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청일 전쟁(3) - 일본, 파죽지세로 중국을 침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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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483회 작성일 16-02-0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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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전투. 일본은 전투에서 이겼으나 그 뒤에 자행한 학살로 국제적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목차


목차

1.청일 전쟁(1)

2.청일 전쟁(2)

3.청일 전쟁(3)

4.청일 전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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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의 비극





갑오(가보)세, 갑오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간다.


호남 일대에 유행했던 이 참요(讖謠)는 갑오년(1894년)에 궐기한 동학의 세력이 을미년을 지나 병신년(1896년)이 되면 소멸하고 말 것이라는 우울한 예언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는 예언보다 더욱 암울했다. 일단 해산했다가 일본의 국권 침탈에 분기한 동학도들은 지역별로 봉기하여 1894년 10월 말에 전라북도 삼례역에 집결했다. 평양 전투 후 청군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포기한 직후의 일이었다. 전주의 전봉준은 일본의 경복궁 점령 직후부터 ‘동학도의 힘만으로는 안 되며, 관과 민, 양반과 상놈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전라감사 김학진과 일종의 동맹을 맺고 대응책을 협의해왔다. 또한 내분 중이던 최시형, 손병희의 북접과도 화해하고 국난에 공동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남북접 연합군이 충청남도 논산으로 모이던 11월, 일본의 손아귀에 있던 정부에서는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토벌령을 내렸다. 일본군도 직접 나섰다. 한양, 평안, 황해, 충청, 전라 등의 주둔군에서 약간씩 차출하여 결성한 ‘동비(東匪) 토벌대’는 약 2천에 달했다. 수적으로는 10만이 넘는 동학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무기, 숙련도, 군율 등에서는 양상이 반대였다. 소수의 전쟁기계와 다수의 일반 민중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기계는 바야흐로 잔악무도한 살인기계로 모드 조정중이었다. “동학당은 기필코 섬멸하라.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살육하라. 그 근거지를 초토화시켜라” 대본영과 주둔군 사령관들이 잇달아 내린 명령이었다. 그런 명령을 내린 까닭에는 중국으로 옮겨간 전쟁 수행 중 후방에서 허를 찔릴 가능성을 최소화하려는 뜻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경계가 숨어 있었다. 만일 동학의 불길이 러시아와 인접한 함경도까지 번질 경우에는 러시아의 개입 명분이 생긴다는 생각에서, 마치 해충을 박멸하듯 동학도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여 없애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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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상황도.



11월 18일, 동학군은 목천 세성산에서 일본군 및 정부군과 처음 접전을 벌여 수백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기세가 오른 일본군과 정부군은 동학군을 남쪽으로 밀어내며 섬멸하기 위해 공주 쪽으로 진군했다. 한양으로 북상하던 전봉준도 공주로 향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격전지이기도 했던 웅치에서 맞붙은 결과 동학군은 후퇴해야 했으나, 김개남 부대의 합류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공격에 나서, 마침내 치열한 전투가 공주 문턱의 우금치에서 12월 5일부터 벌어졌다. 약 1만의 동학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일본군 1개, 정부군 3개 부대가 고지대에서 진을 치고 있는 우금치 계곡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무장은 동학군의 경우 선두의 몇 백 명이 화승총을 가졌고, 나머지는 창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소총(사거리만도 화승총의 5배였고, 발사 속도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대포, 캐틀링 기관포 앞으로 돌격했다. 평원이었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드는 동학교도들의 수적 우위가 앞선 화력을 끝내 밀어붙였을지도 모르지만, 우금치는 계곡이었다. 선봉이 완전 섬멸되자 잠시 공격을 중지했다가 다시 함성을 지르며 돌격, 다시 불을 뿜는 총과 포와 기관포, 다시 중지했다가 재돌격..... 이러기를 무려 40여 차례. 눈 내린 계곡은 온통 하얀 옷과 붉은 피로 덮였고, 적진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동학농민군은 약 7천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마지막 국면에서 일부 병력을 빼내어 공주를 치려던 계획도 분쇄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퇴각하는 동학군을 집요하게 추격하며 쏴 죽이고, 베어 죽이고, 때려 죽였다. 항복해도 잔인하게 처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봉준은 퇴각하며 기회다 싶으면 돌아서서 싸우고 또 싸웠지만, 대세는 기울어진 다음이었다. 그는 순창에 숨어 있다가 동료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갑오년이 아직 채 저물지 않은 12월 28일이었다. 전봉준, 김개남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처형된 다음에도 동학도들은 산발적으로 무장 투쟁을 계속했으나, 1895년 2월 17일의 대둔산 전투를 끝으로,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 서양과 일본 귀신을 이 땅에서 쫓아내려던 사람들의 싸움은 종식되었다.




