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청일 전쟁(2) - 한반도, 300년 만에 중-일의 전쟁터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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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455회 작성일 16-02-0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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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 해전에서 가라앉는 청나라의 군함.



목차


목차

1.청일 전쟁(1)

2.청일 전쟁(2)

3.청일 전쟁(3)

4.청일 전쟁(4)




이미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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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전쟁으로





“홍계훈도 패했습니다. 적당이 기어코 전주부(全州府)에 들어갔습니다.”

1894년 5월(음력 4월), 호남에서 올라온 급보를 들은 조선 조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결국 오랫동안 꺼려온 결단을 내렸다.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한 것이다. 초토사로 고종 부부의 신임이 두터웠던 홍계훈을 뽑고, 정예 병력을 붙여 내려보냈건만 동학군에게 대패하고 조선왕실의 뿌리 격인 전주가 동학군 손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내린 결단이었다. 결국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이 원병 요청 결정이 성급했다, 조정이 지나치게 겁을 먹는 바람에 큰일을 그르쳤다는 평가가 있다.

원병 요청 직후, 홍계훈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동학군을 공격해 이번에는 상당한 전과를 올린다. 이로써 하늘을 찌를 듯하던 사기가 수그러들고, 청이 개입하리라는 소식마저 전해지자 전봉준은 조정과 화해하기로 결정, 홍계훈과 회담하여 ‘전주화약’을 맺고 병력을 해산해 버린다. 북양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천오백 명 가량의 청나라 군대가 아산에 도착한 바로 며칠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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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을 시작하며 전봉준이 돌린 사발통문.



하지만 동학의 무서운 성장세에 조정은 일찍부터 큰 근심을 갖고 주시해 왔으며, ‘여차하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한다’는 방안 역시 약 1년 전부터 검토되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부패와 기강 해이에 찌든데다 창을 거꾸로 잡고 조정에 대항하는 모습까지 보여준(임오군란. 그 이전에도 소규모의 군란은 여러 차례 있었다) 조선군은 유사시에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동학의 심상찮은 움직임 뒤에는 대원군이 있는 게 거의 확실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힘을 빌리면 가장 좋겠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알렉산드르 3세 황제가 서거하고 니콜라이 2세가 새로 즉위하는 어수선한 상황이었기에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면 태평천국의 난 때 청이 영국 병력의 힘을 빌렸듯, 우리는 청의 힘을 빌리면 어떨까? 반대 의견은 외국 군대가 우리 땅에 주둔하는 일은 어쨌든 꺼림칙한 일이고, 이를 계기로 청이 조선을 더욱 압박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왕후는 ‘천진 조약이 있다’고 생각했다. 1885년 청일간에 맺은 천진 조약에 따르면 어느 한 쪽이 조선에 파병하면 다른 한쪽에 그 일을 통보해야 한다. 그리고 파병의 원인이 된 분란이 종식되면 곧바로 철수해야 한다. 따라서 청이 파병한 다음 동학 진압 뒤에도 계속 병력을 주둔하거나 이권을 빼앗으려고 할 때는 일본이 견제해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속셈을 전혀 모르는 채 꾸었던 헛된 꿈이었다. 일본은 신임 외상 무쓰 무네미쓰와 주조선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를 중심으로 동학 운동의 향방을 예의 주시하며, 이를 일본의 조선 개입 빌미로 써먹을 속셈으로 ‘천우협’이라고 하는 우익단체를 통해 동학과 선을 이으려 하고 있었다(‘척양척왜’를 신조로 하는 동학군에게 통하지는 못했지만). 무쓰 무네미쓰는 도사 번 출신 유신지사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이난 전쟁을 일으켜 메이지 정부에 반역했을 때 가담했다가 한때 숙청된 뒤 재등용된 사람이었으며, 오토리 게이스케는 보신 전쟁 때 홋카이도의 고료가쿠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다가 항복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 다 메이지 정부를 반대했던 전력이 있다 보니, 어떻게든 큰 공을 세워 전과를 씻으려는 생각에 급급했다(특히 무쓰가 심했다). 그래서 새로 수상이 된 이토 히로부미나 군부의 최고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아직도 신중론 위주였던 데 비해, 이들은 어느 정도는 훈령을 어겨 가면서까지 동학을 이용해 전쟁을 일으키려고 승부수를 걸었던 것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청의 파병만 기다리고 있던 무쓰 등은 6월 6일, 청나라의 파병 통지를 받자마자 그 다음 날로 일본군 파병을 개시했다. 제물포에 상륙한 병력은 처음에는 4백에 불과했으나 추가 파병이 거듭되어 약 4천에 달했다. 경악한 조선과 청 정부는 일본에 ‘이것은 천진 조약의 내용과 어긋난다’고 항의했으나, 일본은 ‘한쪽이 파병하면 다른 한쪽도 파병할 권한을 갖는다는 게 천진 조약의 의미다’라고 반박하는 한편 ‘청은 속국의 치안 유지를 위해 파병한다고 했는데, 우리와 맺은 강화도 조약 이래 조선은 엄연한 자주독립국이다. 청군은 즉각 철수해야 한다!’고 역공을 가했다. ‘동학란은 이제 수그러들었으니, 천진 조약에 따라 두 군대 모두 철수해야 한다’는 조선의 주장에 대해서도 ‘조선이 부패하고 민생을 외면했기 때문에 동학이 일어난 게 아닌가? 조선의 체제를 개혁하기 전에는 분란이 끝났다고 볼 수 없고, 절대로 철수할 수 없다’는 억지 주장으로 맞받았다.

