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청일 전쟁(4) - 전쟁의 끝,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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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921회 작성일 16-02-0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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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위 전투에서 항복하는 청군 사절을 그린 일본의 그림.



목차


목차

1.청일 전쟁(1)

2.청일 전쟁(2)

3.청일 전쟁(3)

4.청일 전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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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위 공방전



여순 학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일본에 마냥 호의적이던 서양 열강의 시선은 회의적으로 바뀌었고, ‘문명의 탈 속에 숨겨져 있던 야만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잇달았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고 인권 사상이 본격화되기도 전이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일본의 만행은 도를 넘는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일본은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아무튼 군사적으로는 여순 점령으로 전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이제 요동반도 전체가 일본에게 넘어갔고, 언제든지 북경을 들이칠 수 있는 기반이 확보된 것이었다. 속이 타들어갈 지경이 된 이홍장은 전에 없는 저자세로 일본에 협상을 요구했고, 요동 반도를 바라보는 산동 반도의 요충지이자, 이제는 북양함대이 주력이 정박해 있던 위해위 근방에 일본군이 집결한 상태에서 도쿄에서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배상금만으로 만족할 수 없으니 영토를 내놓아라’는 일본 측의 태도에 결국 결렬되었다. 해를 넘긴 1895년 1월 30일, 위해위를 단단히 에워싼 일본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에워쌌다’고는 하지만, 해로로 옮길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보면 위해위를 포위한 병력만으로는 청군을 압도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위해위는 여순 이상으로 잘 방비된 요새도시였고, 30척에 달하는 북양함대가 ‘바다 위의 요새’처럼 육지 요새들과 호응하고 있었다. 차라리 달아날 길을 열어줌으로써 대련이나 여순에서처럼 쉽게 점령하는 전략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나왔으나, 황해 해전 이래 한사코 싸움을 피해온 북양함대를 이번에 확실히 끝장내어야만 청을 그야말로 여지없이 무릎꿇릴 수 있다는 의견이 앞섰다. 정여창 제독 역시 결전을 준비 중이었다. 이제까지의 경과만으로도 잘해야 파면, 잘못하면 참수될 입장이었던 그는 죽든 살든 마지막 힘을 짜내 싸워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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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함대 총사령관 정여창 제독(왼쪽). 위해위를 지키던 북양함대의 모습.




이렇게 보면 위해위 공략은 쉽지 않았다. 육지에서의 진입이 어렵다면 바다 쪽에서 들이쳐야 하는데, 항구는 좁은 만과 그 안의 두 개의 섬을 거쳐야 진입할 수 있었고 곳곳에 요새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마치 콘스탄티노플의 금각만에 드리워져 투르크 함대를 막던 쇠사슬처럼, 위해위 입구에도 쇠사슬 방재가 설치되어 일본 연합함대를 방해하고 있었다.

1월 30일 오전 6시, 먼저 육지 쪽의 병력이 위해위의 육상 요새로 진격했다. 이번에도 요새 탈취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병사들이 반자이를 외치는 그 순간, 북양함대의 군함들이 해안선까지 바짝 다가와서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여러 곳에서 치고 빠지며 온종일 공격했으나 큰 사상자를 내면서 해안과 육상 포대 한 곳씩을 점령하는 데 그쳤다. ‘이래서는 안 된다. 연합함대가 북양함대를 맡아 주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저 쇠사슬을 어쩔 것인가? 그래서 나온 대안이 어뢰정이었다. 비교적 소형이고 날렵한 어뢰정이라면 쇠사슬망에 약간의 구멍만 내면 진입이 가능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야간에 공격을 한다면, 특성상 화포를 쓰지 않는 어뢰정은 적에게 노출될 우려가 적었다. 하지만 문제도 있었다. 당시 어뢰의 속력이나 명중률은 매우 낮았고 따라서 제대로 공략하려면 목표물 가까이까지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황해 해전 때 청군에는 십여 정의 어뢰정이 있었으나 거의 전과를 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어뢰정 탑승자들에게 큰 위험을 무릅쓰도록 해야 했는데, 결론은 ‘무적 황군의 정신으로 기꺼이 죽음을!’이었다.

