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모스크바 전투 [2] - 히틀러의 야욕이 좌절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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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38회 작성일 16-02-0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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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다시 도열하다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할 주체는 바바로사 계획 수립 당시부터 이곳을 공략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중부집단군(Heeresgruppe Mitte)이었다. 처음부터 독일 침공군 전체의 주공 역할을 담당하다 보니 중부집단군은 여타 집단군에 비해 규모가 컸지만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앞둔 1941년 9월 말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인 충원에 힘입어 더욱 커졌다. 덕분에 이 당시 중부집단군은 독소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거대했던 독일군 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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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행군하는 독일 중부집단군 소속 병사의 모습. 제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은 기갑부대 이미지가 강하지만 매체의 선전 효과 때문이고 실제로 전선의 대부분을 담당한 것은 보병이었다. <출처: Picture History of World War II, 1970>



200여만의 병력, 1,000여 대의 전차, 14,000여 문의 야포 그리고 550여 기의 작전기가 벨리키예루키(Velikiye Luki)에서 쿠르스크(Kursk)에 이르는 900여 킬로미터의 러시아 평원에 촘촘히 도열하였다. 키예프 함락에 차출된 제2기갑집단과 제2군이 원대 복귀하였고 여기에 더해 그동안 북부집단군 소속이었던 제4기갑집단이 새롭게 힘을 보태었다. 특히 북부집단군의 유일한 송곳인 제4기갑집단의 배속 변경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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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집단군으로 배속을 변경한 제4기갑집단 소속의 2호, 3호 전차들. 모스크바 전투 개전 당시에 가장 전력이 충실히 편제된 독일군 기갑부대였다. <출처: Bundesarchiv>



히틀러가 중요시하던 레닌그라드의 점령을 연기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초입까지 진격하여 레닌그라드를 봉쇄시켜 놓은 북부집단군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도심 진입을 유보시키고 제4기갑집단을 차출하였다. 이는 모스크바 공략에 대한 독일의 의지를 확고하게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덕분에 당시 독일이 보유한 4개 기갑집단 중 무려 3개 부대가 모스크바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

북에서 남으로 제9군, 제3기갑집단, 제4군, 제4기갑집단, 제2기갑집단, 제2군이 나란히 도열하였고 이들은 독일군이 지금까지 했던 방식대로 기갑부대를 선봉에 내세워 좌우로 뚫고 들어가 소련군을 거대한 포위망 안에 가둔 후 일거에 섬멸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독일은 겨울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고자 했고 이를 ‘태풍작전(Operation Typhoon)’으로 명명하였다.




소련, 철벽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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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초 소련군의 모습. 이때까지만 해도 연합군과 동맹 관계가 아니어서 고립된 상태에서 홀로 독일과 싸워야 했다. <출처: Russian International News Agency>



독일의 다음 목표가 모스크바임을 직감한 소련은 새롭게 조직된 수많은 예비대들을 이 일대로 집결시켰지만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았다. 흔히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이유 중에 이른바 무기대여법(Lend-Lease)이라 불린 서방의 막대한 지원이 있었다는 주장이 많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때까지 소련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철저한 외톨이 신세여서 전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상태였다.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소련군은 150여만 정도였고 전차와 전투기는 숫자상으로 독일보다 많았지만 질적으로 우세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재건되었지만 그동안 계속 참패만 당해 온 서부전선군(Western Front)과 브리얀스크 전선군(Bryansk Front)이 여전히 방어전의 주역이었고 5개 군으로 급편된 예비전선군(Reserve Front)이 추가 투입되었으나 2선급 부대여서 당장 전투력을 발휘하기는 난망한 상황이었다.

그동안 전략적인 고려 없이 눈앞에 보이는 독일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만 급급했던 소련은 그래도 연이은 참패에서 교훈을 얻었다. 승리는 차치하고라도 어떻게 방어에 나서야 그나마 독일군을 지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힌트였다. 소련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이었는데, 독일이 키예프 공략을 위해 여타 전선에서 진격을 멈춘 한 달간의 시간은 커다란 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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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모스크바를 지키기 위해 도시를 중심으로 200킬로미터 외곽까지 3중에 이르는 거대하고도 촘촘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처럼 키예프를 희생시키며 얻은 천금 같은 시간 동안 소련군 최고사령부(STVKA)는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로 이르는 가도에 철벽과 같은 3중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가장 외곽인 오스타시코프(Ostashkov)에서 브리얀스크(Bryansk)까지 제1방어선이, 클린(Klin)에서 칼루가(Kaluga)까지 제2방어선이, 그리고 모스크바 시 외곽에 마지막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하지만 급하게 주요 길목을 위주로 만들어지다 보니 곳곳에 벌어진 공간은 이후 격전의 장소가 되었다.