서구 열강에 대해서도 직전에 벌어진 사건, 일본 망명객이던 김옥균이 상해의 외국인 조계에서 조선 정부가 보낸 홍종우에게 암살된 사건을 들먹이며 ‘조선이란 나라는 이처럼 만국공법을 무시하며 문명개화된 나라의 사고방식에 무지한, 미개한 나라다! 우리 일본이 이번에는 책임지고 이 나라를 뜯어고쳐 놓을 테니 성원해 달라’는 메시지를 날렸다. 마치 이라크 전쟁의 명분을 대량살상무기 대신 ‘불량국가 이라크를 뜯어고쳐 민주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라 했던 미국을 방불케 하는 자세였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던 영국에 대해서도 ‘이대로 두면 조선이 언제 러시아에게 넘어갈지 모른다’는 설득 끝에 ‘상해 일대의 영국 영역에 손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청과의 전쟁을 묵인해 준다는 약속을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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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암살되어 조선으로 인도된 김옥균의 시신을 조선 조정은 능지처참한 다음 효수하였다. 일본은 이 일을 전쟁의 한 명분으로 활용했다.



수적으로도 일본에 뒤지는 청군이 상황을 보느라 아산에서 미적거리는 동안, 일본군은 제물포에서 한양으로 진군하여 용산과 만리동에 진을 쳤다. ‘만국공법에 따르면 전쟁 중인 적대국이 아닌 이상 상대국의 수도에 병력을 진입시킬 수 없다’는 항의에도 아랑곳없었다. 그리고 오토리 공사의 이름으로 조선 정부에 ‘즉각 받아들여야만 할 폐정개혁안’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는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고, 여러 편제로 나뉘어 있던 함대들을 하나로 합쳐 연합함대를 구성했다. 이는 선전포고도 없는 상황에서의 명백한 전시 행동으로, 역시 만국공법에 위배되었다. 조선과 청을 만국공법에 무지한 미개국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공법을 천연덕스럽게 어기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일본의 노골적인 도발에도 청 정부는 어떻게든 전쟁만은 피해 보려 했다. 아니, 젊은 황제(광서제)와 다수의 문인 관료들은 일본에 본때를 보여주자고 한껏 격앙되어 있었지만, 청의 최고 실력자들인 서태후와 이홍장이 소극적이었다. 서태후로서는 환갑을 맞이하는 해에 전쟁 따위를 벌이고 싶지 않았고, 이홍장은 청의 군사력이란 속빈 강정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1888년, 정식으로 북양함대를 창립하고 전력을 대내외에 공개했을 때만 해도 일본 해군은 보유 선박 수, 총톤수, 함포 대수, 선박의 노후도 등 어떤 기준에서도 북양함대에 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총 27척으로 청 해군과 수적으로 대등해졌을 뿐 아니라 1888년 당시의 군함은 4척만 남기고 모두 신형으로 교체했을 정도로 면모를 일신해 있었다. 그에 비해 1888년 이후 북양함대에 증원된 군함은? 보조선박 약간을 제외하면 단 한 척도 없었다! 그나마 유지보수나 선원의 훈련 등에 있어서 열악함을 면치 못했다.

