을 구해 빨리 달아나는 것이 급선무가 된 것이다. 만약 우드의 공격대가 캄불라 고지에 구축해놓은 본진으로 복귀하지 못하면 거꾸로 전멸당할 수 있었다. 자신의 부대원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우드 대령은 즉시 철수명령을 내리고 불러(Buller)와 러셀에게도 당장 작전을 중지하고 후퇴하라는 전갈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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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흘로바네 고지. 습격에 나선 영국군은 이 곳에서 줄루 본군에 포위되어 곤경에 처한다.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우드 대령이 의도한 바이기도 하였다. 우드가 켈름스포드의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자신이 캄불라에 구축한 요새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흘로바네에 대한 공격에 유인된 일부 줄루 병력이 진격해 온다면 그는 줄루병력을 수비군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캄불라로 끌어들여 캄불라의 요새에 비축한 화력으로 줄루군을 격멸한다는 작전을 세운 상태였다. 우드는 줄루군이 나타나기 전 흘로바네의 줄루 수비병들을 격파하고 그 소들을 탈취하여 캄불라로 복귀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다만 아직도 흘로바네 공격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줄루의 중앙군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 뒤에 벌어진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천신만고 끝에 산 위에 올랐던 불러는 아래의 들판을 가득 채운 줄루 본군을 보고는 경악하였다. 불러는 전투 중에 흩어진 부대원들을 찾으라고 민병 기병대(Natal Native Horse)를 내보낸 상태였으나 즉시 기병대에게 탐색을 중단하고 ‘산 오른쪽’으로 돌아 복귀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명령이 잘못 전해졌는지, 아니면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이 기병대원들은 줄루 본군의 정면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2만이 넘는 줄루 본대는 이 불운한 기병대원들을 말 그대로 삼켜버렸다. 기병대원들은 나름대로 분투하였으나 이는 애초부터 가망이 없는 싸움이었다. 기병대원들은 대부분 전사하고 그 지휘관인 바튼 대위(Capt. Robert Barton)는 부상당해 쓰러진 대원을 구출하여 말에 태우고 탈출하였으나 그들이 타고 있던 말이 어른 두 명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였고 결국 준족의 줄루 전사들에게 따라 잡혀 살해당했다. 한편 불러의 병력에게 밀리던 산 정상의 줄루 전사들은 다시 힘을 내서 싸웠고 이미 사기가 떨어진 불러의 병력은 결국 밀리기 시작하였다. 불러는 이 와중에서 소를 몰기 위하여 따라왔던 흑인 일꾼들에게 소들을 포기하고 먼저 낮은 고지 쪽으로 하산할 것을 명령하였고 일꾼들은 가파른 산길을 따라 최대한 빨리 내려갔다. 그러나 어느새 줄루 전사들이 산 위에 나타났고 일꾼들 역시 줄루 전사들이 휘두르는 창에 몰살당했다. 한편 산길이 워낙 좁아 말을 탈 수 없었던 기병대원들은 말에서 내려 이끌어야만 했고 이도 모자라 추격하는 줄루 전사들과 싸우면서 이동을 했다. 이날 기병대원들이 흘로바네의 두 고지를 있는 산길에서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이후 이 산길에는 ‘악마의 고개(Devil’s Pass)’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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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 전사의 습격으로부터 부하를 구하고 있는 불러