다시 반복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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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작전을 앞두고 히틀러는 기갑집단을 기갑군으로 승격시켰다. 하지만 제대로 된 보충이 없어서 정작 개전 초보다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1941년 10월 2일 브야즈마를 향해 돌격하는 제3기갑군 소속 전차. <출처: Bundesarchiv>



1941년 10월 2일, 독일 중부집단군이 공격을 개시하면서 드디어 태풍작전이 시작되었다. 1,200킬로미터를 진격하며 격전을 치러 많이 지쳐 있었음에도 독일군은 여전히 소련군을 밀어붙였다. 선봉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기갑부대들이 담당하였는데, 히틀러는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편제한 부대라는 느낌이 나는 기갑집단(Panzergruppe)이라는 어정쩡한 명칭 대신 이들을 기갑군(Panzerarmee)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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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을 개시한 독일군은 순식간에 전선을 가르고 들어가 브야즈마와 브리얀스크 일대에 형성한 거대한 포위망 안에 80여만의 소련군을 가두는 데 성공하였다.



남쪽에서 제2기갑군과 제2군이 브리얀스크 일대에 몰려 있는 브리얀스크 전선군 예하 제3, 13, 50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다. 전쟁 발발 후 가장 큰 역할을 도맡아 왔던 구데리안(Heinz Guderian)의 제2기갑군은 많이 소모되고 피곤한 상태였지만 이번에도 불과 이틀 만에 오렐(Orel)까지 무려 200여 킬로미터를 쾌속 진격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 독일군의 선봉대를 자임한 주인공은 별도로 있었다.

제3기갑군과 새롭게 중부집단군에 배속된 제4기갑군이 돌파의 중핵이었다. 특히 북부집단군이 차출에 반발하였던 제4기갑군은 1941년 9월 말 현재, 가장 전력이 충실한 정예부대였다. 이들은 전선을 가르고 들어가 10월 7일 브야즈마(Byazma) 동쪽에서 합류하면서 서부전선군 예하 제19, 20, 24, 32군을 포위망에 가두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브리얀스크와 브야즈마에 형성된 두 개의 커다란 포켓에는 무려 80여만 명의 소련군이 갇혔다.

개전 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독일군의 승리 공식이 다시 한 번 재연된 것이었다. 포위당한 소련군은 스탈린의 엄명에 따라 격렬히 저항하고 나섰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포켓의 외곽을 봉쇄시켜 놓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것이 옳았지만 그물에 갇힌 고기가 너무 컸다. 예상을 웃도는 엄청난 소련군을 가둔 것으로 확인되자 독일군은 일단 진격을 멈추고 섬멸에 나섰다. 이들을 완전히 소탕하는 데 11일이 걸렸다.




섬멸을 선택하다



이후 소련의 자연 현상에 막혀 진격이 지지부진하게 되었던 점을 상기한다면 이는 독일에게 있어 매우 아쉬운 순간이었다.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패한 원인은 많지만 일방적으로 우세한 초기에 있었던 몇 번의 실기(失期)가 그야말로 결정적이었다. 소련 침공을 앞두고 예정에 없던 발칸 반도를 침공하느라, 진격 중 키예프를 점령하느라, 그리고 지금 또 다시 대어를 잡느라 흘려보낸 금쪽같은 시간의 의미를 독일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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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 달리 포위된 소련군이 강력하게 저항하고 나섰다. 독일은 이를 섬멸한 후 진격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커다란 실책이 되었다. <출처: RIA Novosti>



10월 19일, 포켓이 완전히 제거되면서 독일은 또 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최종적으로 모스크바 전투가 소련의 승리로 끝났기에 종종 간과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때 전사하거나 포로가 된 66만은 사상 최대의 전과로 언급되는 키예프 전투와 맞먹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나마 후퇴가 허락되어 소련군 중 일부가 포위망을 뚫고 후퇴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제 소련도 당장 한 명의 병사가 아쉬울 만큼 감내할 수 있는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태풍작전 초반의 전세가 예상대로 진행되자 그해 말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하여 바바로사 계획 수립 당시 목표로 하였던 레닌그라드-모스크바-키예프에 이르는 선까지 진출을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였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스스로도 놀랄 만한 연이은 대승에 힘입어 승전의 발판을 완전히 구축할 수 있으리라는 히틀러의 생각에 독일 군부도 대체로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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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야즈마 일대에 포위된 소련군이 항복하고 있다. 태풍작전 초반의 승리에 힘입어 히틀러는 모스크바 점령을 낙관하였다.



전쟁 후 지금까지 약 350여만의 소련군이 소탕되었고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장비가 노획되거나 파괴되었다. 불과 1년 전에 서유럽 최강의 육군을 보유한 프랑스가 7주 만에 30만 명이 전사상 당한 상태에서 저항을 포기하였던 점을 상기한다면 소련이 여기서 항복하고 전쟁이 끝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쯤 미국이나 영국도 소련의 패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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