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모스크바 전투 [4] - 히틀러의 야욕이 좌절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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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43회 작성일 16-02-0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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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멈춘 전선



구데리안은 지난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에 제2전차사단을 이끌고 48시간 만에 670킬로미터를 내달려 빈에 진주하는 데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독일이 벌인 군사작전에서 항상 선두에 섰던 최고의 선봉장이었다. 주데텐란트 점령,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에서 그러하였고 독소전쟁 개시 후에는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브리얀스크에서 벌어진 대승의 현장에도 항상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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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주데텐란트 합병 당시 제16장갑군단을 이끌던 구데리안(좌). 이처럼 전쟁 이전부터 독일군의 선봉장 역할을 담당하였던 그도 툴라에서 저지되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그러했던 구데리안의 진격이 1941년 10월 29일 툴라에서 소련 제50군의 극렬한 저항에 막혀 처음으로 멈춘 것이었다. 제2기갑군이 패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도심으로의 진입이 저지된 것뿐이었지만 그 의의는 사뭇 컸다. 독소전쟁사 전체를 조망할 때 바로 이 순간이 소련을 정복하겠다는 독일의 의지가 좌절된 시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이러한 역사적 의의를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구데리안은 그동안 주변 부대 지휘관들과 종종 트러블을 일으킬 만큼 한번 기회를 잡았을 때 최대한 전진하여야 한다고 믿는 인물이었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인 것은 아니었다. 제2차 대전에서 활약한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하나였던 그는 제2기갑군이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상황임을 알았다. 사실 이는 제2기갑군뿐만 아니라 모스크바로 향해 진격하던 모든 독일군 부대들 사이에서 동시에 나타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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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을 격퇴시킨 직후인 1941년 10월 30일 툴라에서 촬영된 소련군 대전차 포대. 그때는 몰랐지만 이를 기점으로 독일의 소련 정복이라는 꿈은 좌절되었다.



소련은 일단 적을 격퇴시켰지만 계속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는 못하였다. 엄밀히 말해 소련이 잘했다기보다는 독일이 지쳐서 잠시 쉬는 형국이다 보니 초조함은 더욱 컸다. 서로 상대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빨리 예비대를 투입하는 쪽이 유리한 형국이었다. 그동안 소련은 전력소모가 경악할 정도였지만 당장의 상황은 오히려 병참선이 길게 늘어난 독일이 불리하였다.




극동에서 달려온 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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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주재 독일 신문사 특파원으로 위장한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이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첩보를 보고한 후 주코프는 극동에 주둔 중인 귀중한 정예 병력을 모스크바 방어에 투입할 수 있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이처럼 독일이 제풀에 지쳐서 기진맥진하고 있을 무렵 가을 우기가 끝나고 땅이 서서히 굳어가면서 독일에게는 지긋지긋하였던, 그러나 소련에게는 구세주 같았던 진흙 장군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때 멀리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귀중한 병력들이 모스크바를 지키기 위해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속속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때맞추어 도착한 구원군은 곧바로 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소련 각지에서 대대적인 징병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훈련도 거치지 않고 전선에 투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점에서 당장 전투가 가능한 극동의 50여만 병력은 그야말로 귀중한 자원이었다. 소련이 이런 알토란 같은 예비대를 모스크바 함락 직전에서야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일본 때문이었다. 1939년에 있었던 할힌골 전투(Battle of Khalkhin Gol)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에게 일본은 또 하나의 위협 세력이었고 더구나 독일의 동맹국이었다.

비록 1941년 4월에 체결된 소일중립조약이 있지만 소련은 일본이 이를 끝까지 준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전선이 무너지던 와중에도 극동에 배치된 병력을 함부로 빼올 수 없었던 것이었고, 사실 일본도 몽골과 시베리아로의 진출을 신중하게 검토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도쿄에서 암약 중이던 간첩 조르게(Richard Sorge)가 일본이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정보를 보고하자 주코프는 과감히 이들을 모스크바 방어에 투입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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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이 불과 80여 킬로미터 부근까지 다가 온 상황에서 1941년 11월 7일 혁명 기념식 퍼레이드를 벌이는 소련군. 이들은 행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11월 7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부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프롤레타리아 혁명 24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독일군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소련 국민들에게 항전의지를 고취시켜 주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저 멀리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온 귀중한 전력들을 포함한 많은 부대들이 스탈린과 소련 국민들에게 엄숙하게 인사를 고하고 곧바로 전선으로 달려갔다.




