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모스크바 전투 [3] - 히틀러의 야욕이 좌절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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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902회 작성일 16-02-0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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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다가온 진흙 장군



독일이 태풍작전을 실시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던 10월 7일, 때 이른 진눈깨비가 내리면서 가을 우기가 시작되었다. 포켓 안의 엄청난 소련군을 소탕하는 데 바빴던 독일군은 이렇게 쏟아지는 눈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유럽 평원은 가을 우기와 봄 해동기에 온천지가 진흙 구덩이가 되어 버리는데, 이것이 전사에 종종 진흙 장군으로 묘사되는 라스푸티차(Rasputits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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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소련의 라스푸티차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천금 같은 시간을 놓친 독일은 결정적인 시기에 닥친 진흙 장군으로 말미암아 진격에 애를 먹었고 이것은 반대로 소련에 호기가 되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독일이 소련의 기후와 자연 여건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예상보다 빨리 악천후가 시작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돌파의 중핵이었던 전차 같은 장비는 물론, 사람도 이곳에 빠져버리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진흙 구덩이는 피아 모두에게 통행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지만 그런 환경에 좀 더 익숙한데다 수세적인 입장이었던 소련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변수임에는 틀림없었다.

만일 독일군이 브야즈마와 브리얀스크에 형성된 포켓의 섬멸을 연기시키고 전진을 계속하였더라면 라스푸티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보다 효과적으로 소련군을 추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쟁 초반 민스크 전투 당시에 브레스트(Brest)에 포위된 소련군이 격렬히 저항하자 일단 포위만 해 놓고 천천히 함락시킨 예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대어를 삼키기 위해 발걸음을 멈춘 순간 자연이 만든 방어선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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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야즈마 부근에서 항복하는 소련군. 독일은 포위된 적을 먼저 섬멸하기로 결정하면서 진격을 잠시 멈추었다.



독일은 소련을 점령할 산술적인 시간만 머릿속에 넣고 있었지, 그 거대한 땅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자연 현상에 대한 변수까지 치밀하게 고려하지는 않고 있었다. 심지어 1941년 겨울이 예년보다 따뜻할 것이라는 공군 기상대의 장기 예보를 철석같이 믿고 동계 피복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을 만큼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이런 와중에 시작된 라스푸티차는 모스크바 전투의 향방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되었다.




혼란에 빠진 모스크바



키예프 전투 이후부터 스탈린은 차마 자신의 입으로 과오가 있었다고 말하진 못하였지만 군부에 대한 입김을 조금씩 줄였다. 덕분에 이전 같으면 포위망 안에서 하릴없이 최후를 맞았을 많은 소련군이 효과적으로 대응해가며 탈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포켓에 갇혔던 브리얀스크 전선군 중 일부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면서 포니리(Ponyri)까지 지연방어전을 펼쳐 추격하는 독일군을 지치게 만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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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야즈마 북부를 돌파하여 칼리닌 방향으로 진격하는 독일 제3기갑군 소속 전차들



끝없는 진흙밭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인 10월 10일, 독일 제4기갑군이 모스크바에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모자이스크(Mozhaisk) 외곽에 도달하였다. 곧바로 이곳을 놓고 독일 제4기갑군과 제5, 43, 49군을 주축으로 재편된 소련 서부전선군이 밀고 당기는 격전을 벌였다. 깊숙하게 만들어진 대전차 방벽과 무수한 방어시설이 도시 주변을 감싸고 있었지만 소련군 최고사령부(STAVKA)는 이 도시의 방어를 자신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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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오토 디트리히는 히틀러를 대리하여 독소전쟁에서의 승리를 공식 선언했다. 김칫국부터 마신 상황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을 만큼 소련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바로 이때 히틀러의 공보 담당인 디트리히(Otto Dietrich)는 베를린 주재 외신 기자들을 불러 놓고 자신만만하게 이 전쟁의 승리를 공식 선언했다. 반면 같은 날 스탈린은 레닌그라드 사수에 탁월한 전과를 올린 주코프(Georgii Konstantinovich Zhukov)를 소환하여 모스크바 방어의 중책을 부여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130년 전 모스크바를 철저하게 초토화하여 나폴레옹에게 내주었던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의 사례도 곰곰이 되새겼다.

10월 13일, 스탈린이 전쟁 지휘부를 제외한 모든 기관을 쿠이비셰프(Kuybyshev)1)로 소개(疏開)할 것을 지시하자 모스크바는 공황에 빠졌다. 브야즈마 포켓에 갇힌 소련군이 항복한 10월 19일, 모스크바 포기도 심각하게 고려 중이던 스탈린은 본심을 숨기고 끝까지 도시를 사수할 것을 천명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간신히 혼란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절정에 다다른 라스푸티차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다.