7월 2일, 싸움을 미루는 이유를 밝히라는 광서제의 닦달에 이홍장이 올린 상소에는 “북양함대 중 해전에 견딜만한 배는 8척 뿐이옵니다. 전쟁에 대비하려면 급히 2~3백만 냥의 군비가 필요하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광서제는 격노하여 어쩌다가 이 지경을 만들었느냐고 이홍장을 타박했지만, 이홍장으로서는 억울한 질타였다. 1889년에 광서제가 성년이 되면서 명목상으로는 섭정을 그만둔 서태후가 ‘은퇴 후 여생을 보낼 별장’으로 ‘진시황의 아방궁을 능가하는’ 이화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그 비용에 북양함대의 예산을 빼돌렸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화원 낙성식에 들어간 비용만 2천만 냥에 달했다는데, 정부에서 북양함대에 배정하는 1년 예산이 150만 냥이었으니 함대 전력에 물이 줄줄 새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은 이홍장이 군비 비축분을 점검해 보니 정원호와 진원호에 적재된 포탄이 단 3발씩뿐이라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어이없는 부패’에는 나름의 ‘정치적 고려’도 없지 않았다. 사실 아무리 서태후의 권위가 막대하다고 해도 여러 친왕 이하 왕실의 고위인사들과 고위관료들이 단합하여 예산 전용을 막아내려 했다면 뜻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주 출신 왕족들과 고위관료들은 이를 못본체했다. 그 까닭은 ‘이홍장 등 한인 출신들을 견제’하려는 데 있었다. 명나라를 정복했던 만주 팔기군은 이미 허울만 남아 있었으며,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세력은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 관료들이 사적으로 모집하고 지휘한 향용(鄕勇)이었다. 만주족의 청왕조를 한족의 북양군이 지키고 있는 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홍장에게 이대로 계속해서 힘을 실어준다면? 장차 왕조를 쓰러트리고 한족의 세상을 만들려고 하지 않을까? 그래서 만주족 고위층은 북양함대가 속빈 강정이 되어 가도록 유도하지는 않았지만, 문제로 삼지도 않았다. 많은 한인 관료들도 이홍장의 실패를 은근히 기대했다. 강유위(康有爲) 등 변법파는 서태후, 그리고 그녀와 결탁한 이홍장이 중국 혁신의 걸림돌이라고 믿었다. 재야의 사상가들, 일반 민중도 ‘만주족의 왕조에 죽도록 충성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족주의, 공화주의 혁명을 꿈꾸던 손문(孫文) 등은 청일전쟁이 일어났으면, 그래서 청왕조가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으면 하고 적극적인 기대마저 품었다.

이처럼 중국은 그 막대한 인력과 물자가 갖는 잠재력, 그리고 수십 년 동안의 양무운동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임하여 힘을 효과적으로 모으지 못했다. 일본은 달랐다. 원세개는 일본에서 집권당과 야당의 정쟁이 치열함을 보고 ‘자중지란에 빠져 있으니, 전쟁 같은 것을 할 여력이 없으리라’고 여겼지만 거꾸로 그런 정쟁이 전쟁을 부추겼던 것이다. 큰 공에 눈이 먼 무쓰 무네미쓰 등만이 아니었다. 이토 히로부미도 애써 출범한 자신의 정권이 여러 의혹 사건으로 뿌리채 흔들리자, 전쟁으로 난국을 타개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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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왼쪽)와 서태후(오른쪽). 그들은 서로 생각과 입장이 달랐으나 청일전쟁 당시 최고 실권자로서 안팎의 공격과 의심을 받았다.







