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1941년 모스크바 전투 [6] - 히틀러의 야욕이 좌절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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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961회 작성일 16-02-0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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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사령관이 된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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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제2대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브라우히치(좌)와 히틀러. 모스크바 공략 실패의 책임을 물어 브라우히치를 해임한 히틀러는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이 되어 전선을 직접 진두지휘하였다.



소련의 몰락이 바로 눈앞에 와 있다고 생각했던 히틀러는 이런 반전에 분노하였고 화풀이의 희생양을 찾으려 했다. 그는 군부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며 세 명의 집단군 사령관을 비롯한 무려 70여 명의 장성들을 파면 또는 해임시켰다. 지난 1940년 프랑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직후 의기양양했던 히틀러는 육군에서만 무려 8명의 장군을 원수로 승진시켰었다.

당시 육군에는 현역 원수가 없었고 공군 총사령관이자 나치 권력의 2인자 중 하나였던 괴링(Hermann Goring)만이 독일 군부 내에서 유일하게 원수 계급장을 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임명한 원수 중 절반을 일거에 날려버릴 만큼 히틀러의 분노는 대단하였다. 그 절정은 12월 19일 브라우히치를 쫓아내고 히틀러 본인이 육군 총사령관 자리를 직접 차지한 것이었다. 이는 제2차 대전 중 대단히 의미가 컸던 사건이었다.

독일에서 군부는 또 하나의 거대한 권력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육군은 핵심이었다. 군국주의 성향이 강하였던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의 주체가 된 이후부터 군부의 힘은 더욱 막강해졌고 그 정점이 바로 제1차 대전이었다. 독일 군부는 황제나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전쟁을 마음껏 수행하였고 전쟁 말기에 이르러서는 참모차장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처럼 독재 권력을 행사하는 이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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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3월 7일 비무장지대였던 라인란트에 진주한 독일군. 나치 정권 초기만 해도 히틀러가 협조를 구하는 데 애를 먹었을 만큼 군부의 위상은 막강했다. <출처: Bundesarchiv>



패전 후 위상이 많이 축소되었지만 정권 초기에 히틀러도 눈치를 많이 보았을 만큼 군부의 힘은 여전하였다. 흔히 나치 독일 최초의 도발로 거론되는 1936년 라인란트(Rheinland) 점령 당시만 해도 히틀러는 프랑스의 대응이 있을 경우 곧바로 철수한다고 군부에 약속한 후에야 간신히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후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1)처럼 숙청 등을 통해 통제를 강화하였지만 그렇다고 군부가 고분고분 명령에 따랐던 것은 아니었다.




통수권자의 상반된 처신



폴란드 전역을 점령한 직후인 1939년 10월 히틀러가 프랑스 침공전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였을 당시 군부의 반발은 매우 극심하였다. 당시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무려 9번이나 작전을 연기시켰을 만큼 신중했다. 객관적으로 독일이 프랑스를 압도할 상황이 아니어서 그랬던 것인데, 히틀러의 요구가 너무 집요하자 나라를 말아먹을 행위라고 반발하며 일각에서는 은밀히 쿠데타 모의까지 꾸몄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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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6월 22일 파리를 방문한 히틀러. 프랑스 침공전에서 승리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후부터 군부에 대한 히틀러의 간섭은 갈수록 커졌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하지만 히틀러가 당시 소수 의견이던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의 낫질작전을 적극 지지하며 프랑스 침공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일조한 후부터 위상이 바뀌었다. 이후 독일의 승리가 계속될수록 그의 간섭이 커졌던 반면 군부는 서서히 위축이 되어 갔다. 브라우히치는 자신의 신세가 마치 총통의 전령 같다고 한탄하였지만 1941년 가을까지 히틀러는 형식상으로나마 육군 최고사령부(OKH)를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군부를 통제했었다.

그러했던 히틀러가 이제부터 전선을 직접 관리하겠다며 스스로 독일 육군 총사령관에 오른 것이었다. “내가 관여하여야 일이 잘 풀릴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야전 지휘관이 될 수밖에 없다”고 그럴듯하게 변명하였지만 이러한 히틀러의 폭주를 막을 이는 독일에 없었다. 이제부터 유럽에서의 제2차 대전은 히틀러에 의한, 히틀러를 위한, 히틀러의 전쟁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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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된 패배로 말미암아 의기소침해진 스탈린은 히틀러와 달리 군에 대한 간섭을 줄여 나갔고 두 독재자의 이처럼 상반된 행보는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출처: Bundesarchiv>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즈음은 스탈린이 군부에 대한 통제를 줄여 나가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스탈린은 패배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장군들을 처형할 만큼 극성스럽게 전쟁을 직접 진두지휘하였지만 지금까지 있어 왔던 수많은 패배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여야 했다. 군부에 대한 히틀러와 스탈린의 이처럼 상반된 행보는 결국 독소전쟁의 승패를 가른 여러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군부 숙청의 결과



