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차 이프르 전투 [2] - 지옥의 참호전을 개시한 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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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5회 작성일 16-02-0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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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앤트워프 공략 당시의 독일군. 이처럼 독일군은 일단 부대가 멈추면 참호 구축을 당연시 하였다.



1차대전, 특히 서부전선의 상징물이 바로 참호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세를 지향하던 독일이 먼저 방어선을 구축하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사실 전쟁 초기에 밀려나기 바빴던 연합군은 땅을 파고 숨고 자시고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전술 사상과 평소 훈련의 차이였다. 독일은 공격이든 후퇴든 일단 부대가 멈추면 진지를 구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평소에도 훈련을 그렇게 하였다.




멈추어 버린 전선



반면 연합군, 특히 나폴레옹 시대의 돌격 제일주의 사상을 신봉하던 프랑스군은 이를 무시하였다. 그래서 마른에서 퇴각한 독일군이 엔 강 일대의 고지들을 점령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자 연합군은 더 이상 추격할 수 없었다. 진지 속에 틀어 박혀 기관총을 난사하는 독일군의 방어전에 오히려 노출되어 있던 연합군의 피해만 늘어났다. 결국 연합군도 맞은편에 땅을 파기 시작하면서 전선은 서서히 참호 지대로 변해갔다.

이처럼 시간이 갈수록 전선이 공고해지자 조프르와 팔켄하인 모두가 엔 강과 바다 사이에 이르던 160여 킬로미터의 무주공산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던 것은 너무 당연하였던 것이다. 결국 북서 방향의 북해를 향해 전선이 계속 확대되었고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전선도 점차 단단한 참호 지대로 변하였다. 마침내 앤트워프 전투가 끝난 10월 중순 경 해변의 뉴포르(Nieuport)에 이르러서야 바다를 향한 경주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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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향한 경주의 종착지인 뉴포르 해변



하지만 양측 모두 전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전쟁을 시작한 이상 당연히 승리하여야 했으므로 곧바로 상대의 방어선을 돌파하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이런 대치를 그저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비록 7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서부전선이 갈수록 깊게 파여지고 있었지만 앞으로 4년 동안 계속 이곳에서 머무를 것이고 그리고 엄청난 살육과 파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하였다.




눈엣가시



이처럼 전방에서 독일과 연합국이 차례차례 전선을 확장하여 나갈 무렵 독일에게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였다. 벨기에 북쪽 스헬데(Scheldt) 강 하구 우안에 위치한 앤트워프 때문이었다. 지금도 유럽의 4대 무역항으로 꼽힐 만큼 중요한 항구 도시인 이곳은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후방에 고립된 상태였지만 벨기에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아직 독일이 점령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전선 배후에 연합군의 거점이 남아있다는 것은 독일에게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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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발발하기 직전인 1914년 8월의 스헬데 강 하구의 모습



1차대전이 개시되었을 때, 독일은 벨기에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프랑스로 향하는 통로로 생각하였을 뿐이었고 군사적으로도 쉽게 제압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많이 지체하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벨기에의 저항이 격렬하여 상당히 곤혹을 치렀다. 프랑스로의 진입이 시급하였던 독일은 일단 길목에 위치한 벨기에 남부의 리에주(Liege)와 몽스(Mons)를 개전 초에 신속히 점령하였지만 다른 곳을 신경 쓸 수 없었다.

더불어 비록 오래되었지만 48개에 이르는 요새와 보루를 이용한 벨기에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프랑스가 목적이었던 독일은 앤트워프의 정리는 천천히 하여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공인 제1군 예하의 제3예비군단으로 하여금 일단 견제만하도록 조치하고 나머지 주력 부대들은 도시 외곽을 지나 프랑스로 몰려갔다. 사실 이때만 해도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만 예비역으로 이루어진 1개 군단만으로 충분히 앤트워프의 점령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앤트워프는 두 달 가까이 난공불락의 상태로 남아 있었고 프랑스 북부에 전선이 고착화되자 순식간 뒤편에 남겨진 고립된 섬이 되어 버렸다. 이제 형편이 바뀐 독일은 눈에 가시인 이곳을 정리하여야 했고 연합국은 어떻게든 이를 살려서 적 후방에 난공불락의 교두보로 만들고자 하였다. 마침내 9월 28일, 준비를 마친 독일이 집중 포격과 함께 공세를 개시하였고 장장 5일간에 계속된 포격으로 인하여 앤트워프 외곽의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르 강의 혈투



벨기에가 앤트워프 포기를 심각하게 고려하자 영국 해군장관 처칠(Winston Churchill)이 10월 3일, 이 도시를 직접 방문하여 곧바로 지원군을 보내 줄 테니 계속 저항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벨기에가 저항하면 할수록 전선의 압박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4개 사단의 증원군을 약속하였지만 정작 10월 6일까지 실제로 현지에 도착한 부대는 영국 해군사단(Royal Naval Division)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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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격으로 파괴 된 딕스뮈드의 교회. 앤트워프를 포기한 연합군은 뉴포르-딕스뮈드에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이것은 서부전선의 최종 완결판이 되었다.