황해 해전



조선에서 동학의 투쟁이 핏물 속에서 녹아내리고 있던 때, 청과 일본의 전쟁 무대는 중국으로 옮겨가 있었다. 그것은 육지에서 평양 전투가 일본의 압승으로 끝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며칠 뒤(9월 17일)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 황해 해전(또는 해양도 해전이나 압록강 해전)으로 일본이 제해권을 차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풍도 해전처럼, 황해 해전도 치밀한 계획에 따라 벌어진 전투는 아니었다. 순양함 1척과 어뢰정 10척의 보호 아래 청나라의 수송선단이 4천의 병력을 싣고 압록강 어귀로 향했는데, 도중에 정원, 진원 등 주력함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던 북양함대와 합류했다. 이들은 수송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환하려는데, 일본 연합함대와 마주치고 말았다. 일본군으로서도 뜻밖의 상황이었으므로, 전투 준비가 충분치 못한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작전을 짜내 대응해야 했다.

북양함대는 겨우 한 달 만에 가벼운 희생만으로 청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지금까지도 일본이 가볍게 보지 못하는 상대였다. 그만큼 규모가 컸고, 일본이 보신전쟁을 치르고 메이지유신을 마치느라 바쁜 동안 청나라가 구축해온 전력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난 십여년 동안 사력을 다해 해군력을 증강해왔고, 강도 높은 훈련으로 이날의 대회전을 준비해온 것이었다. 일본 함대에 동승했던 서구인들의 증언으로는 일본 해군은 매일 거르지 않고 사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 사실은 세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그만큼 실전에 임해 침착하고 기민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둘째, 그만큼 탄약 보급에 여유가 있었다(한때 군함마다 겨우 세 발의 포탄밖에 없었던 북양함대는 이후 급히 보강하긴 했으나, 아직도 충분하다고는 하기 어려웠다). 셋째, 연습만 내내 하다 보면 실전을 해보고 싶어 좀이 쑤시는 법이다. 그만큼 압록강 어귀에서 청 해군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일본 해군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싸우는 쪽을 택했다. 결코 우세하다고 할 수 없는 전력으로 말이다. 북양함대는 전투함 12척에 철갑함은 전함 2척(정원, 진원)을 비롯한 5척이었고, 연합함대는 전투함 수는 12척으로 같았지만 철갑함은 전함 후소(扶桑) 1척뿐이었다. 또 함재 중포도 청이 21문인데 비해 일본은 11문밖에 되지 않았다. 다만 일본 군함에는 속사포가 67문이나 되어 6문뿐인 청을 압도했으며, 평균 속력도 16노트로 14노트인 청보다 앞섰다. 결국 ‘한방’에서 우월한 북양함대에 맞서 빠르게 움직이며 끊임없이 공격해야 연합함대의 승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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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전 당시 두 함대의 기동 추이를 나타낸 그림.