경복궁에서 전쟁이 시작되다



1894년 7월 23일 자정, 야마구치 휘하의 일본군 1개 대대가 한양의 주둔지에서 출격했다. 목표는 경복궁이었다. 사흘 전에 개혁안을 무조건 수용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조선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낸 오토리 공사의 지휘에 따라, 무력으로 조선 정부를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중 일부는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을 도끼와 톱으로 때려부수고 오전 5시경 경복궁에 진입하고는, 밤이슬 내리는 궁궐을 달려가 먼저 반대 방향인 건춘문에서 동료들이 진입하도록 도왔다. 조선 수비병들과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는 사실상 청일전쟁의 첫 전투였다. 약 4시간 동안의 공방전 끝에 경복궁은 제압당했고, 고종과 명성왕후는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오토리 게이스케는 대원군에게 실권을 위임하라고 그들을 위협했으며, 대원군은 집권 때만 해도 그토록 비난했던 일본의 힘을 빌어 다시 권좌에 앉았다. 그리고 민씨 일파를 숙청하고, 일본의 의지에 따라 아산의 청군에게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고 통보했다.

그 동안 이홍장은 ‘조선을 남북으로 갈라 반씩 나눠갖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일본에 하기도 하고, 러시아에게 중재를 애걸하기도 하며 전쟁을 피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러시아에게 너무 기대는 모습에 실망한 영국은 청과 일본 사이에서의 저울질을 그만두고 확실히 일본을 응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어코 경복궁 점령 소식을 듣자, 이홍장은 장탄식을 한 다음 아산의 청군에 전투 준비를 지시하고, 만주에 대기 중이던 풍옥곤, 좌보귀, 위여귀, 풍신아의 4군에게 남하하여 한반도로 진입하라고 명령했다. 목표는 평양이었다. 평양에서 태세를 정비한 다음 아산의 청군과 남북으로 일본군을 협공할 계획이었다.

당시 아산에 주둔 중이던 청군의 사령관은 섭지초(葉志超)였는데, 1차 증원 뒤에도 삼천 남짓했던 자체 병력으로 협공전을 치르기가 부담스러워 본국에 2차 증원을 요청했다. 이에 대고(大沽)에서 출발한 고승(高陞)호는 병력 천이백과 보급품, 장비를 싣고 아산으로 향했다. 북양함대의 조강(操江)호가 호위했으며, 아산에 미리 정박 중이던 제원(濟遠)과 광을(廣乙)이 마중나와 함께 아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7월 25일, 이들은 순찰 중이던 일본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쓰시마 호와 마주쳤다. 일본 해군은 곧바로 제원과 광을에 포격을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의 전투 끝에 광을호는 화약고를 직격당해 대파된 다음 떠돌다가 좌초했으며, 제원호는 도주했다. 다른 일본 군함에 공격을 받지 않으려 백기와 일장기를 내걸고 도주하는 모습에 일본군은 비웃음을 날렸다.

조강호는 나포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문제는 고승호였다. 비무장 상선인 이 배는 수송선으로 쓰려고 영국에서 빌린 배로, 국적은 여전히 영국이었다. 수십 년 전 역시 영국 국적인 청나라 배, 애로 호를 건드렸다 하여 제2차 아편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훗날 러일 전쟁에서 명성을 날리게 될 나니와 호의 함장, 도고 헤이하치로는 배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 청국 병력을 태운 채 일본까지 따라오라고 요구했다. 고승호에 승선해 있던 영국인 골즈워디 선장은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청국 병사들이 이를 거부하자, 도고는 포격 명령을 내렸다. 고승호는 순식간에 불덩어리가 되어 침몰했으며, 유럽인들이 물에 뛰어들어 일본 배 쪽으로 헤엄쳐 가는 모습을 본 청국 병사들은 스스로 물에 잠기는 중에도 악에 받쳐 총격을 가했다. 나니와호는 보트를 내려 유럽인들을 구해주었으나, 청국 병사들은 내버려 두었다. 결국 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북양함대의 일부가 격파되고 청국 병사 천이백 명 이상이 황해에 수장되었다. 이것을 풍도 해전이라 하며, 많은 전쟁사가들이 청일전쟁의 시작으로 친다.

