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차 이프르 전투 [3] - 지옥의 참호전을 개시한 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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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32회 작성일 16-02-0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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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전투 환경



영국 제1군단이 빈 공간이라 생각되던 이프르 북부의 랑에마르크(Langemarck)로 진격을 시도하다가 공교롭게도 같은 통로를 이용하여 영국군을 공격하려던 독일 제23, 26예비군단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곧바로 교전이 벌어졌는데 서로 공격에 나서다가 조우한 상황이라서 순식간 뒤엉켜 버렸다. 전력이 뒤졌던 영국군은 병력을 축차 투입하는 초강수까지 두면서까지 밀리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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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 직후 랑에마르크의 초토화 된 모습



이때 독일은 엔 강에서 북해에 이르는 약 200킬로미터의 전선에 제4군 외에도 좌익의 제6군과 예비대를 포함하여 모두 22개 군단을 투입하였다. 반면 연합국은 와해 직전이던 벨기에군을 포함한 14개 군단만 동원이 가능하여 공세로 나가기가 사실 버거웠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영국군은 급하게 대륙으로 이동하느라 중장비의 전개가 늦어져 포병 같은 경우는 5 : 1 정도로 완전히 열세였다.

애당초 벨기에로의 진격을 염두에 두고 이곳으로 주둔지를 옮겼지만 결국 영국군은 공격은 커녕 그 동안 차지한 곳이라도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참호를 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국군이 원해서 새로 담당한 플랑드르는 해수면보다 낮아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솟아나는 지역이었고 거기에다가 강수량도 많았다. 전쟁이 쾌적한 조건에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영국군의 전투 환경은 상당히 문제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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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이 담당하였던 플랑드르 지역은 저지대 습지라서 참호를 구축하여 전투하기에는 환경이 상당히 열악하였다. 때문에 많은 비전투 손실이 있었다.



물과 진흙 그리고 각종 오염 물질로 뒤범벅된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말미암아 참호족(塹壕足 Trench Foot)과 폐렴 등의 질병에 의한 비 전투 손실이 어마어마했다. 1차대전 내내 서부전선의 참호전은 끔찍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프르를 정점으로 하는 플랑드르 일대의 전선은 자연 여건이 나빠 가장 비참하였다. 독일도 비슷한 환경이었지만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던 관계로 영국군 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었다.




학살극



랑에마르크에서의 격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독일은 이프르 남부의 아르망티에(Armentières)에서도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다. 독일은 우세한 포병으로 영국군 진지를 맹타한 후 진격을 개시하였으나 순식간 거대한 진흙 웅덩이로 바뀐 피탄 지역은 전진하는 보병이나 기병대의 발목을 잡기 일쑤였다. 물이 가득 찬 참호에서 고개를 박고 간신히 포격을 피한 영국군은 다가오는 독일군을 차례차례 처단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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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의 장소였던 아르망티에. 수많은 민간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아르망티에 공격이 난항을 격자 독일은 좀 더 남쪽인 게루벨트(Gheluvelt)에서 돌파구를 열기로 결심하였다. 한마디로 뚫릴 것 같아 보이는 곳이면 무조건 파상 공세를 펼친 것이었다. 10월 31일, 독일군에 의해 영국군 전초들이 피탈되며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이번에도 독일군은 돌파구만 열어 놓고는 지쳐서 진격이 멈추었다. 결국 영국군 제2우스터셔(Worcestershires) 연대의 반격으로 독일군은 게루벨트에서도 물러났다.

이처럼 곳곳에서 소모전이 극심해지자 양측 모두 예비대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필요한 곳에 얼마나 빨리 먼저 예비대를 투입하는가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 시작하면서 전선의 변동이 없이 오로지 혈과 철의 소모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1차대전이 지옥으로 변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영국은 본토에서 후속 전개한 예비부대와 갓 도착한 인도군까지 전선에 투입하였을 만큼 다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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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에마르크 전투 당시 밀집대형으로 전진하는 독일군. 이프르 일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많은 독일의 대학생 자원병들이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당했다. <출처: Bildarchiv Preußischer Kulturbesitz>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프르 전투에는 독일 대학생 자원병들이 대거 투입되었는데 부족한 훈련으로 말미암아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밀집대형으로 돌격하다가 영국군의 포격 세례를 받고 한 번에 수 천명씩 학살당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는 전쟁 내내 독일 국민에게 애국심을 강조하는 사례로 소개되었고 종전 후에는 나치가 적개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프르에서 학살당한 어린양들(Kindermord von Ypern)’이라는 신화로 조작하였다.