그래서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 스케유키는 제1유격대장 쓰보이 고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함대를 종대로 ‘앞으로 나란히’ 시키는 단종진(單縱陣)으로 배치했다. 이에 맞서 북양함대의 정여창 제독은 정원, 진원을 중심에 두고 ‘옆으로 나란히’ 모양의 횡진(橫陣)을 치도록 지시했다. 일본 함대가 일점돌파를 시도하려는 줄 짐작하고, 마치 달려드는 동학군을 차례차례 쓰러트렸던 우금치의 일본군처럼 십자포화로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진해오던 연합함대는 도중에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북양함대의 오른쪽을 재빠르게 감아돌면서 있는 힘을 다하여 속사포탄을 퍼부어댔다. 그 서슬에 청 해군의 가장 오른쪽에 있던 초용(超勇)호가 격침되고, 양위(揚威)호도 대파되었다. 그러나 이런 기동은 반대로 일본 함대를 청 해군의 근접 사격 앞에 노출시키게 된다. 그러나 선두를 이끌던 쓰보이 고조의 유격함대는 적의 사격을 견디면서 ‘한 대 맞고 두 대 치는’ 식으로 북양함대 주변을 돌고, 또 돌았다. 결국 최후미의 히에이(比叡) 호와 하시타테(橋立) 호가 대열에서 탈락하며 격침될 위기에 몰렸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 사이에 한 발짝 뒤에서 기동하던 이토 스케유키의 연합함대 본진은 쉴 새 없이 포탄을 퍼부어 유격함대를 엄호하고, 북양함대를 사분오열시키려 들었다.

마치 곰 주변을 맴돌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늑대 떼와 같았던 이 해전은 곰이 일찌감치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늑대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 1단계는 기함 정원호가 첫 발포를 했을 때였다. 당시의 함포는 발사 순간 주변에 큰 충격파를 유발했는데, 초대형 중포가 발사되자 바로 위의 함교에 서 있던 정여창 제독이 충격파에 휩쓸려 나뭇잎처럼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는 목숨은 건졌지만 다리가 부러지고 허리도 크게 상해서, 전투 내내 지휘를 맡을 수가 없었다. 그를 대신한 외국인 교관 하네켄은 앞서 풍도 해전에서 고승호를 버리고 달아났던 사람인데, 해군이 아닌 프로이센 육군 장교 출신으로 해전에 대해서는 정통하지 못했다. 그나마 부실한 지휘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으련만, 30분 정도 지나 날아든 포탄 한 발이 이 희비극의 종막을 장식했다.

정원호의 신호기가 직격당해 파괴됨으로써 함대에 지시를 내릴 방법이 없어진 것이다. 질서정연하게 물러갔다 달려들었다 하는 연합함대 앞에서 북양함대의 배들은 각자 판단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북양함대가 먼저 진형을 잃고 분산되었고, 이를 본 연합함대도 진을 해체하고 각개격파에 나섬으로써 혼전 상황이 빚어졌다. 양 측의 ‘대표 선수’인 정원호와 마쓰시마(松島)호는 정면으로 부딪쳤다. 정원호의 중포탄이 마쓰시마의 화약고에 명중했으나 마쓰시마는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침몰하지 않았고, 마쓰시마가 쏜 속사포탄이 이미 두들겨맞을 대로 맞았던 정원호를 벌집으로 만들었으나 역시 세계 최대급의 중장갑함답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나 제원호는 선수를 돌리더니 혼자서 전장을 이탈해 꽁무니를 빼 버렸다. 풍도 해전에서도 일장기를 올리면서 치졸하게 도주했던 제원호였다. 함장 방백겸은 전투 후에 처형된다. 피해가 극심했던 광갑(廣甲) 역시 도주했으나, 도중에 좌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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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전 모습. 이 해전으로 일본은 제해권을 차지했다.



전투 시작 후 세 시간이 지났을 때, 일본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북양함대는 정원, 진원, 치원, 경원, 래원, 정원(靖遠)이 모두 불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초용, 양위가 격침, 제원, 광갑은 도주한 상태였다. 제원호의 수치를 씻겠다는 듯, 치원호는 불덩어리인 상태에서 요시노호를 향해 돌진했다. 들이받아 동귀어진하려는 생각이었으나, 침착한 대응 사격에 견디지 못하고 가라앉고 말았다. 잠시 후 경원호 역시 격침되었다. 승패는 이미 뚜렷했으며, 기함 마쓰시마의 피해가 심각하여 이토 사령관이 하시타테로 옮겨 타느라 공세가 뜸해진 틈을 타서 북양함대는 일제히 퇴각해 버렸다.

