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15년 서부전선 [1] - 잊혀진 그해 격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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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40회 작성일 16-02-0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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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쳐버린 군대



1914년 12월이 되었을 때 서부전선은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벨기에의 대부분과 북부 프랑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독일은 전선의 주도권을 잡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전략적 우위를 점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초기부터 밀려나기 급급하였던 프랑스는 마른(Marne)에서 회심의 크로스 카운터를 날렸지만 전세를 뒤집은 역전타는 아니었고 간신히 한숨만 돌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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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0월 말에 있었던 이제르 강 전투를 묘사한 기록화. 겨울로 접어들면서 800여 km에 이르는 서부전선은 정체되었다.



예상보다 빨리 참전하여 독일을 놀라게 만들었던 영국은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였지만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하기 곤란할 만큼 지쳐 있었다. 전쟁 직전 영국 육군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신속한 참전은 제대로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의미와 같았다. 더구나 지형적으로 불리한 구역을 담당하다 보니 서부전선 주요 참전 3국 중 가장 피해가 컸다.

원래 소수의 정예 직업 병사로 구성되어 있었던 영국군은 사격술 같은 개별 병사의 전투력은 뛰어났지만 중화기도 챙기지 못하고 서둘러 대륙으로 건너오다 보니 부대 간 전투에서 상당히 애를 먹어 무려 9만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예상을 벗어난 엄청난 손실에 놀란 영국은 인도 군단처럼 식민지 주둔군을 소환하여 투입하였고 본국은 물론 캐나다, 호주 등의 영연방국에서도 대대적인 병력 동원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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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인도 기병연대 소속의 병사. 전쟁 초기에 자원병으로 구성된 영국군은 대단히 선전하였으나 그해 겨울이 되기 전에 거의 다 소모되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영연방국과 식민지에서 부대가 차출되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덕분에 서류상으로는 8월보다 2배나 많은 40만의 병력이 서부전선에 배치되었고 본토에서는 자원하여 모집된 80만의 병력이 추가 투입을 위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넉 달 동안 정예병들이 거의 모두 소모되었기에 전투력은 이전보다 좋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난감했던 것은 숫자를 쉽게 늘릴 수 있는 병력과 달리 즉시 증산이 어려웠던 포탄과 탄약이었다.




크리스마스의 휴전



1915년 1월이 되었을 때 영국은 18파운더 포의 하루 포탄 소모량을 4발로 제한하였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어렵게 끌고 와 전선에 배치한 중화기가 정작 필요할 때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는 했다. 프랑스도 10월이 넘어서부터 전선에서 필요로 하는 포탄의 20퍼센트 정도만 생산되었을 만큼 탄약이 부족하였다. 만일 이때 독일이 공세를 가했다면 연합군이 궤멸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가들도 있지만 독일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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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9월 1일 영국 제1기병여단 소속 1개 포대가 독일 제4기병사단의 진격을 4시간 동안 상대한 네리(Nery) 전투의 모습. 시간이 흐를수록 고질적인 포탄 공급 부족으로 영국원정군은 애를 먹었다.



상대적으로 생산이 원활하였던 독일도 전선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제때 포탄을 공급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결국 이것은 그 어느 쪽도 이 전쟁이 이렇게 장기적인 총력전으로 치닫게 될 것이란 예상을 못했다는 뜻이다. 먼저 침공을 개시한 독일도 전쟁 전에 양면전을 염두에 두고 수립한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에서 불과 6주 안에 프랑스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예상했을 정도였다.

그때서야 교전국들의 모든 무기 제조 시설이 풀 가동되었지만 너무 늦은 셈이었다. 그러니 진격이 중단되고 순식간에 전선이 고착화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기도 했다. 그만큼 전쟁은 어느덧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다가온 겨울은 본의 아니게 전선에 고요함을 불러왔고 종종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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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크리스마스 당시에 양측 참호의 중간 무인지대에서 만나 환담을 하는 양측 병사들의 모습.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격렬한 전쟁 중에 있었던 보기 드문 평화였다.



