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모스크바 전투 [5] - 히틀러의 야욕이 좌절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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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91회 작성일 16-02-0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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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뒤바뀐 전세



독소전쟁 초기인 1941년 7월 23일, 독일 육군 참모총장 할더(Franz Halder)가 히틀러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소련군은 총 93개 사단이었다. 11월 말까지 350여만의 소련군이 붕괴되었으므로 이론적으로 이들 전력은 모두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를 훨씬 능가하는 무려 250여 개 사단의 엄청난 소련군 병력이 2,5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전선에서 작전 중이었고,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편성된 80여 개 사단도 속속 이동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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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혹한이 이어지던 1941년 12월 모스크바를 방어하기 위해 전선으로 투입되는 소련 증원부대. 이처럼 놀라운 충원 능력은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였다. <출처: (cc) Oleg Ignatovich at Wikimedia.org>



독일 중부집단군도 태풍작전 개시 직전에는 약 2대 1 정도로 우위에 있었고 연이어 대승을 거두었지만 불과 두 달 만에 120여만의 소련군이 모스크바 전면에 속속 배치되면서 열세로 상황이 바뀌었다. 라스푸티차와 연이어 닥친 혹한, 고질적인 보급 부족, 그리고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는데, 당장 눈앞의 어려움에만 매몰된 독일군은 이런 변화를 깨닫지 못하였다.

독일은 소련의 예비대가 완전히 소진되었다고 판단했으므로 소련군이 공세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독일의 진격이 중단된 것은 소련군의 저항보다 연이어 닥친 라스푸티차와 혹한, 그리고 보급 문제 때문인 것으로만 보았다. 반면 소련은 독일군의 이런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조급한 스탈린은 즉각 반격을 주장하였지만 주코프는 좀 더 신중하게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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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1월 27일 혹한 속에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독일군. 이런 열악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독일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출처: Bundesarchiv>



그는 소련군이 모든 여건에서 확실하게 우위에 섰다고 판단될 때까지 최대한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사실 축차적으로 전력을 투입하여 낭패를 보았던 스탈린의 대응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 소련군의 전력이 부족하여 연이어 대패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주코프는 1939년에 자신이 지휘하여 승리를 엮은 할힌골 전투처럼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확실하게 타격을 가하지 않는 한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반격이 시작되다



12월 1일, 독일 제4기갑군이 모스크바 서쪽으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초입부터 소련 제33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하지만 아직 독일군에게는 소련군보다도 영하 20도까지 떨어진 매서운 추위가 더욱 무서운 존재였다. 소련군도 이런 추위가 곤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혹한에 훨씬 익숙해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독일군은 1만여 명의 손실을 입고 처음 공격을 개시한 나로포민스크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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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4기갑군은 모스크바로 향한 공세를 개시하였으나 소련군의 저항보다 매서운 혹한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출처: Bundesarchiv>



모스크바 남쪽의 툴라에서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던 독일 제2기갑군도 12월 5일 진격을 멈추었다. 당시 구데리안은 일기에 ‘적의 역량을 과소평가했다’는 고백을 적어 놓았는데, 이것은 어느덧 전력에서도 소련이 독일과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중부집단군 사령관 보크(Fedor von Bock)는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 점령은 불가능하니 일단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곳까지 물러나 겨울을 나자고 육군 최고사령부(OKH)에 건의하였다.

이는 중부집단군만이 아니라 동부전선의 지휘관들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겪고 있는 애로사항이었다. 레닌그라드 진입을 포기한 북부집단군은 모든 것이 얼어붙어 더 이상 작전을 펼칠 수 없을 지경이었고, 남부집단군은 천신만고 끝에 점령한 로스토프(Rostov on Don)를 포기하고 미우스(Mius) 강 서쪽으로 후퇴하려 하였을 정도였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국지적 탐색전을 펼친 주코프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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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기회를 엿보던 주코프는 마침내 공격 명령을 하달하였고 1941년 12월 5일 소련은 독소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전략적 공세를 벌였다.



12월 5일 새벽 3시, 모든 준비를 완료한 서부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Kalinin Front)이 영하 25도의 맹추위 속에서 진지를 박차고 나와 공격을 시작했다. 개전 후부터 지금까지 소련군은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앞으로만 달려 나갔던 적이 많았지만 사실 군사적으로 의미를 두기 힘들 만큼 과정이나 결과가 무의미했다. 따라서 이번이 독소전쟁 이래 소련이 행한 최초의 전략적 공세였다.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오는 엄청난 소련군의 모습에 독일군은 경악하였다.