낮은 고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러셀은 ‘고갯길(nek)’로 올라가라는 우드 대령의 전갈을 받게 된다. 러셀은 이를 두 고지를 연결하는 고개가 아니고 10km떨어진 다른 고갯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병사 수명만 남겨두고는 다른 방향으로 떠났고 이 때문에 대기하고 있던 러셀 부대의 지원을 예상했던 불러는 텅 빈 곳에 남아있는 몇 명의 병사들만 만날 수 있었다. 계속하여 높은 고지에서 쫓겨온 불러는 이대로 계속 몰리다가는 몰살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부대원들 일부를 후위(後衛)로 편성한다. 그리고 좁은 고갯길에서 후위 병사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몰려드는 줄루 전사들에게 조직적인 사격을 가했다. 이리하여 미리 후퇴한 불러의 기병대원 대부분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줄루 전사들의 수는 너무 많았고 불러의 후위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줄루 전사들의 진격이 너무 빨라 일부는 제때 후퇴하지 못하였고, 줄루군에 포로로 잡힌 영국병사들은 벼랑으로 내던져져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어떤 병사들은 벼랑에 내던져지기 보다는 잡히기 직전 총으로 스스로 자결하였다. 이를 본 불러는 말을 타고 여러 차례 적들의 한가운데로 돌진하여 병사들을 구하는 용맹을 보였다. 영국군을 지원하러 나선 보어인 지원병들도 불러와 함께 싸우다 많은 피해를 입었고 그 지휘관인 페트루스 유이스(Petrus Uys) 역시 목숨을 잃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 700명중 백인 정규군과 흑인 지원병들을 포함하여 전사자가 200명이 넘었고 1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에 비하여 줄루군의 전사자 수는 영국군보다도 적었다. 살아남은 영국군은 줄루 본군에 몰려 겨우 산을 내려와 캄불라 고지 방면으로 그야말로 꼬리가 빠져라 뛰었다. 그리고 줄루 전사들은 도주하는 영국군을 쫓으면서 계속하여 괴롭혔고 승자로서 의기양양하게 캄불라로 향하였다. 그러나 흘로바네의 작은 승리가 줄루전쟁의 전세가 뒤집히는 파국의 전조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역전: 속절없이 꺾이는 줄루 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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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루군은 호기롭게 캄불라의 영국군을 공격하였으나 영국군은 이미 캄불라에 철통 같은 요새를 구축한 뒤였고 줄루군은 몰살을 당하게 된다.



캄불라로 후퇴한 영국군은 불안한 가운데 밤을 보냈고 우드 대령은 아침이 밝자마자 정찰대를 내보냈다. 외곽지대로 나온 영국군 정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줄루 본군을 포착하고 즉시 본영으로 전령을 보내어 대규모의 적군이 이동중임을 보고하였다. 정찰대는 정찰와중에 의외의 발견을 하였는데 줄루 본군에서 도망 나온 줄루 ‘탈영병’을 만난 것이다. 정찰대는 이 탈영병을 캄불라 본영으로 데리고 왔고, 줄루군이 언제 공격할 지 몰라 다소 불안해 하는 영국군에게 줄루 전사들의 공격이 점심시간 즈음하여 이루어질 것이라 말했다. 정확한 공격시간을 알게 된 우드 대령은 일단 병사들에게 식사를 하게 한 다음 전투준비에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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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이 있던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캄불라의 지형. 영국군은 감제고지에 올라 시야를 완전히 확보한 상태였고 줄루군의 무모한 돌격은 파멸로 이어진다.



높은 고지에 본영을 구축한 영국군 정규병 1200명과 식민지 지원병 800명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줄루 본군이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전투위치로 재빨리 이동하였다. 탄약의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재앙을 맞이했던 이산들와나에서와는 달리 캄불라에서는 탄약을 병력배치예상에 따라 미리 옮겨놓았기 때문에 효과적인 집중사격이 이루어졌다. 한편 영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야포 6문중 2문의 일명 ‘당나귀포(mule guns)’는 사령부가 있는 언덕 위에 배치되었고 4문의 7-파운드 야포(seven pounders)는 본(本) 라거와 사령부 언덕 사이의 평지에 일렬로 세워져 지원사격을 준비하였다.

한편 캄불라 고지 인근에 도착한 줄루 본군의 총사령관인 음니야마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일단 줄루국왕 세츠와요는 이미 영국군을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고 만약 공격하려거든 영국군을 개활지로 유인 후 공격할 것을 매우 강력히 주문하였다. 아울러 음니야마 스스로의 판단으로도 고지를 올려다보면서 하는 공격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깨닫고 섣불리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줄루군 특유의 결전주의와 함께 대부분 젊은 청년들로 이루어진, 들소 대형에서 “뿔”에 해당하는 하는 측면부대의 전사들은 그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줄루부대가 캄불라를 향하여 공격대형을 취하였고 왼쪽 뿔은 남쪽으로, 오른쪽 뿔은 캄불라 고지의 북쪽으로 향했다. 본대와 장년 베테랑들로 구성된 예비대는 천천히 영국군의 정면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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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요새를 구축한 영국군의 화력에 속절없이 꺾이고 있는 줄루 본군. 줄루 본군은 이 전투로 인하여 와해되는 불운을 맞는다.