플랑드르(Flandre) 부근에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던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이 그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진지에서 하나둘씩 나와 중간지대에서 선물을 주고받고 축구 경기를 벌이는 기적을 연출하였다. 예상치 못한 최전선 병사들의 일탈에 경악한 지휘부의 지시로 잠시나마의 평화는 막을 내리고 곧바로 전투가 속개되었지만 이는 크리스마스의 휴전(Christmas Truce)이라는 미담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독일의 전략 변화



이처럼 제1차 이프르 전투가 막을 내리면서 전선이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지자 양측 지휘부는 다음 전략을 놓고 고심하였다. 독일군 참모총장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영불연합군의 대응이 예상보다 격렬하자 이제 전쟁 초기에 세워 놓았던 단기전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충이 이루어지면 한시라도 공세를 재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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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제1차 이프르 전투 당시 수녀의 숲(Nonne Bosschen)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영국군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 결국 독일은 격렬한 저항에 막혀 그해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중단하였다.



예정된 스케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뿐이지 서부전선을 먼저 평정하여야 한다는 슐리펜 계획의 거시적인 부분은 아직 유효한 셈이었다. 그런데 지지부진한 서부전선과 달리 당시 동부전선에서 독일은 예상을 벗어날 만큼 잘 싸우고 있었다. 소수의 독일 제8군은 탄넨베르크(Tannenberg)에서 압도적인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둔 후 진격을 계속하여 러시아령 폴란드까지 점령하였다.

그런데 독일과 함께 싸우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상당히 고전 중이었다. 더불어 그동안 동맹국과 연합국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이탈리아와 루마니아의 연합군 참전이 확실해지자 러시아의 기를 확실하고도 조속히 꺾을 필요가 있었다. 연이어 대승을 이끌어 대중적 인기가 높아진 제8군 사령관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와 참모장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는 동부전선을 우선 평정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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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 힌덴부르크(1열 좌5)와 참모장 루덴도르프(4)가 이끈 독일 제8군 지휘부. 탄넨베르크 전투 이후 계속된 연승에 힘입어 이들의 입김은 독일 군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결국 팔켄하인은 마지못해 동부전선에 주력하기로 결정하였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빌헬름 2세(Wilhelm II)와 수상 베트만홀베크(Theobald von Bethmann-Hollweg)가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자 팔켄하인도 어쩔 수 없이 예비대와 서부전선의 일부 병력을 동부로 이동시켰다. 비록 그는 이런 선택이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이로써 전쟁 전 세워 놓았던 독일의 모든 계획은 완전히 무효화되었다. 결국 현재의 전선을 고수한 상태로 겨울을 나야 했던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더욱 깊게 참호를 파야 했다.




프랑스의 동계공세



반면 독일의 이런 전략 변화는 지쳐 있던 연합군에게 전력을 회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호기가 되었다. 지난 넉 달 동안 정신 없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독일군을 물리치는 데만 급급하였던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Joseph Joffre)는 독일군의 움직임이 급격히 둔화되자 이제부터 반격을 개시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을 일거에 섬멸하여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은 아니었고, 사실 당시 연합군에게는 그런 능력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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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르는 파리를 위협하는 랭스에서 아라스에 이르는 돌출부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타원 안이 1915년 내내 격전의 무대가 된 아르투아 지역.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조프르는 파리를 위협하는 요인의 제거가 시급하다고 보고, 랭스(Reims)와 아라스(Arras) 사이의 돌출부를 탈환하기로 결심하였다. 20년 후 발발한 제2차 대전 당시라면 좌우로 기갑부대를 돌파시켜 배후를 절단하고 일거에 포위 섬멸하는 전략을 사용했겠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이상을 실현시킬 수단이 없었다. 오로지 땅따먹기처럼 하나하나 점령하여야 했다. 그는 엄청난 소모전이 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180km에 이르는 전선 전체에서 마치 빗자루로 쓸고 다니듯이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 조프르는 독일군의 보급로로 사용 중인 주요 철도와 도로망을 차단하여 압박을 가하는 방식으로 후퇴를 유도하기로 하였지만 정작 작전에 나설 수 있는 부대는 아르투아(Artois) 지역을 담당하던 제10군과 샹파뉴(Champagne)에 포진한 제4군 정도밖에 없었다. 여전히 프랑스군은 장비와 병력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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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준비가 부족하였지만 독일이 수세로 전환한 틈을 타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사실 조프르는 너무 조급하였다. 일단 지도 위에 그어진 전선 상황만 놓고 본다면 프랑스가 밀리고 있는 것이 맞으므로 어떻게든 빨리 점령지를 탈환하고 싶어하였다. 이처럼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았음에도 12월 17일, 제10군이 수쉐즈(Souchez) 방향으로 포격을 가하면서 프랑스의 동계공세가 시작되었다. 3일 후에 남쪽에 있던 제4군이 진지를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고 12월 말까지 프랑스의 공세는 성공적으로 보였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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