31일에 당장 어뢰정대가 출격했으나, 육군 쪽과 미처 협의가 안 된 탓에 아군의 사격으로 후퇴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 뒤 2월 4일이 될 때까지, 일본군은 낮에는 포격으로 적 요새를 두들기고 밤에는 쇠사슬에 구멍을 뚫는 일에 전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뢰정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가 된 2월 4일 밤, 사상 최초의 야간 어뢰정 해전이 시작되었다. 얼음이 덮인 한겨울의 바다 위에서, 일본 3개 어뢰전대와 청 북양함대 및 해안포대의 공방전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어뢰정 두 척이 포격에 얻어맞고, 방향을 돌리다 좌초되어 가라앉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검은 밤바다에 빠진 일본 수병들은 칠흑 같은 물 속으로 비명도 못 지르고 사라져갔다. 그러나 상대편의 피해가 훨씬 더 컸다. 청나라가 자랑해온 괴물급 전함, 정원(定遠)호에 명중한 어뢰가 엔진을 박살냈고, 기동 불능 상태가 된 거함은 집중 공격을 받았다. 마침내 한계라 여긴 정여창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명령했다. ‘전원 퇴함! 그 전에 화약고에 자폭 장치를 기동하라.’ 이렇게 해서 한때 도쿄 앞바다를 유유히 항해하며 일본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던 정원호, 황해 해전에서 수백 발의 속사포탄에도 견뎌냈던 정원호는 위해위 하늘과 밤바다를 시뻘겋게 물들이면서 굉음과 함께 가라앉았다.

야간 해전은 그 다음 날 밤에도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내원, 위원, 보벌(寶伐)이 격침되었다. 이쯤 되자 결판은 났다고 여긴 청군 병사들과, 주민들이 정여창에게 와서 ‘항복합시다’ 하고 종용하기 시작했다. 정여창은 ‘증원군이 올지 모른다. 11일까지만 기다려 보자’고 대답했다. 그러나 북경에서는 무소식이었고, 쇠사슬에 뚫린 망도 차차 넓어지면서 어뢰정보다 큰 군함도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낮에도 수륙 양면의 공격이 거듭되니, 북양함대의 피해는 커져만 갔고 위해위의 요새들도 하나둘씩 점령되어 갔다. 2월 9일에는 적에게 빼앗긴 해안 포대에서의 사격으로 정원(靖遠)호가 가라앉았다.

2월 11일, 마침내 북경에서 연락이 왔다. 그러나 고대하던 증원군의 소식은 아니었고, ‘대피하여 함대를 보전하라’는 이홍장의 명령이었다. 또 도망치라고? 도망치려 한들, 바다와 육지가 모조리 막혔는데 하늘을 날기라도 하라는 건가? 마지막 희망을 잃은 정여창은 항복을 결정했다. 교섭이 시작되자 일본 쪽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수상이 직접 연락해 왔다. 여순 학살의 재현을 우려하는 정여창에게 이토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게 하겠다, 단 북양함대의 남은 전력을 파괴하지 말고 그대로 인도하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정 제독은 이제 숙청되는 길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일본에 망명하시죠’라고 사뭇 정중히 권유했다. 그러나 정여창은 ‘우리 부하들과 주민들의 생명을 보장해 주신다니 고맙습니다’라고만 답변했다. 그리고 2월 12일, 이토에게 보내는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는 자결했다. 싸움을 멈춘 일본 해군은 예포를 쏘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북양함대의 남은 전력, 진원, 제원, 평원, 광병, 진변, 진중, 진북, 진서, 진동, 진남은 고스란히 연합함대의 전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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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일본으로 끌려와서 전시되고 있는 진원호의 모습. 훗날 일본 해군의 배로서 러일전쟁에 참전, 쓰시마 해전에서 발틱함대와 싸운다.