전투는 약 1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줄루군이 의외로 천천히 진격해오자 우드는 다소 조급해졌다. 그의 목표는 어찌되었건 줄루군을 요새근방까지 끌어들인 후 자신이 단단하게 구축한 진영의 화력을 이용하여 줄루군을 격멸한다는 것이었는데 줄루군의 움직임이 지지부진했던 것이다. 이에 우드는 불러 중령에게 명하여 기마군을 이끌고 나아가 줄루군을 도발하도록 하였다. 불러는 북쪽으로 진격해오고 있던 줄루군에게 다가가 마구잡이로 사격을 가하였고 그렇지 않아도 안달이 난 줄루군 우익의 젊은 전사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을 시작하였다. 줄루군 돌격의 기세가 워낙 맹렬하여 거짓 도주하던 불러의 기병대는 따라 잡히지 않으려고 전력질주를 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불러의 기병대는 무사히 본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이 때를 맞추어 본진 방어선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 90경보병 연대의 소총과 뒤에 있던 7파운드 야포가 불을 뿜었다. 줄루군 전사들이 방어선에 너무 가까이 접근해있었고 병력이 밀집이 되어있어 빗나가는 총탄이나 포탄이 없었다. 줄루군은 넓게 트인, 거의 개활지나 다름없는 오르막을 달려 올라오고 있었고 올려 여기에 90연대는 달려오는 줄루군을 훤히 내려다보면서 집중사격을 가했기 때문에 접근전 위주의 줄루군으로서는 그 화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줄루군 우익은 단 한 차례의 돌격에 파멸적인 손실을 입었다. 대개 한 번의 돌격이 꺾인 경우 잠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하기 마련이지만 줄루군 우익이 입은 피해는 너무나 컸다. 이들의 호기롭던 기세는 그 자리에서 꺾였고 무려 600미터를 무질서하게 물러났다. 줄루 임피의 결전주의와 빠른 돌격은 사실 수많은 승리를 가져다 준 필승의 전술이었지만 적어도 캄불라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수백미터의 넓은 오르막에서 장사정 무기에 완전히 노출된 체 행하는 돌격은 필승의 전술이 아니라 자살행위였다. 줄루군 우익은 사상자가 너무 많아 사실상 그 전투력을 상실하였고 이후 전투에 그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

북쪽 방면에서의 손쉬운 승리로 인하여 우드는 북쪽에 배치된 병력을 상황에 따라 보다 융통성있게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남쪽으로 이동한 줄루 좌익은 길이 진흙밭이라 이동에 다소 어려움을 겪었지만 동시에 장애물도 많아 줄루 좌익은 산등성이를 넘을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산등성이를 넘는 지점부터 라거가 있는 지점까지도 수백 미터였고 줄루군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던 제 13경보병 연대 1대대는 즉시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한편 동시에 요새의 정면에 탈취한 소들을 모아놓았던 크랄에도 줄루군의 공격이 진행되었는데 우드는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소들까지 지킬 여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이 크랄을 지키고 있던 병력을 본진 쪽으로 철수시켰다. 줄루군은 일시적으로 영국군에게 빼앗긴 소들을 되찾았다.

이후 줄루군은 잠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총공격을 감행하기 위하여 고지 아래쪽에 있는 분지에 모였는데 이를 본 우드는 90 경보병 연대의 해켓 소령(Major Hackett)에게 고지의 가장자리로 이동하여 분지에 결집한 줄루병력에 대한 사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고지 건너편의 언덕과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크랄에서 줄루군 전사들이 이산들와나에서 노획한 영국군 소총을 마구 난사하는 바람에 영국군의 선제공격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공격에 나섰던 헤켓 소령은 눈근처에 파편이 튀면서 눈이 멀고 그의 부관은 피격 당하여 죽었다.