풍도 해전 소식에 아산의 청군은 망연자실했으며, 그들을 공격하기 위한 일본군이 7월 28일, 오시마 요시마사가 이끄는 4천여 병력으로 한양을 출발했다. 섭지초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섭사성(葉士成)에게 일부를 이끌고 현재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해당하는 성환에서 적을 방어하도록 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과 함께 공주성에 머물렀다. 섭사성은 성환 뒤편의 월봉산에 6개의 진지를 구축하고는, 주변을 감아도는 강의 다리를 부수고 둑을 무너뜨려 주변의 논에 모두 물을 채움으로써 적의 진격을 늦추려 했다. 저녁 나절 성환에 도착한 일본군은 청군의 방어태세가 삼엄함을 보고 허를 찌르기로 했다. 종일 행군한 군대에게 쉴 시간도 주지 않고 야습을, 그리고 양동작전을 지시한 것이다.

다케다 중좌 휘하의 우익은 보병 4개 중대, 공병 1개 중대로 새벽 세시 반부터 청군 진영의 왼편을 맹공했으며, 청군이 그들과 맞서는 데 정신이 없는 사이에 오시마 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좌익은 보병 9개 중대, 포병 1개 대대, 기병 1개 중대 병력으로 우회해 새벽 5시부터 중국군 우익 측면과 후방을 공격했다. 허를 찔린 청군 진영은 무너져 버렸고, 공주의 섭지초는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휘하의 천오백 병력을 이끌고 평양으로 달아나 버렸다. 풍도 해전으로 병력 보강이 좌절된 시점부터 그는 전의를 잃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88명의 전사자만 내면서 청군 약 5백을 쓰러트리고 아산을 완전 장악했다.

8월 5일에 한양에 개선한 일본군은 청군이 버리고 간 대포와 깃발들을 전시하며 분위기를 돋웠다. 전의가 불충분한 적을 상대로 한 소규모 전투였으나 의의는 컸다. 임진왜란 이래 일본이 3세기 만에 치른 중국과의 전쟁에서 첫 전투이자, 징병제를 실시하고 유럽식으로 훈련시킨 군대의 첫 전투에서의 완승이었기 때문이다. 이토 내각은 총을 다리에 맞고도 논두렁에 서서 부하들을 독려한 마츠사키 대위나, 숨을 거두기 전까지 나팔을 계속 불었다는 시라카미 겐지로 일등병 등의 사례를 영웅화하기도 했다. 8월 1일, 일본은 청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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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 전투. 이로써 남북으로 일본을 압박하려던 청의 전략은 실패했다.






소리 없는 전쟁



전쟁 선포 후 9월 중순까지 전국은 두드러진 충돌 없이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중동(靜中動)의 소강이었다. 일본은 8월 17일 열린 각의에서 ‘조선 중립화냐, 조선 보호국화냐’를 놓고 최후의 논의를 가졌다. 결론은 보호국화였다. 그런 입장에 따라 사흘 뒤, 허수아비 조선 정부와 체결한 ‘조일잠정합동조관’에서 몇 건의 경제적 이익을 챙김과 함께 일본의 군사개입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선의였다고 명시하고, “본년(1894) 7월 23일 대궐 근처에서 일어난 양국 병원(兵員)의 우연한 충돌사건은 피차가 이를 추궁하지 않도록 한다.”는 조항을 두어 경복궁 점령이라는 사실상의 전쟁 행위에 대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이는 단순한 면죄부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 전쟁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도발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저지하는 청을 물리치려 일본이 일종의 십자군처럼 나선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8월 26일에는 ‘조일동맹조약’을 맺어 조선 정부를 청일전쟁의 한 축으로 끌어들이면서, 조선에 주둔하거나 거쳐 가는 일본군이 조선 정부의 이름으로 민간에서 식량과 물자를 징발할 자유를 부여했다. 그리고 일본은 연합함대로 발해만에서 가볍게 치고 빠지는 움직임을 반복하며 북양함대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한편, 부산, 원산으로 부지런히 병력을 수송했다. 본진이 있는 한양에서 굳이 멀리 떨어진 항구로 병력을 실어나른 것은 그래도 북양함대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데, 최종적으로 그 두려움을 잊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직접 지휘하는 1만 8천의 병력이 제물포에 상륙했을 때는 일본 본토의 병력이 거의 남아나지 않을 만큼 총동원되었다. ‘지금 어디서든 본토를 공격해 오면 꼼짝없이 전국이 유린될 지경’이라는 우려가 나올 만큼 이 전쟁에 젖먹던 힘까지 다했던 일본이었다.