벨기에군을 이끌고 수공을 펼치는 초강수까지 두며 독일에 저항한 벨기에의 알베르 1세 국왕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한 벨기에군은 이제르(Yser) 강을 따라 형성된 뉴포르-딕스뮈드(Mixmude) 방어선 뒤로 철수하였고 앤트워프는 10월 10일 마침내 함락되었다. 그 동안 앤트워프를 공략한 독일군도 최정예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벨기에군을 압도하고 있었고 화력은 절대 우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군은 무려 6주 동안 처절하게 앤트워프를 사수하여 나갔고 그만큼 프랑스와 영국은 방어에 혜택을 보았다.

앤트워프의 함락으로 벨기에는 국토의 90퍼센트 이상을 점령당하였다. 이것은 국력의 90퍼센트를 빼앗긴 것과 같은 의미인데 이 정도라면 패망을 하였다고 보아도 된다. 하지만 약소국 벨기에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르 강가에 방어진을 펼친 6만의 벨기에군은 알베르(Albert I) 국왕의 지휘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0월 22일, 독일이 테르바트(Tervaete)를 점령하자 다시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 전투에서 벨기에는 무려 2만의 병력을 상실하였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알베르 국왕은 놀라운 결단을 내렸다. 10월 27일, 이제르강 하구의 퓌르네(Furnes) 수문을 열어 뉴포르-딕스뮈드 가도 동쪽의 저지대를 침수시키는 초강수를 둔 것이었다. 수위가 상승하자 이곳까지 진격한 독일 제3예비군단과 제22예비군단은 서둘러 철군하여야 했다. 이제 남은 공간은 딕스뮈드와 라 바세(La Bassee) 사이에 놓인 이프르(Ypres)였다.




운명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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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르에서 독일군이 노획한 영국군 대포 <출처: Library of Congress (George Grantham Bain Collection)>



리(Lys) 강 북쪽에 위치한 이프르는 중세에 직물 제조로 영화를 누리기도 했던 유서 깊은 도시로 프랑스와 벨기에를 거쳐 네덜란드와 독일을 동서남북으로 연결하는 교통 요지다. 14세기 백년전쟁 당시에는 영국에 의해, 17세기에는 프랑스에 의해 처절히 파괴되었을 만큼 부근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항상 많은 피해를 입고는 했다. 서부전선이 고착화되고 공교롭게도 전선이 이곳을 지나게 되자 또 다시 전쟁의 화마를 입을 운명이 되었다.

이곳을 16만의 영국 원정군이 담당하였는데, 여기에는 조금 사연이 있다. 9월 말까지 영국 원정군은 엔 강 일대의 프랑스 제5군과 제6군 사이에 있었다. 그런데 영국 원정군 사령관 프렌치(John French) 경이 본국으로부터의 보급과 기병대의 활동 편이를 내세워 좌익으로 원정군을 이동하겠다고 주장하였고 이것이 타당하다고 인정되어 10월 1일 프랑스 제6군과 지역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곳이 전쟁 끝까지 가장 격렬한 무서운 싸움터가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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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4군을 지휘한 알브레히트 공작. 그의 부대는 1914년 독일군 중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돌파를 노리는 독일은 알브레히트 공작(Albrecht, Duke of Württemberg)이 지휘하는 20만의 제4군이었다. 전쟁 발발 당시 제4군은 아르덴느(Ardennes) 일대에 배치되어 전선 중앙을 담담하였는데, 전선이 바다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며 확장 되어 나가자 이곳으로 이동 전개하여 늘어난 전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두 부대는 애당초 전혀 예정하지 않았던 새로운 곳에서 거대한 일전을 벌일 운명이었다.

그런데 모두 상황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바다를 건너와 벨기에에서부터 독일군을 저지하여 프랑스까지 밀렸다가 다시 반격하고 이후 주둔지를 바꾼 영국군의 피로는 실로 극심하였다. 독일군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미 개전과 동시에 동원 예비군을 대량 투입하였기에 이후에 충원된 병력의 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상태에서 10월 19일 이프르 전투가 개시되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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