결과



아직까지는 전력의 우세를 보이고 있던 독일이 전선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쥐고 있던 시기여서 영국군은 근근이 공세를 막아내기에만 급급하였다. 11월 초에 프랑스군이 측면에 증강되면서 영국군의 부담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이었다. 게루벨트에서 밀려난 독일군이 11월 11일, 최정예 프로이센 근위사단을 앞세워 메넹(Menen)에서 이프르로 이어지는 가도를 따라 공격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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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최정예 부대인 프로이센 근위사단까지 투입하여 이프르 공략에 나섰으나 점령에 실패하였다.



그런데 독일은 아직도 전술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군 못지않게 나폴레옹 시대의 돌격 제일주의 사상을 신봉하고 있던 독일군은 지난 10월 내내 엄청난 피해를 자초한 밀집대형 돌격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선제 공격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전쟁 초기에는 이런 돌파가 효과적이었지만 강력하게 구축된 방어 진지 정면으로 빽빽이 몰려다니며 전진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도 같았다.

보불전쟁 이후 유럽대륙에서 40여 년간 강대국 간의 전면적인 전쟁이 없다 보니 전술 사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던데 비하여 그 동안 무기는 엄청나게 진보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아군의 우세함을 일부러 적에게 보이기 위해 예전처럼 몰려다녔지만, 정작 총포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하면서 좋은 표적이 되어버렸다. 특히 방어전의 총아인 기관총에게 이러한 밀집대형은 더할 수 없는 전과 확대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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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넹 전투에서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를 치료하고 있는 모습. 영국은 후방의 비 전투 요원들까지 나서서 독일군을 막아내었다.



후방의 취사병, 행정병까지 모두 일선에 투입한 영국군의 격렬한 방어에 막혀 독일의 전진은 지체되었고 여기에 포격이 머리 위에 떨어지자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또 다시 독일은 돌파구만 열고 제풀에 주저앉으면서 결국 수녀의 숲(Nonne Bosschen) 뒤로 밀려나가야 했다. 이처럼 최강의 정예 부대까지 투입하였지만 독일은 참혹한 패배를 당하며 더 이상 이프르에서 공세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의의



11월 20일이 되자 전투는 막을 내렸다. 한 달 동안 이프르 일대에서 벌어진 연이은 격전에서 독일군은 8만 명을 잃었고 영국군은 5만 4천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1914년,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로써는 가장 참혹한 수준이었다. 이런 피해의 가장 큰 이유는 고루한 돌파 방법을 고수하였던 지휘부의 책임이 가장 컸는데, 문제는 그때까지도 이러한 잘못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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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제7사단이 독일군을 막아낸 장소에 세워진 전적비 <출처: (cc) [email protected] at Wikipedia.org>



독일이 전력이 앞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패하였던 가장 큰 이유는 참호전이 공자(功者)보다 방자(防者)에게 절대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기동전은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전사에는 이 일련의 전투들을 제1차 이프르 전투라고 표기하는데 이후의 전투들에 비한다면 오히려 덜 잔인하였다. 앞으로 더 많은 피를 흘리고 전선은 더욱 참혹하게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아무도 몰랐다.

이제 전쟁 전에 피아가 세워 놓았던 모든 시나리오는 무효가 되었다. 특히 마른 강에서 후퇴하였을 때는 물론, 엔 강에 진지를 구축하였을 때까지만 해도 전선의 정체를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던 독일의 전략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팔켄하인은 당장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서부전선의 상황을 인정하고 4개 기병사단과 8개 보병사단을 차출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고전을 하고 있던 동부전선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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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이프르 전투(확대 부분)가 끝나면서 760킬로미터의 서부전선은 거대한 참호지대로 변하였다.



많은 사상자를 낸데다 상당수의 군수품마저 소모한 상태로 11월 말에 첫 눈이 내리자 양측 모두 더 이상 공세 행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스위스에서 북해에 이르는 총 연장 760킬로미터의 참호선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완벽하게 연결되었고 점차 단단해 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 형성된 참호 지대에서 앞으로 전쟁은 4년간 계속되었고 갈수록 더욱 격렬하게 바뀌어 갔다. 그러한 앞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지옥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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