절망적인 순간



독일군은 전투보다도 처음 겪는 엄청난 진흙 구덩이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쾌속으로 진격해 왔지만 모자이스크에서 일단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비록 이로 인해 소련이 이득을 본 시간은 한 달 정도였지만 그 사이에 방어선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25만여 명의 여성과 노약자들이 동원되어 맨손으로 도시 전체에 거대한 참호와 진지, 방어물을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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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진격이 잠시 멈춘 틈을 타서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구조물이 촘촘히 구축되었는데, 장비와 인력이 부족하여 수많은 여성과 노약자들까지 동원되었다.



하지만 주코프에게는 병력과 장비가 절대 부족하다는 점이 더 큰 고민이었다.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의 재건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었고 결국 이런 능력이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한 1942년 이후의 모습이었다. 히틀러가 자신만만하게 종전을 선언하였을 만큼 개전 후부터 1941년 10월까지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전쟁 내내 수적으로 우위를 보였던 소련이 유일하게 열세였던 순간이 키예프 전투부터 모스크바 전투 사이의 시기였다. 특히 태풍작전 초기에 독일군에게 66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면서 순식간에 격차가 거의 2대 1 수준까지 벌어졌다. 공세의 주도권도 독일로 넘어가 있었고 전력도 뒤쳐진 상황에서 주코프에게 모스크바 방어는 어쩌면 사치스러운 목표였을지도 모른다. 후방에서 소집된 많은 병력들이 달려오고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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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모스크바 방어에 나선 소련 여군. 서둘러 징집한 것처럼 허술한 모습이다. 이처럼 병력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다. <출처: RIA Novosti>



진흙에 막혀 둔화되었지만 그렇다고 독일의 공세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소련 방어선의 중핵이었던 모자이스크가 무너진 것을 필두로 모스크바로 향하는 또 하나의 관문이었던 남측의 나로포민스크(Naro Fominsk)가 10월 21일에 점령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충지인 툴라(Tula)를 향해 오렐을 출발한 제2기갑군이 접근 중이었다. 주코프는 부대를 나라(Nara) 강 동안으로 철수시켜 진지를 구축했다.




새롭게 떠오른 급소



주코프가 모스크바에서 겨우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나라 강을 방어막 삼아 부대 재편에 착수하는 동안 독일 제3기갑군이 모스크바의 북쪽 대문인 칼리닌(Kalinin)을, 제4기갑군이 서쪽 입구인 칼루가(Kaluga)를 점령하면서 소련의 제2방어선도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주코프가 더욱 염려스러워 하던 곳은 따로 있었다. 독일 최고의 맹장 중 하나인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이 다가오고 있던 툴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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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전투 당시 작전을 숙의 중인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 주코프(우)와 그의 책사 역할을 담당한 바실리예프스키. 궁합이 상당히 잘 맞았던 이들은 독소전쟁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이곳은 소련이 설정한 클린(Klin)에서 칼루가에 이르는 제2방어선 외곽에 존재하여 저지 시설도 부족하였고 방어 병력도 없었다. 오로지 진흙 장군만이 독일군의 진격을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위기를 직감한 주코프는 초전에 무너져 버린 제50군을 재편하자마자 곧바로 이곳으로 보냈다.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하여 모스크바 전면의 방어도 고민스러운 상황에서 내린 초강수였다.

최초 방어선 구축 당시에 제외되었을 만큼 툴라는 모스크바 외곽의 방어선에 도열하였던 모든 도시들 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독일군이 전면에 등장하자 중요성은 가장 커졌다. 이곳을 독일이 점령하면 이후부터 강과 같은 저지물이 적어 모스크바까지 신속히 내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10월 26일 진흙 구덩이를 헤치고 툴라 외곽에 도착한 제2기갑군은 곧바로 도시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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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라 도심에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나선 소련 제50군. 이들이 격렬한 저항으로 독일의 공격을 막아냈다.



독일군에게 툴라는 단지 거쳐가야 할 곳일 뿐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쉽게 이 도시를 탈취하고 모스크바로 직행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하지만 도심 곳곳에 급조한 방어물을 방패막으로 삼은 소련군이 격렬한 저항에 나섰다. 독일 침공군 전체의 선봉대라 자부하였던 제2기갑군은 공격을 개시하였던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반전은 이처럼 의외의 장소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 서부 볼가 강 중류에 있는 공업 도시 ‘사마라’의 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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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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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서부 볼가 강 중류에 있는 공업 도시 ‘사마라’의 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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