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키예프 전투 [1] - 사상 최대의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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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49회 작성일 16-02-0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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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직후에 찾아 온 고민



1941년 8월 8일, 독일 남부집단군(Heeresgruppe Süd)이 20여 만의 소련군을 소탕하고 우만(Uman)을 함락시키자 동부전선에 커다란 돌출부가 생겼다. 독일이 흑해 연안의 요충지인 오데사(Odessa)를 제외한 서부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석권하면서 프리페트(Pripet) 소택지(沼澤池) 남쪽에 위치한 키예프 일대가 독일군 후방으로 툭 튀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안에 약 20만 정도의 소련군이 집결된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독일의 예상과 달리 돌출부에는 무려 80여 만의 소련군이 몰려 있었다. 우크라이나를 담당하던 소련 키예프 특별관구(Kiev Special Military District) 소속의 잔여 병력 대부분이 밀려나 이곳에 집결된 상태였다. 예상보다 많은 거대한 소련군이 몰려있음이 확인되자 남부집단군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키예프를 먼저 소탕하냐 아니면 외곽을 봉쇄해 놓고 드네프르(Dnepr) 강까지 그냥 나가야 하나 하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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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만 함락으로 인하여 키예프 일대에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었고 엄청난 소련군이 이곳을 사수하러 집결하였다.



비록 제6군이 효과적으로 키예프를 견제하고 있었지만 80여 만에 이르는 소련군을 한 개 야전군만으로 섬멸하기는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이곳을 함락시키려면 앞으로 달려나간 남부집단군 전력 대부분이 진격을 멈추고 뒤로 돌아 회군하여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우만에서 봉쇄선을 겨우 탈출하여 우크라이나 동남부로 밀려나 기진맥진해 있던 소련 남부전선군(Southern Front) 잔여 부대의 추격이 불가능해지고 이들이 기사회생할 가능성이 컸다.

조금만 더 추격하여 일격을 가하다면 이들을 완전히 궤멸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독일은 이쪽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배후인 키예프에 엄청난 소련군을 남겨두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도 찜찜하였다. 견제하고 있는 제6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소련군이 언제 키예프 밖으로 튀어 나와서 동쪽으로 전진하는 남부집단군의 뒤통수를 치지 말라는 법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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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에 들어가는 소련 남부전선군. 하지만 1941년 8월 우만에서 대패를 당하며 드네프르 강까지 후퇴하여야 했다.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선택



그런데 정작 좌우에 있던 인접 부대가 무너지며 홀로 적진에 고립 된 상황인 키예프에 있던 소련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특히 북부의 민스크(Minsk)와 스몰렌스크(Smolensk), 남부의 우만에서 연이어 있었던 처절한 패배 소식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불안은 엄청났다. 더구나 키예프는 반소 감정이 유독 강한 곳이어서, 이곳에 집결한 소련군의 전투 의지도 그다지 높지 않았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되었다.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크게 동서로 나뉘어지는데, 전통적으로 키예프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는 친 유럽 경향이 강하고 동부는 러시아 계 이주민들이 많이 정착하여 친 러시아 성향이 크다. 특히 1932~1933년에 우크라이나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소련 정권의 방임에 의해 수백만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아사한 홀로도모르(Holodomor)와 이후 계속된 대 숙청의 공포 정치로 인하여 소련 정권에 대한 반감은 대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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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대기근 당시 길거리에서 아사한 주검을 무심히 지나는 모습. 당시 약 500만 명이 이상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반소 의식이 상당하였다.



소련군은 내심 반소 의식이 팽배한 키예프에서 빠져 나와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안전지대라고 판단한 드네프르 강을 건너 동부 우크라이나로 탈출하고 싶어 하였다. 만일 그렇게 하였다면 독소전쟁사는 상당히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스탈린은 현지사수를 명하였고, 동시에 히틀러는 수많은 독일군 지휘관들이 반발한 결정적인 선택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두 독재자의 결정은 이후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독소전 초기에 연이은 엄청난 대승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지만 독일은 이후 전쟁의 흐름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되는 몇 번의 실기(失期)를 하였다. 물론 결론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지 선택의 결과가 이후 전쟁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당시에는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비록 엄청난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선택이 두고두고 격론의 주제로 회자되는 대표적 사례가 앞으로 소개할 키예프 전투(Battle of Kiev)다.