이윽고 줄루군의 ‘몸통’, 즉 본대와 좌익에 의한 총공격이 이어졌다. 앞의 들판 전체를 뒤덮는 총공격이었고 줄루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워 영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탄약도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아 허둥대던 이산들와나의 영국군과는 달리 캄불라의 영국군은 이미 줄루군의 대규모 공격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넓게 트인 오르막을 가로질러 공격하는 줄루군에게 2개 연대 병력의 소총과 6문의 야포가 불을 뿜었다. 무자비한 총탄과 포탄 세례에 쓰러지는 줄루 전사들의 수는 늘어만 갔다. 오후 약 5시반경에 이르러 줄루군은 더 이상 공격할 힘이 없었다. 앞서 공격하던 전사들은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오르막을 뛰어오르느라 너무 지쳐있었다. 아무리 인두나들이 소리치고 욕을 해도 공격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동료들이 계속하여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사기도 바닥을 헤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줄루군 임피는 무질서한 후퇴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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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기병대가 캄불라에서 패주하는 줄루 전사들을 추격하고 있다.



줄루군이 힘없이 물러나는 것을 본 우드는 이를 단순히 지켜보기 보다는 역격(逆擊)을 감행하기로 하고 불러(Redvers Buller)에게 식민지 기병대를 이끌고 나가 후퇴하는 줄루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불러의 기병대는 전속력으로 달려 힘없이 후퇴하는 줄루군의 후미를 따라잡았다. 전 날 흘로바네에서 줄루군에게 많은 동료들을 잃은 기마대원들은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듯 줄루 전사들을 강하게 몰아쳤다. 그 자리에 서서 싸우려는 전사들은 주저 없이 쏘아 버렸고 부상당하여 쓰러진 줄루 전사들에게도 자비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죽였다. 이 맹렬한 추격은 10km가 넘게 이어졌고 동시에 요새에 남아있던 병사들은 주변을 수색하여 부상당한 체 쓰러져있는 줄루 전사들을 죽였다. 이산들와나에서 줄루군이 영국군 부상병들을 모조리 죽인데 대한 복수였다.

캄불라 전투가 끝난 후, 요새 근처에서만 800여명이 넘는 줄루군의 시신이 널려있었고 후퇴과정에서 영국군에게 죽임을 당한 줄루군, 그리고 부상을 당한 후 후퇴하는 동료들을 찾지 못하고 떠돌다가 죽은 수를 합하면 전사자 수는 2천에 달하였다. 그리고 그 외에도 1000여 명이 넘는 줄루 전사들이 큰 부상을 입고 불구가 되거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3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줄루군에 비하여 영국군의 사상자는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하여 83명에 불과하였다.

캄불라에서 줄루군은 사상자의 수도 수지만 무엇보다도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는 전사들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다. 비록 로크스·드리프트의 큰 패배가 있었기는 하지만 이는 공격허가도 받지 않은 지대(支隊)가 영국군을 함부로 공격하다가 당한 것일 뿐 왕군(王軍)은 여전히 건재하였다. 그러나 캄불라에서 영국군을 공격한 줄루군은 줄루왕국의 총리대신이 지휘하는 본군이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훈련이 철저히 되어있는 최정예의 임피들이 영국군이 구축한 요새 앞에서 철저히 격파된 것이다. 훈련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수적으로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이는 의문의 여지없는 참패였다. 오히려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자랑했지만 유리한 지형과 화력의 조화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캄불라에서 철수한 총리대신 음니야마는 전사들을 독려하여 본군을 유지하려 하였지만 이미 전사들은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었다. 승리의 가망이 없는 무의미한 전쟁에서 죽기가 싫었다. 이들에게는 국왕의 전사들로서의 자부심을 외치는 총리대신의 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줄루 전사들은 앞다투어 집으로 돌아갔다. 이산들와나에서 영국군을 전멸시키고 케이프 식민지를 공포에 떨게 하였던 무적의 줄루 본군은 이처럼 어처구니 없이 와해되어버렸다.