한편 청은 일본군이 전세를 가다듬는 동안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일본 해군의 기만전술을 꿰뚫어보고 북양함대로 일본군 수송선을 공격하지도 않았으며, 부산과 원산에서 일본군이 먼 길을 행군하여 한양으로 모이는 동안 지상군으로 요격하지도 않았다. 사령탑에 앉은 이홍장이 ‘싸우면 대체로 질 것’이라는 패배의식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되도록 싸움을 피하고 전력을 보전하기로 하면서 외교 협상에만 골몰했던 점도 작용했으며, 청군 내부의 단합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점도 컸다. 8월 25일, 평양에 모여든 청군 병력을 총지휘할 사령관으로 이홍장은 성환 전투에서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난 섭지초를 낙점했다.

섭지초의 허위 보고 등으로 그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비범한 재능을 발휘해 상당수의 병력을 보전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가 이홍장과 동향인으로 같은 파벌에 속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을 한족이라고 불신하는 만주족 고위층들, 수구파라고 멸시하는 한족 소장파들 사이에서 기댈 곳은 혈연 지연뿐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지만, 그가 청일전쟁의 주역으로 내세웠던 정여창, 임태증, 원세개 등은 대부분 그와 사적으로 긴밀한 인사들이었다. 이런 정실 인사를, 더구나 아산의 청군을 말아먹은 패전지장을 총사령관에 앉히는 인사를 청군 내에서 좋게 볼 리가 없었다. 5군 29영, 1만 5천에 달하는 평양 주둔 청군은 알력과 분쟁으로 도무지 일사불란하게 전쟁을 수행할 상황이 못 되었다. 평양성 수비도 불안한 마당에, 한양으로 모여드는 일본군을 요격하려 병력을 출동시키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평양 전투



결국 9월 초, 일본 대본영은 평양 공격 명령을 내렸다. 오시마 소장 휘하의 5540명은 개성에서 북진하고, 다치미 소장 휘하 2160명은 삭령에서 북진, 사토 대좌의 3640명은 원산에서 서진, 노즈 중좌의 5400명은 한양에서 북진했다. 진군로 일대의 조선 땅은 공포에 휩싸였다. 특히 앞서 청군이 평양으로 퇴각하면서 온갖 노략질을 했던 한양-평양 가도에는 백성들이 남김없이 피난을 떠나 세상이 망해버린 듯 을씨년스러웠다. 평양의 청군이 그동안 완전히 놀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본래 이중삼중의 튼튼한 방벽으로 유명했던 평양 외곽에 요새를 여럿 증축해서 철옹성으로 만들어 놓았다. 9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한 이래 302년 만에 중국과 일본의 군대가 평양 성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일본군은 병력을 셋으로 나누고, 성환 전투 때처럼 야간 공격과 기만 전술로 평양 공략을 시작했다. 오시마 휘하의 혼성여단이 새벽 3시부터 북서쪽에서 맹공을 펼쳤고, 이들이 수비군의 정신을 빼놓는 사이에 오전 5시부터 북쪽의 삭령-원산 지대가, 오전 8시부터 남서쪽의 노즈 군단이 주공세를 펼쳤다. 아무런 차폐물이 없는 공격로에서 집중사격을 받은 오시마 여단은 너덜너덜해지도록 얻어맞았고, 지휘관 오시마까지 총을 맞고 쓰러질 때까지 분전했다. 삭령-원산 지대도 상황이 녹녹하지 않았는데, 청군 요새에서 맹렬히 돌아가며 총탄을 퍼붓는 캐틀링 기관포에 유산탄을 쏘며 밀어붙이다가 오전 7시 30분경 첫 요새를 점령했다. 가장 강력한 요새였던 모란봉은 8시에 떨어지고, 30분 뒤 현무문을 열고 평양 시내로 진입했는데 현무문 공략 때 하라다 일등병을 비롯한 11명이 빗발치는 총탄 속에 맨손으로 성벽을 기어올라가 성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전설로 남았다. 그러나 중국 측 자료와 종합해 보면 사닥다리를 타고 올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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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의 을밀대. 고구려 때부터 있었던 이 성루도 치열한 접전의 현장이 되었다.