그런데 이러한 히틀러의 대대적인 군부 숙청은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였다. 일선 지휘관들이 대거 바뀌고 극렬하게 방어에 나서면서 소련의 진격이 멈춘 것이었다. 소련의 공세가 둔화될 시점이긴 했지만 일부에서는 이 때문에 히틀러의 명령이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히틀러에게 일종의 마약이 되어 이후 무조건 현지 사수를 외치다가 수많은 비참한 패배를 자초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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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사수 명령은 소련의 공세를 둔화시키는 데 크게 일조했지만 이후 비참한 패배를 자초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출처: Bundesarchiv>



독소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전략적 공세에 나섰던 소련군의 진격도 34일 만인 1942년 1월 7일 중단이 됐다. 소련군 역시 후속 보급 등의 문제로 더 이상 앞으로 진격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련이 독일의 약점을 파고들어 공세에 나서긴 했지만 전력이 월등한 것은 아니었다. 주코프의 목적은 일단 모스크바를 방어해 내는 것이었지 독일군의 섬멸은 아니었고 사실 그런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이유 때문에 르제프와 브야즈마를 연결하는 일대에 형성된 불완전한 거대한 포켓은 이후 1943년 봄까지 양측이 치열하게 충돌한 격전의 장으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모스크바 전투는 이후 더 많은 피를 요구하였다. 일부 자료에서는 이후의 격전도 모스크바 전투의 연장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이때까지 입은 양측의 피해를 모두 합한다면 가히 모스크바와 그 주변은 독소전쟁 최대의 지옥이었다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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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제프와 브야즈마 일대에 몰려 있던 독일 제9군과 제4기갑군은 포위될 위기에 처하였다. 하지만 1942년 1월 7일 소련의 공세가 중단되면서 이렇게 형성된 포켓을 놓고 엄청난 혈전이 계속 벌어졌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벼랑 끝까지 몰렸던 소련은 최초의 전략적 승리를 거머쥐면서 극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특히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없는 상태에서 얻은 승리였기에 더욱 의의가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라스푸티차나 혹한 같은 홈 코트의 이점 덕분에 승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석 달 동안 포로, 전사상자를 포함한 인명 피해가 120여만 명으로 추산될 만큼 엄청난 희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반면 독일은 소련의 절반 정도 피해를 입었지만 당시까지 최악의 전과였다.




모스크바 전투의 의의



패했을 때는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독소전쟁에서는 소련이 승리하였을 때도 이처럼 피해가 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전략, 전술, 작전, 무기, 병사들의 능력 차이 같은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독일을 물리치겠다는 소련 위정자들과 국민들의 굳은 의지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엄청난 희생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항전 의지는 제2차 대전의 향방을 가를 만큼 대단한 힘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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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7일 붉은 광장에서 열린 1941년 퍼레이드 70주년 기념 재현 행사의 모습. 이처럼 모스크바 전투는 러시아인들에게 의미가 컸던 전투다.



독소전쟁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그중에는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극적인 전투들도 많았다. 노도와 같았던 독일의 진격을 막아내고 전선을 정체시키는 데 성공한 1941년 겨울의 모스크바 전투도 분명히 여기에 해당되는 기념비적 전투였다. 비록 독일군을 패퇴시켜 소련 땅 밖으로 몰아낸 것은 아니었지만 독일이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세를 펼치는 데는 6개월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소련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 정복하려던 독일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동계 전투 준비를 게을리하여 곤욕을 치렀다고 이미 여러 번 설명하였듯이 애당초 독일은 거대한 소련을 침공하면서 오랫동안 싸울 생각이 없었다. 단지 숫자상으로만 본다면 독일은 최초에 동원한 병력이나 보급품을 모스크바까지 오면서 보충 없이 계속 소모만 시켜온 것과 같았다. 한마디로 만용의 극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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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최초로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아직도 전쟁은 많이 남아 있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 했다.



반면 지난 6개월 동안 계속 밀리며 얻어맞기만 했던 스탈린은 이제부터 침략자를 격퇴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소련군이 독일군을 밀어붙이고 공간을 확보했지만 상대를 섬멸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앞으로도 3년 이상을 더 싸워야 할 만큼 독일은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이처럼 강철과 강철이 계속 부딪히면서 동부전선은 더 많은 피로 얼룩질 운명이었다.



독일군 총사령관 블롬베르크와 육군 총사령관 프리치가 개전시기를 놓고 히틀러와 충돌을 일으키자 나치가 이들에게 누명을 씌워 강제로 퇴임시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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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6.01.08.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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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총사령관 블롬베르크와 육군 총사령관 프리치가 개전시기를 놓고 히틀러와 충돌을 일으키자 나치가 이들에게 누명을 씌워 강제로 퇴임시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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