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모스크바 전투 [1] - 히틀러의 야욕이 좌절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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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63회 작성일 16-02-0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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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춘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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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도심에서 탈출하는 키예프 시민들. 도시를 초토화시키면서 독일은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 계획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출처: (cc) K. Lishko at Wikimedia.org>



1941년 9월 26일, 공식적으로 키예프 전투는 막을 내렸고 독일은 역사상 최대의 승전보를 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고 소련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다. 독일은 여전히 공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개전 후 석 달 만에 전쟁 계획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연이어 경이적인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애초에 수립한 시나리오대로 전쟁이 진행되었다고 보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바바로사 계획(Operation Barbarossa)의 골격은 살아 있었지만 독일 침공군 주력이 키예프에 발이 묶이면서 사실상 여타 전선에서의 진격은 한 달간 중단되었다. 물론 휴전을 하였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남부를 제외하고 의미 있는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 논란이 많았던 키예프가 정리되었으니 독일은 처음에 세워놓은 계획대로 진격을 계속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울 리는 없었다.

먼저 키예프 공략을 위해 진격로를 돌려 남하하였던 부대들을 원대 복귀시켜야 했는데 핵심은 선봉에 서야 할 제2기갑집단이었다. 다시 500여 킬로미터를 북상시키는 것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어려운 문제였지만, 그동안 너무 소모가 커서 원위치한 후에 전과 같은 전투력을 계속 선보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사실 이는 제2기갑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모든 독일군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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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침공 계획에 의거, 제2기갑집단이 원대 복귀하여야 했지만 너무 소모도 많고 지쳐 있었다. 4호 전차에 그려진 G마크가 구데리안이 지휘하던 제2기갑집단 소속임을 보여준다. <출처: Bundesarchiv>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 석 달 동안 독일은 전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진격과 전과를 선보였지만, 엄밀히 말해 1941년 8월 말까지 예정된 목표에 도달한 병단은 발트 해 연안을 따라 레닌그라드로 향하던 북부집단군(Heeresgruppe Nord)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애당초 독일이 상정한 목표가 너무 과하였고 그만큼 소련을 만만하게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목표가 컸던 만큼 엄청난 피로감이 밀려온 것은 당연하였다.




연승과 함께 다가온 피로감



아무리 연이어 대승을 거둔다 해도 독일군 또한 소모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제때 보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8월 말까지 독일은 침공 당시 동원한 병력의 10퍼센트에 이르는 94,000여 명의 전사자와 34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지만 이때까지 일선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의 30퍼센트만 간신히 충원할 수 있었다. 당연히 기존 병력이 남은 공백을 메워야 했지만 그들도 너무 지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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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갈수록 독일의 소모도 커져 갔지만 제때 보충이 되지 않았다. <출처: Bundesarchiv>



게다가 갈수록 보급이 제한을 받았지만 현지에서 약탈을 통해 조달할 수 있는 물품이라고는 일부 식량 정도 밖에 없었다. 노획하여 사용하려던 소련의 휘발유도 옥탄가가 너무 낮아 독일군 장비를 고장내곤 하였을 만큼 현지에서의 보급품 조달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때문에 상당수의 물자를 본토에서 가져와야 했으나 소련의 열악한 교통망으로 말미암아 진격하면 할수록 어려움은 커져 갔다.

설령 키예프 전투가 아니었어도 구조적으로 10월 초에 이르러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둔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시간이 흐를수록 소련의 방어선은 강화되었다. 스탈린의 아집 때문에 전술적으로 무의미한 여러 방어전에 매달리다가 엄청난 대패를 자초하고는 했지만 전선 전체를 놓고 볼 때 놀랍게도 소련군의 전력이 현저히 약화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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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 투입되기 전에 퍼레이드를 벌이는 소련군. 엄청나게 패하고 있었지만 이를 능가하는 전력이 계속 전선에 공급되었다. <출처: 구 소련 선전사진>



처음 언급처럼 석 달 만에 이런 문제점이 드러난 것은 독일의 계획이 생각보다 철저하지 못하였다는 증거다. 독소전쟁 이전에 있었던 여러 승리에 도취되어 너무 자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소련 침공 후부터 상상외의 대승을 연이어 거두다 보니 이런 어려운 사정을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하였다. 이제 독일은 모스크바 점령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 더 달성하면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모스크바의 정체성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 모스크바는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소련의 권력이 몰려 있는 수도이므로 전략적으로 당연히 탈취해야 할 대상임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의 점령이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지난 역사가 이미 입증하고 있었다. 130여 년 전 나폴레옹은 보무도 당당히 모스크바에 입성하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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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로사 계획 초안을 작성한 마르크스 제18군 참모장. 그는 주력을 양분하여 모스크바와 키예프의 동시 석권을 고려하였다.