캄불라에서의 한 판 승부로 줄루전쟁의 전세는 일거에 역전되었다. 줄루 본군이 와해되면서 줄루왕국의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줄루왕국



만약 캄불라 전투가 줄루왕국 몰락의 결정타였다면 그 다음에 벌어진 음군군들로부 전투와 에쇼웨 공방전은 줄루 왕국을 회복불능의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다. 사실 줄루국왕인 세츠와요는 이산들와나에서의 승리가 영국과의 협상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영국군에게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히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고 줄루 왕국의 존속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오산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산들와나에서의 패배를 국가적 자존심 문제로 받아들이고 지휘관을 교체(켈름스포드 → 월즐리)해서라도 전쟁의 끝을 보려고 하였다. 소규모 전투에서 원주세력이 패한 제국주의 국가가 비용 때문에 전쟁을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국가적 자존심을 앞세워 총력전으로 나오게 된다. 근대국가의 행정력과 공업생산력을 앞세운 제국주의국가가 총력전으로 전환하게 되면 사실 원주세력의 패배와 몰락은 거의 정해진 수순이다.

자존심이 상한 것은 영국 정부뿐만이 아니었다. 현지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켈름스포드경도 지휘관으로서의 명예가 달린 문제였다. 켈름스포드는 절치부심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새 지휘관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 하였다. 새 지휘관이 케이프타운에 도착하기도 전에 현장을 지휘한다며 더번(Durban)으로 떠났고 월즐리가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후에도 그 전문을 모조리 무시하며 전장으로 달렸다. 월즐리 역시 케이프를 떠나 더번으로 향하면서 계속하여 켈름스포드에게 답을 요구하였지만 켈름스포드는 못 들은 체 흑인과 백인 병사 약 6000명으로 이루어진 혼성부대를 이끌고 복수전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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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쇼웨로 향하고 있는 켈름스포드의 2차 침공군 행렬



켈름스포드의 일차적인 목표는 그와 함께 1차 침공에 나섰다가 이산들와나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고립된 부대들을 구출하고 합류하는 것이었다. 이중에서 피어슨 대령(Col. Pearson)의 제 1지대 약 2천의 병력이 에쇼웨(Eshowe)에서 줄루본대에 포위되어있었기에 피어슨 지대에 대한 구출작전이 결정되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켈름스포드는 에쇼웨에 대한 작전을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북쪽에 있던 우드 대령에게 전갈을 보내 양동작전을 지시하였고 이는 의외의 성공을 거두어 줄루왕국의 본군이 우드대령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줄루본대는 캄불라에서 우드대령의 부대에 대패를 당하게 된다. 한편 본군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전진기지격인 투겔라(Tugela)강가의 테네도스 요새(Fort Tenedos)에서 출발한 켈름스포드는 이산들와나의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최대한 신경을 썼다. 줄루군이 선호하는 넓은 초원지대를 피하느라 먼 길을 돌아서 갔고 먼 길을 돌아가면서도 저녁마다 라거 진형을 완성한 후에야 휴식을 하였다. 아울러 이때는 아직 우기에 내린 비 때문에 강물이 불어난 체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 때문에 새로이 구성된 켈름스포드의 본대의 진격속도는 형편없이 느려졌다. 3월 29일에 테네도스 요새를 출발한 본군은 말로 힘껏 달리면 하루 정도면 갈 수 있는 길을 가는데 무려 4일이나 걸렸다. 이윽고 이들은 4월 1일에 에쇼웨의 언덕이 바라보이는 인예자네(Inyazane)강가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줄루의 고위귀족이자 소추장(小酋長)인 소모포 키지칼라(Somopho kiZikhala)인가 이끄는 1만 2천의 줄루군은 켈름스포드의 군이 에쇼웨에서 포위된 피어슨 부대와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켈름스포드의 군을 예의주시하며 기습의 기회를 노렸으나 켈름스포드가 매번 철저한 수비조치를 취하는 바람에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줄루군 역시 로크스-드리프트(Rorke’s Drift)에서의 패배를 반복하지 않으려 하였고 라거를 이룬 영국군 진영을 습격하려 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이미 캄불라에서의 승리로 사기가 올랐고 줄루 국왕군을 해체시켰다. 이제 목표는 줄루왕국의 수도인 울룬디였다. 줄루군을 이를 막으려고 움직였고 이제 승부를 피할 길은 없었다.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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