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15년 서부전선 [4] - 잊혀진 그해 격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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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00회 작성일 16-02-0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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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얼룩진 능선



3월 초에 있었던 프랑스의 동계공세는 단지 자존심을 세울 명분만 만들고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조프르가 아르투아 탈환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영국원정군이 관할하는 이프르 일대에서 연일 격전이 벌어지는 틈을 타서 프랑스는 무너진 전력을 보충하였다. 특히 화력 지원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애를 먹었던 지난 전과를 교훈 삼아 포병 전력 확충에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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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소강상태를 틈타 프랑스는 포병 전력 확충에 힘을 썼다.



그러던 5월 초, 이프르 일대에 대한 독일의 압박이 강해지고 동부전선에서 위기에 몰린 러시아가 도움을 요청하자 프랑스는 공세를 재개하기로 결심하였다. 해당 지역을 담당하던 포슈는 총사령관 조프르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200여 문의 야포와 충분한 포탄을 라 바세(La Bassee)에서 아라스(Arras)에 이르는 12km 전선에 촘촘히 배치할 수 있었다. 이들이 대대적으로 포격을 가해 독일군 진지를 강타하면 프랑스 제10군이 일제히 진격할 예정이었다.

마침내 5월 9일 새벽, 모든 준비를 마친 야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던 만큼 초탄부터 정확히 상대 진지를 가격하는 데 성공했고 불의의 기습을 당한 독일군은 일단 뒤에 편성하여 놓은 후방 진지로 후퇴하였다. 수쉐즈(Souchez)에 배치되어 있던 예하 제33군단이 즉각 진격을 개시하여 일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비미(Vimy) 능선을 순식간에 점령하였다. 하지만 정작 제10군 사령관 뒤르발(Victor d'Urbal)은 경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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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을 뒤엎을 만큼 빨랐던 프랑스 제33군단의 비미 능선 점령은 오히려 프랑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후속 조치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거대한 소모전의 현장이 되었다.



제33군단의 진격이 워낙 빨라서 후위에 있던 예비대와의 간격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예비대를 너무 뒤에 배치해 두고 있었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예하 부대의 배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뒤르발의 무능은 이후 비미 능선 일대를 피바다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제33군단이 능선을 점령하고 난 후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자 여지없이 그새 전력을 회복한 독일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2차 아르투아 전투의 결과



군단장 페탱(Philippe Pétain)은 즉각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뒤르발은 예비대에게 빨리 움직이라는 재촉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만일 신속 점령 후 즉각 예비대가 투입되어 방어 전면을 강화하였으면 충분히 사수할 수 있었던 비미 능선은 결국 점령한 지 하루 만에 독일에게 다시 빼앗겼다. 이후부터 능선 일대에 확고한 거점을 확보하지 못한 프랑스와 독일은 무려 5주 동안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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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미 능선 일대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5주 동안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다.



이곳은 기관총과 더불어 서부전선을 상징하는 백병전이 가장 대표적으로 벌어졌던 전장이었다. 프랑스는 6월 초까지 비록 8km 정도 전진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비미 능선 탈환에는 실패하였고 무려 10만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독일은 약 6만 정도의 인명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독일은 동부전선에 주력하고 있었기에 이곳을 담당한 독일 제6군은 후방 지원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감안할 때 상당히 선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측의 프랑스가 무의미한 소모전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좌측에 있던 영국 제1군은 지난 3월에 점령하는 데 실패한 누브 샤펠에서 다시 한 번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보기 드물게 프랑스와 작전 개시 일을 사전에 조율하여 5월 9일 함께 공격을 시작했지만 포탄을 비롯한 모든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다. 반면 어느덧 6개월 넘게 참호전이 계속되다 보니 어지간한 포격을 감당할 정도로 양측의 진지는 강화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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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브 샤펠 동측방에 위치한 오베르 능선에 설치된 독일군 참호. 영국군은 이곳을 노리고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고 점령을 포기하여야 했다. <출처: 영국 전쟁박물관>



결국 영국은 포병의 지원이 미미한 상태로 누브 샤펠 동측방의 오베르(Aubers) 능선으로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하루 만에 1만 명의 인명 피해를 당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영국 제1군은 6월 초까지 약 1km를 전진하였지만 전사상자가 약 3만에 이르렀고 독일도 1만 정도의 손실을 보았다. 이렇게 해서 2차 아르투아 전투(Second Battle of Artois)라고도 하는 연합군의 춘계공세는 전선에 피만 묻힌 채 막을 내렸다.