청군 쪽에서는 섭지초, 위여귀 등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좌보귀(左寶貴)만이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이었다. 그는 목이 쉬도록 독전하며 일선에서 싸우다가 총알 세 발을 맞았다. 부축하는 부하들에게 ‘나를 여기서 데려다 다오’ 하는 좌보귀가 달아나려는가 보다고 순간 의심했지만, 그는 숙소로 가서 이민족 토벌의 상으로 조정이 내린 황포를 입으려는 것이었다. 최후의 힘을 짜내 황포를 입은 좌보귀는 부하들의 팔 안에서 숨을 거뒀다. 그 직후 현무문이 무너지고, 일본군이 쏟아져 들어왔다. 얼마 후, 섭지초는 명령을 내렸다. “백기를 올려라, 항복하라!” 북서쪽과 남서쪽의 일본군이 탄약을 거의 다 소진했을 때였다. 청군은 항복할 테니 퇴각을 허용해 달라고 청했고, 일본군 대표는 이를 거절했지만 퇴각한다면 굳이 쫓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를 내비쳤다. 그래서 청군이 탄약과 물자를 대부분 내버려두고 평양성을 나서 퇴각하자, 일본군은 그들을 급습하여 고양이가 쥐를 잡듯 일방적으로 유린했다.

평양성 전투의 청군 전사자 2천 명은 대부분 이때 발생했다고 한다. 반면 일본군 전사자는 162명으로, 대부분 희생양이 된 오시마 여단 소속이었다. 그러나 더 많이, 더 처참히 쓰러져간 사람들은 평양의 조선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주둔하고 있던 청군의 갖은 요구에 시달린 끝에, 지원부대로 전장에 강제동원되었다가 청군이 쏜 유탄에 맞거나, 일본군의 총알 세례를 받거나, 무너지는 성벽에 깔려 죽어갔다. 이 전투를 실제 목격했던 이인직은 이렇게 적고 있다.



북문 밖 넓은 들에 철환 맞아 죽은 송장과 죽으려고 숨 넘어가는 반 송장들은 제각각 제 나라를 위하여 전장에 나와서 죽은 장수와 군사들이라. 죽어도 제 직분이거니와, 엎들어지고 곱들어져서 봄바람에 떨어진 꽃과 같이 간 곳마다 발에 밟히고 눈에 걸리는 피난민들은 나라의 운수련가. 제 팔자 기박하여 평양 백성 되었던가. 땅도 조선 땅이요 사람도 조선 사람이라.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 싸움에 이렇게 참혹한 일을 당하는가. 우리 마누라는 대문 밖에 한 걸음 나가보지 못한 사람이요. 내 딸은 일곱 살 된 어린아이라 어디서 밟혀 죽었는가. 슬프다, 저러한 송장들은 피가 시내되어 대동강에 흘러들어 여울목 치는 소리 무심히 듣지 말지어다. 평양 백성의 원통하고 설운 소리가 아닌가. 무죄히 죄를 받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이요, 무죄히 목숨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이라. 이것은 하늘이 지으신 일이런가, 사람이 지은 일이런가. 아마도 사람의 일은 사람이 짓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이 제 몸만 위하고 제 욕심만 채우려 하고, 남은 죽든지 살든지, 나라가 망하든지 흥하든지 제 벼슬만 잘하여 제 살만 찌우면 제일로 아는 사람들이라.
- 이인직, [혈의 누]

평양 전투로 조선에서의 청-일 간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청군은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한 채 만주로 퇴각했으며, 일본군은 재정비를 마치고 그들을 쫓아 압록강을 넘었다. 한반도에서 아직도 일본군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은 열악한 무기와 전력으로도 의와 신념에 따라 다시 싸움터로 달려나온 사람들, 동학농민군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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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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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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