청 해군이 군함 5척을 잃고 850명 전사, 500명 부상의 피해를 입은 반면 일본 군함은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으며, 전사자 90, 부상자 200의 피해였다. 이것으로 북양함대의 그림자는 일본인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청나라 군대는 육해군을 가릴 것 없이 사기가 땅으로 떨어졌다. 황해 해전은 군사상으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동안 흔히 사용되던 횡진 대신 단종진이 유행하고, 화력만큼이나 기동력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또한 수백 발을 얻어맞고도 침몰하지 않은 정원호의 사례에서 역시 대형 철갑전함이 최고라는 ‘거포제일주의’가 수립되어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마침내 터져 나온 광기



황해 해전 이후 북양함대는 발해만 쪽 해군기지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못했으며, 일본군은 순조롭게 황해 뱃길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해 요동 반도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평양 전투를 치른 조선 내의 일본군이 육로로 중국 땅에 진입한다는 게 야마시타의 구상이었다. 그들은 10월 24일에 압록강을 넘었고, 29일까지 압록강 인근의 호산, 구련성, 봉황성, 화원구 등 요새지구들을 큰 피해 없이 빠르게 점령해 나갔다. 이쯤 되자 영국이 주도적으로 강화를 주선하기 시작했는데, ‘청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선에서 서구 열강이 제안한 강화안을 이홍장은 앞서 거절했으나 이제 본토가 빠르게 공략당하는 시점에서는 받아들이겠다고 자세를 낮췄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이 코대답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대한 중국을 상대로, 러시아의 위협을 뒤통수에 느끼는 채 전쟁을 하려면 속전속결밖에 없다고 여기던 그들이었으나, 이제는 좀 더 전쟁을 끌면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강화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파죽지세의 일본군은 11월에 접어들며 요동 반도를 잠식해 들어갔다. 많은 경우 청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물자를 내팽개친 채 도망쳤으므로 일본 군인들은 “(노획품을 기록하느라)칼보다 펜이 더 바쁘다”며 본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들은 청군보다 생전 처음 겪는 혹독한 추위를 더 못 견뎌 했다. 그러나 무사도 이래의 “정신주의”를 떠올린 장교들은 추위를 이긴답시고 영하 29도의 날씨에 병사들에게 발가벗고 스모 시합을 하도록 시키는 등, 서구인의 시각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을 벌였다. 그런데 달아난 청군이 싸움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 일반인의 협조 아래 게릴라전을 전개해 곳곳에서 일본군을 괴롭혔다. 그런 일이 거듭되자 일본군의 신경도 점점 날카로워져갔다. 그 결과 비극이 꼬리를 물었다. 마치 훗날 민간인을 가장한 베트콩에게 질린 미군이 베트남에서 벌인 일과 흡사한 비극, 그것은 11월 21일의 여순 점령 때 완전히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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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중의 일본군.



요동 반도의 끝자락에 놓인 여순은 북양함대의 주요 기항지였고, 북경을 수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1881년부터 서구식으로 요새지가 설계되었고, 5만 6천의 인구에 7천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해이해진 양무운동의 노력을 보여주는 듯, 최신 진지가 오래된 진지보다 엉성했다. 아무튼 일본군은 11월 6일에 금주를 점령해 여순과 북경 쪽의 연락을 끊고 여순을 고립시켰으며, 그 다음 날에는 여순과 잇닿아 있던 대련을 손에 넣었다. 대련에 머무르며 황해 해전의 피해를 복구 중이던 북양함대는 이홍장의 명령에 따라 싸워 보지도 않고 부랴부랴 달아났으며, 대련 수비군도 대부분 퇴각해 일본군은 무혈입성하다시피 했다.