남부집단군의 고민



아직 동쪽의 후방으로 향한 통로가 개방되어 있었지만 키예프는 적진에 홀로 고립된 형국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절망적인 이 도시를 사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키예프의 함락은 소련의 곳간인 남부 러시아로 향하는 거대한 대문을 열어놓는 모양새가 되므로 당장 방어에 불리한 형태였음에도 어떻게든 이곳을 지키려 하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전략적인 고려 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스탈린의 아집은 사상 최대의 참패를 연출하는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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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키예프 시가지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키예프 전투에서 포로가 된 소련군. 개전 초에 발생한 대부분의 포로들은 강제 노역과 병마에 시달리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스탈린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애초 독일의 예상을 뛰어넘는 너무 많은 소련군이 한 곳에 집결된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이처럼 먹음직스런 먹이를 놔두고 독일이 바바로사(Barbarossa) 작전대로 그냥 전진하기가 애매해진 것은 당연하였다. 물론 가장 좋은 결론은 키예프에 몰려 있던 소련군도 격멸하고 그와 동시에 코카서스(Caucasus)의 출입구라 할 수 있는 돈(Don) 강 하구의 로스토프(Rostov-on-Don)까지 전진을 계속하는 것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불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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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만에서 대승을 이끈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그는 키예프의 처리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이처럼 전진이냐 점령이냐는 고민 중 하나만을 선택하여야 했는데, 우만 전투가 종결된 1941년 8월 8일만 해도 이는 독일 남부집단군이 스스로 해결하여야 할 그들만의 문제였다. 당연히 사령관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의 고민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과묵하였던 그는 의중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타 집단군과의 경쟁을 생각한다면 애초 계획대로 계속 진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런 목적 때문에 애초 목표였던 키예프대신 우만을 먼저 공략한 것이기도 했다.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여 키예프를 최대한 전선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면 나중에라도 쉽게 처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실제로 동 시기에 남부집단군 작전권내에서 이런 전술을 펼친 예가 몇 건 있었다. 1941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있었던 오데사 포위전(Siege of Odessa)과 1941년 10월부터 1942년 7월 사이에 벌어진 세바스토폴 공성전(Siege of Sevastopol)이 그러하였다.




총통의 결심



그런데 전제 조건은 키예프에 있는 소련군이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독소전 초기의 소련군이 아무리 허수아비라고 하여도 무려 80여 만이 배후에 몰려 있다는 것은 결코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때문에 드네프르강 만곡부인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Dnepropetrovsk)에 다가간 선두 부대까지 돌려서라도 키예프를 공략하자는 남부집단군 일부 참모진들과 예하 부대 지휘관들의 진언도 충분히 타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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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8월 우크라이나에서 작전을 벌이던 독일군 4호 전차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결국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남부집단군의 고민을 풀기 위해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가 나서게 되었다. 둘 다 잡으려면 결론은 예비대의 투입이었는데, 전쟁개시 두 달이 경과하면서 독일군의 소모가 커지자 전 전선에서 너나없이 보충을 요구하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남부집단군에게만 지원을 하기 어려워 전선 전체를 관할하는 OKH도 쉽게 해법을 내놓기는 어려웠고 이곳에서도 심각한 갑론을박이 오고 갔다.

제2차 대전 내내 독일의 전쟁 과정에 있어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히틀러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단 한 순간이라도 독일의 작전에 그가 개입하지 않았던 경우는 없었고 오히려 말년으로 갈수록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그러한 그가 키예프를 놓고 OKH를 비롯한 상급 지휘부가 난상토론을 벌일 때 전격적으로 방향을 제시하였다. 결론은 욕심 많은 히틀러답게 두 토끼를 다 잡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제6, 17군과 제1기갑집단이 키예프를 소탕하고 제11군은 크림반도와 돈 강을 향해 계속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루마니아 제3군이 이들 사이에 발생하는 간격을 메우고, 루마니아 제4군은 계속 오데사(Odessa) 공략에 진력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히틀러도 이렇게 남부집단군을 분리하면 키예프에 몰려 있던 소련군을 일거에 소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여기서 그는 바바로사 작전을 완전히 틀어버리는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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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8월 동부전선을 방문한 히틀러. 그는 키예프부터 먼저 정리하기로 결심하였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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