전쟁 전인 1930년대 말의 모스크바 시내의 모습. 소련의 수도였지만 워낙 큰 나라다 보니 단지 이곳을 점령한다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출처: 구 소련 선전사진>




당시와 비교했을 때 철도 교통의 요지로 떠올랐다는 점 외에 모스크바의 위상은 그다지 바뀌지도 않았다. 사실 소련은 너무나 커다란 땅이어서 수도가 차지하는 전략적 위상이 폴란드나 프랑스만큼 크지 않았다. 이런 점은 오히려 소련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어서 설령 모스크바를 잃는다 하더라도 당장 싸움을 멈추고 항복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독일에서도 단지 수도라는 이유만으로 서둘러 이곳을 점령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전쟁 전부터 일각에서 제기된 상태였다. 우선 전쟁의 방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나폴레옹 시대처럼 바르샤바에서 스몰렌스크를 거쳐 모스크바에 이르는 동유럽 중앙 가도로만 군대를 진격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소련이라는 거대한 땅을 빗자루로 구석구석 쓸고 다니듯이 점령한다는 것은 400여 만의 대군을 동원한 독일로서도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독일은 핵심적인 몇몇 목표를 우선 선정하여 점령함과 동시에, 소련군을 섬멸하는 방법을 생각하였다. 1940년 8월, 제18군 참모장이던 마르크스(Erich Marcks) 중장이 지리적으로 부대 간 횡적 연결이 곤란한 프리페트(Pripet) 소택지(沼澤池)를 기준으로 침공군을 남북으로 양분시켜 모스크바와 키예프로 동시에 진격하는 침공 계획을 수립하였다.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에 제시된 그의 제안은 어느 정도 히틀러의 의중을 만족시켰다.




이제 남은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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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당시 최고지휘부와 작전을 숙의 중인 히틀러. 독소전쟁 초기만 해도 히틀러가 군부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아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의 의견대로 모스크바를 주공으로 하는 침공안이 작성될 수 있었다. (전면 좌에서 우로 카이텔 국방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 육군 총사령관, 히틀러, 할더 육군 참모총장)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언급하였듯이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라는 실리적 목표를 우선시하였던 히틀러는 주공을 키예프로 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는 군부의 생각과 달리 키예프와 더불어 동시에 점령할 또 다른 목표를 모스크바 대신 레닌그라드로 보았다. 사실 유럽의 시각에서 볼 때 모스크바보다 유럽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관문인 레닌그라드가 차지하는 상징성이 더 컸다.

히틀러는 1940년 12월 총통명령 제21호를 하달하며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를 동시에 점령한 이후에 모스크바로 향하라고 지시하였지만 여전히 군부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승리에 대한 상징성 때문에라도 모스크바를 우선순위에서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았고 오히려 주력을 이곳을 향해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독일은 북에서 남으로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를 1차 진출선으로 정하고 침공군을 3개 병단으로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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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소련에서는 3,400만 명의 국민이 징집되어 전선으로 달려갔다. 이런 엄청난 능력은 독일이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출처: RIA Novosti>



침공 3개월이 지난 1941년 9월 말이 되자 예정대로 남부의 키예프는 함락되었고 북부의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이 초입까지 다가갔다. 그런데 일선에서는 뭔가 잘못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전과를 고려한다면 더 이상 소련의 저항은 없어야 했다. 사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점령보다 조속히 소련군을 붕괴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키예프 전투가 끝난 지금쯤은 그런 조짐이 보여야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독일은 미루어 놓았던 모스크바를 점령함으로써 소련의 마지막 저항의지를 무너뜨리기로 결정하였다. 히틀러를 포함한 지휘부 내에서 주공의 지향점을 어디로 정할 것인지는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되지 못하였다. 반면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듯이 스탈린은 대내외에 반드시 모스크바를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엄청난 대군을 속속 집결시키고 있었다. 독소전쟁의 전환점이 된 모스크바 전투(Battle of Moscow)는 이렇게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출처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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