11월 21일 새벽, 일본군은 여순 어귀의 다섯 개 봉우리에 설치된 청군 요새를 격파하기 시작했다. 오전 8시 반에 의자산 요새가 무너졌고, 이후 정오 무렵까지 모든 외곽 요새가 일본군 손에 들어갔다. 요새들 가운데 셋은 백병전까지 가지 않고 포격만으로 수비병들을 도주시켜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오후 두 시에 일본군은 여순 시내로 진입했고, 땅거미가 질 무렵에는 모든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청군의 감투정신이 너무 부족했다면, 일본군은 너무 지나쳤다(적어도 일부는). 장교 한 사람은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전장을 달리다가, 그만 혼절해 쓰러져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이를 씻을 수 없는 치욕이라 여긴 나머지, 나중에 병원을 빠져나와 자신이 쓰러졌던 자리로 가서 자결했다고 한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난 청나라 군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일부는 배를 잡아타고 도망쳤지만, 대부분은 고립된 도시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만주의 동료들처럼, 군복을 갈아입고 민간인들 틈에 섞이는 선택을 했다. 이 선택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본군의 선택으로 이어졌다. ‘보이는 중국인은 모조리 죽여라’는 선택으로! 며칠 전 붙잡힌 일본군 척후병을 난도질해서 매달아 놓은 것을 발견한 그들의 눈은 더더욱 뒤집혔다. 점령된 도시는 거대한 도살장으로 변해갔다. 이 일을 두고 무쓰 외상은 ‘청병이 민간인 복장으로 공격해 왔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변장한 군인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까지, 그들은 살육했다.



그들 가운데는 여자들도 많았다. 나는 작은 아이를 안고 있는 한 여인을 봤는데, 그녀는 앞으로 힘겹게 나가며 호소하듯 병사들 쪽으로 아이를 추켜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둑에 이르자, 그 비겁한 놈들 중 한 놈이 총검으로 그녀를 찔렀고, 그녀가 쓰러지는 순간 두 살쯤 된 아이를 찌르고는 그 어린 몸을 높이 쳐들었다. 여자는 일어나서 아이를 되찾으려고 맹렬하게 몸부림쳤지만, 결국 지쳐 쓰러져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일본군의 손이 닿는 모든 시체가 그랬듯, 그녀의 시체도 여러 쪽으로 토막이 났다. 호수에 더는 빈틈이 없을 것 같을 때까지, 새로운 희생자의 무리들이 떠밀려 들어갔다.

당시 현장에서 끔찍한 대살육을 목격했던 영국인 제임스 앨런의 증언이다. 일본 군인들은 사람의 머리를 총검에 꽂고 행진했으며, 누가 더 많은 여성을 강간하는지 시합했다. 왜 그랬을까? 적어도 처음에는 그들은 청군에 비해 민간인에게 신사적인 군대였다. 그러나 도를 넘어서는 추위와 그칠 줄 모르는 강행군, 쉴 만하면 튀어나오는 게릴라의 습격, 정신주의를 부르짖는 장교들의 닦달 등으로 그들의 인간성은 기진맥진이 되었다. 사람은 강자의 학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 약자를 학대한다. 심지어 전투식량의 차이조차 그들을 짐승으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일본군은 찹쌀을 쪄서 말린 도묘지(道明寺)라는 식량을 휴대하고 다니다가 각자 알아서 섭취했으며, 덕분에 개인용 냄비에 식기, 수저에다 각종 식재료까지 들고 다니다가 모여 앉아 밥을 지어먹어야 했던 청군에 비해 훨씬 신속히 행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음식만 먹다 보면 만족감이 없다.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휴식도 없다. 장교들이 시키는 혹한 속의 스모가 즐거울 리도 없다. 해소되지 않는 스트레스는 자꾸만 쌓여가고, 급기야 인간 이성의 임계점을 넘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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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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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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