모스크바가 시야에 보이다



이때 레닌 묘지 위에서 엄중하게 사열식을 지켜본 스탈린은 라디오로 생중계된 연설을 실시하면서 세계 공산화를 꿈꾸던 소련에서는 금기시되던 민족과 조국이라는 단어를 거론하였다. 특히 1812년 나폴레옹의 침략을 물리친 조국전쟁(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을 들먹이며 이번 전쟁을 대조국전쟁이라 칭하였다. 그들이 타도한 제정 러시아의 업적을 선조의 얼이라 부추기며 다시 한 번 승리를 재현하자고 외쳤을 만큼 그는 다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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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1월 7일 스탈린이 혁명 기념식장에서 연설하는 모습. 스탈린이 대중 앞에서 그것도 라디오 생중계로 연설한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그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굳은 의지와 달리 공세의 주도권은 아직도 독일이 쥐고 있었다. 보무도 당당히 전선으로 달려 나간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웠지만 대세를 뒤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11월 24일 독일 제3기갑군이 격전 끝에 모스크바의 북쪽 출입구인 클린을 점령했다. 불안을 느낀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모스크바를 방어할 수 있는지 솔직히 대답하라고 물었다. 설령 모스크바를 빼앗겨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주코프는 방어가 가능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예비대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소련의 피해가 훨씬 크지만 전선을 파악한 결과 독일군의 소모도 만만치 않음을 알았고 결국 누가 더 많은 예비대를 적시에 투입하는가에 따라 모스크바의 앞날이 결정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11월 28일에는 독일 제3기갑군 예하 제7전차사단이 망원경으로 모스크바 교회 첨탑이 보이는 30킬로미터 전방까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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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를 헤치며 보급품을 운송하는 독일군. 하지만 1941년 11월 말이 되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바로 그때 소련에게는 진흙 장군을 능가하는 엄청난 구세주인, 그러나 독일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장벽이었던 한파가 다가왔다. 북극에서 눈보라가 밀려오면서 예년보다 빨리 겨울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직은 영하 10도 수준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수은주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동계 전투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아직도 여름 전투복을 걸치고 있던 독일군에게는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빨리 찾아온 그해 겨울



나폴레옹의 비참한 패배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이 러시아 평원의 겨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겨울이 오기 전에 레닌그라드-모스크바-키예프에 이르는 선까지 진출하는 것을 1차적 목표로 삼았었다. 하지만 1941년 겨울은 평년보다 한 달이나 빨리 찾아 왔고 유별나게 매서웠는데, 특히 12월 중순부터 이듬해 1월 중순까지 이어진 영하 30도의 매서운 북풍한설은 30년 만의 혹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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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전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 독일은 동계 전투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장비들도 혹한에 작동되지 않았지만 가장 고통을 겪은 것은 역시 사병들이었다. <출처: (cc) Wilhelm Gierse at Wikimedia.org>



침공 전, 그해 겨울은 춥지 않을 것이라는 기상대의 예보를 철석같이 믿었던 독일군은 몹시 곤혹스러웠다. 히틀러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전선의 상황을 보고받고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물론 일선의 집단군 지휘부까지 비난하였다. 반면 독일이 공세종말점에 다다를 것이라 예측한 주코프는 반격에 나서기에 충분한 예비대와 물자가 집결되기 전까지 계속 수세적인 입장에서 독일군의 전진을 적절히 지연시키고 있었다.

11월 말이 되면서 기온은 영하 20도 가까이 떨어졌다. 구닥다리라고 폄하하던 소련군의 장비는 그처럼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무난하게 작동되었지만 대비를 게을리한 독일군의 장비들은 전혀 그러하지 못하였다. 총과 대포는 발사되지 않았고 윤활유와 냉각수가 얼어붙은 전투기, 전차, 트럭 같은 장비들은 제자리에 멈추어 눈보라에 파묻혀 갔다. 하지만 가장 크게 곤란을 겪은 것은 허허벌판에 그대로 노출된 병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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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항복한 독일군과 노획한 무기를 점검하는 소련군. 복장 상태만으로도 양측 병사들의 사기와 전투력을 판가름할 수 있을 정도다. <출처: (cc) V. Kinelovskiy at Wikimedia.org>



든든한 방한복을 입은 소련군과 아직도 동계 피복을 지급받지 못한 독일군 간의 교전은 이미 승패가 갈린 상황이었다. 독일군에게는 소련군보다 한파가 더욱 무서운 적이 되어 버렸다. 독일은 상대를 얕보고 성급히 벌인 전쟁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사전에 충분히 대처할 수도 있었지만 5개월간 계속된 경이적인 대승으로 자만에 빠져 이런 최악의 경우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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