현지 사수를 명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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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장비들은 혹한의 날씨에도 무리 없이 작동하였다. 이처럼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가동률이 좋아 공세로 나설 수 있었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지쳐서 멈춰 있던 상황이었지만 보크를 비롯한 중부집단군의 일선 지휘관들은 소련이 반격할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던 차여서 충격은 더욱 컸다. 독일은 지금까지 공세만 하던 입장이라 제대로 된 방어 시설이 없었다. 얼어붙은 소총과 대포는 작동 불능이었고 전차 또한 불을 피워 엔진을 녹이고 시동을 거는 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그러는 사이에 소련군이 진지를 넘어 쇄도하여 들어왔다.

당시 소련군은 전차와 항공기 수에서 독일군보다 열세였지만 가동 능력 면에서는 훨씬 앞섰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독일군과 달리 소련군의 야포, 전차, 트럭, 항공기들은 혹한 속에서도 문제없이 작동되었고 병사들도 두터운 방한복을 껴입고 있었다. 일선에서의 보고에 히틀러는 경악하였지만 더 이상 모스크바로 진격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여야 했다. 아니 오히려 독일군이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다.

총탄과 식량, 그리고 연료를 운반하는 열차는 눈보라에 막혀 100여 킬로미터 후방에 있었고 수송기도 날아오를 수 없었다. 독일은 전투를 치르지 않더라도 서서히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다. 보크는 보급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보급품이 있는 곳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일단 재정비하겠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거의 동시에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도 유리한 위치까지 후퇴하겠다고 육군 최고사령부(OKH)에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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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쫓는 독일군의 모습. 제대로 된 방한 장비가 부족하여 비전투 손실이 엄청났다.



12월 8일, 히틀러의 대답이 나왔다. 그는 총통 명령 제39호를 하달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현지를 사수하라고 엄명하였다. 군부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후퇴가 패주로 연결되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특히 서둘러 후퇴를 하면 필연적으로 많은 중장비를 유기하여야 하는데, 이는 독일에게 상당히 치명적이라 보았다. 병사의 목숨보다 전쟁 장비를 귀하게 여겼을 만큼 히틀러도 스탈린 못지않게 잔인한 독재자였다.




기사회생한 모스크바



소련의 맹공이 한창 이어지던 12월 중순이 지나자 기온이 영하 30도를 넘어서기 시작하였고 동상에 걸린 13만여 명의 독일군이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결국 도망가거나 항복하는 것 외에 지치고 추위에 얼어붙어 있던 독일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Walther von Brauchitsch)는 이러한 일선의 상황을 총통에게 보고하면서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후퇴를 건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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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현지를 사수하라고 명령하였지만 지치고 혹한에 노출된 최전선의 독일 병사들이 버틸 수 있는 여력은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과연 100킬로미터를 후퇴하면 그곳은 따뜻하단 말인가?”라며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히틀러는 작전상 불가피한 후퇴를 패배와 동일시하기 시작하였다. 12월 15일, 그나마 히틀러와 말이 통했던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작전부장 요들(Alfred Jodl)이 제한적인 철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지만 단지 북부집단군이 볼호프(Volkhov) 강까지 물러나는 것을 허락한 것이었다.

그 외의 중부집단군을 비롯한 여타 부대들은 여전히 현지를 사수하여야 했다. 12월 15일, 소련군이 클린과 칼리닌 일대의 독일군을 100~200킬로미터 밖으로 밀어내면서 모스크바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결국 가만히 앉아 몰살을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구데리안을 비롯한 일부 지휘관들은 소신껏 부대를 후퇴시켰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물리적으로 현지 사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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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소련 공세 직전의 전선 상황. 독일 제56장갑군단이 모스크바 30킬로미터 부근까지 접근하였으나 전선이 정체되었고 반격 준비를 완료한 소련군의 맹공이 시작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독일 제2기갑군이 툴라 외곽에 형성된 포위망을 풀고 오렐 방향으로 후퇴하자 소련 서부전선군이 칼루가에서 므첸스크(Mtsensk) 사이의 간격으로 신속히 파고들어 갔다. 동시에 모스크바 북부를 담당하던 칼리니 전선군이 독일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경계를 가르고 스몰렌스크 방향으로 내려왔다. 이로 인하여 르제프(Rzhev) 일대에 위치한 30여만의 독일 제9군과 제4기갑군이 포위망에 갇힐 위기에 빠졌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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