1915년의 마지막 격전



3월과 5월에 있었던 두 번의 공세에서 좌절을 맛본 연합군은 날이 갈수록 강화된 독일군 진지 때문에 완벽한 공세 준비, 특히 중포와 탄약 재고의 확보 없이 무조건 공격을 가하다가는 희생만 늘어날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나마 독일이 동부전선에 주력하기로 전략을 수정하면서 수세적인 방어전만 펼쳤는데도 이 정도였으니 만일 전쟁 초기처럼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면 더욱 암담한 상황이었을 것임은 명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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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5월, 포격 후 생긴 구덩이에서 휴식을 취하는 독일군. 연합군은 독일이 공세를 자제하고 있을 때 결판을 봤어야 했다. <출처: Bundesarchiv>



연합군은 독일보다 전력이 우세한 이 시점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작전보다 규모를 더욱 키워서 독일군의 소모를 최대한 증폭시킴으로써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연이어 격전의 무대가 되었던 아르투아는 물론,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강 상태였던 샹파뉴가 결전의 장소로 선택되었다. 약 80km에 이르는 전선에는 북에서 남으로 47개 사단으로 구성된 프랑스 제10, 2, 4군이 차례대로 배치되었다.

함께 공세에 나설 예정이었던 영국 제1군은 라 바세 남측에 위치한 루스(Loos) 지역을 거쳐 누브 샤펠로 파고들어 갈 생각이었지만 여전히 포탄이 부족하였다. 포탄을 비롯한 전쟁 물자 공급에 크게 문제가 있다는 점 때문에 정계에 불어닥친 이른바 ‘포탄 위기(Shell Crisis)'로 인하여 연립 정부가 구성되고 탄약성(Minister of Munitions)이 생겼지만 고질적인 포탄 부족은 아직 해결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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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공장에서 포탄을 생산하는 영국 여성들. 영국원정군의 고질적인 포탄 부족은 정쟁까지 불러왔을 만큼 문제가 심각하였다.



사실 시간으로만 본다면 거의 4개월 만이었으므로 충분히 대규모 작전을 펼칠 시기는 되었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뭔가 이루겠다는 조급증으로 인하여 9월 25일 마침내 연합군의 추계공세가 개시되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대대적인 선제 포격 후에 보병들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후 두고두고 말이 많았지만 제1차 대전의 서부전선에서는 사실 이 방법 외에 구사할 전술이 없었다.




의의



수세적인 입장이었던 독일은 방어선을 2중, 3중으로 더욱 강화해 놓은 상태였다. 연합군은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최대 4km까지 전진하였지만 이미 2차 방어 진지로 대피해 방어에 나선 독일의 반격으로 인해 곧바로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 우려대로 작전 다음날부터 포병의 지원이 줄어든 영국군은 사상 처음으로 독가스를 살포하며 공세를 계속하였지만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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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가스 공격을 준비 중인 영국군. 루스 전투에서 영국은 최초로 독가스를 살포하였다.



그리고 처음 의도대로 엄청난 소모전으로 전선이 불타올랐다. 사실 처음부터 실지 탈환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점령은 그다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조프르는 최대한 독일군을 많이 소모시켜 전쟁을 끝내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예상과 달리 연합군의 소모가 더 컸다는 사실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온 패턴이었는데도 조프르는 이런 엄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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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내내 서부전선은 전선의 변동도 없이 피만 흘린 살육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더 큰 지옥이 있을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11월 6일, 결국 먼저 지쳐버린 연합군이 손수건을 던지면서 3차 아르투아 전투(Third Battle of Artois)와 2차 샹파뉴 전투(Second Battle of Champagne)는 종결되었다. 전선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아르투아, 샹파뉴, 루스 일대에서 25만의 연합군 사상자가 생긴 반면, 침착하게 방어전을 펼친 독일군은 절반 정도인 13만의 피해를 입었다. 물론 이후에도 800여 km에 이르는 전선에서 소소한 싸움이 계속되었지만 서부전선에서의 1915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1915년 서부전선은 욕심만 앞섰던 연합군과 전쟁 전략의 변경으로 수세적인 입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군 사이에 벌어진 연속된 격전의 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서로의 목표가 상충한 아르투아 지방은 그야말로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 불과 1년 전에 전쟁을 찬양하며 달려들었던 교전 당사국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이듬해에 펼쳐질 지옥에 비하면 그나마 양호한 수준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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