전쟁을 끝내야 할 때



이제는 정말 끝이며, 최대한 유리하게 협상하는 일 밖에는 안 남았다고 여긴 이홍장은 ‘영토 할양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나이다’고 광서제와 서태후에게 아뢰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대만을 공략하는 한편 북경 근처에까지 다가와 있고, 황궁은 서쪽으로 몽진할 준비를 서두르던 3월 중순에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강화 협상을 위해 몸소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것이었다. 1895년 3월 19일, 1885년에 천진 조약을 체결할 때 이후 10년 만에 다시 만난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그러나 지금은 10년 전과는 상전벽해에 가까울 만큼 두 사람의, 청-일 양국의 입장은 달라져 있었다. 이토는 조선의 종주권을 포기할 것과 대만, 팽호도, 요동을 할양할 것, 3억 냥의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이홍장은 너무 가혹하다며 요동과 대만은 할양지에서 제외하고, 배상금을 1억 냥으로 깎아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토는 그럼 더 생각해 보자며 1차 회담을 끝내버렸다.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도 슬슬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일부 여론처럼 북경을 점령한다면 유럽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으므로 일본 입장에서도 전쟁을 마칠 때였다. 그러나 두어 달 정도 회담을 끈다면 그 사이에 대만과 산동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더욱 더 유리한 협상이 가능하리라고 본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으로 일본 역시 협상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어졌다. 3월 24일에 이홍장이 저격당한 것이다. 암살 미수자인 고야마 도요타로는 광적인 극우파로, ‘강화하면 안 된다. 이참에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중국 전역을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홍장을 없애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홍종우가 김옥균을 암살한 일을 두고 ‘조선의 야만성’을 한껏 선전했던 일본으로서는 낯이 뜨겁게 되었으며, 빨리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여기게 되었다. 74세였던 이홍장은 총탄이 몸에 박힌 상태에서 꿋꿋하게 협상 테이블에 다시 앉았다. 그러나 배상금 액수와 요동 할양지를 어디까지로 잡느냐를 두고 해결이 나지 않은 채로 다시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일본은 대만 전역을 손에 넣었다. 결국 1895년 4월 17일, 청이 요동(일본이 처음 요구한 정도보다는 축소된 수준으로)과 대만, 팽호도를 할양하고 2억 냥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조선에서 손을 뗀다는 조건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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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인천의 차이나타운. 임오군란에서 청일전쟁에 이르는 동안 중국인들이 많이 머물게 된 뒤로 발전했다.(오른쪽)황해 해전에서 청의 정원호와 대결했던 마쓰시마(松島)호. 그 이름은 오늘날 ‘송도 신도시’에 남아 있다.







새로운 시대, 풀리지 않는 숙제



청일전쟁은 한, 중, 일 삼국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은 이제 스스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완전히 상실했다. 1900년에 옥중에서 [청일전기]를 집필했던 이승만은 훗날의 서문에서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이 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썼다. 또한 양무운동 이래 서양이 청에 대해 내리던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거대한 용’이라는 평가가 ‘아직도 꿈나라인 거대한 돼지’로 격변했으며, 이후 열강은 마음 놓고 청에게 이권을 강요하게 되었다. 청왕조에 대한 불신은 내부적으로도 하늘을 찔렀으며, 이는 ‘수구적인 서태후 일파에 대한 불만’으로 일단 집약되면서 광서제를 업은 강유위 등의 변법자강(變法自疆) 개혁으로 이어졌지만 이 역시 실패함에 따라 역사의 바톤은 손문 등의 공화파-민족주의파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반면 메이지 유신 이래의 ‘서구적 근대화라는 숙제’를 짝꿍인 청나라보다 훨씬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처음으로 해외 영토를 확보함으로써 영광의 절정에 이른 듯했던 일본은 곧바로 뒤통수를 맞았다. 마침내 적극적으로 개입할 마음이 든 러시아와 그 동맹국이었던 프랑스, 거기에 원래는 영국의 설득으로 개입할 예정이었지만 도중에 영국이 팔짱을 껴 버려 난감했던 독일이 손을 잡고 ‘삼국 간섭’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요동을 차지할 경우 북경은 항상 위협 속에 있게 되고, 조선의 독립도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으므로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요동을 청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기가 막혔지만, 청일전을 가까스로 끝낸 마당에 3개국을 상대로 싸울 도리는 없었으므로 이를 악물고 요동 반도 반환에 동의했다. 그러나 청으로서는 고마운 일이 아니었는데, ‘자기 것을 양보’한 일본에게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양보하도록 주선해 준’ 러시아와 독일에게도 ‘조차’라는 명목으로 요동과 산동을 사실상 할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로써 일본의 위신이 크게 떨어지고 러시아의 성가가 높아지자, 조선은 다시 친러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분격한 일본은 1895년 10월에 을미사변을 일으켜 또 다시 대원군을 앞세우며 억지로 친일 정권을 세웠고, 이 전대미문의 폭거에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대응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의 한 판 승부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일본은 그 승부에서도 승리함으로써 조선을 최종적으로 확보하고, 한동안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참된 손해는 다른 쪽에서 찾아야 했다. 첫째, 청일전쟁의 승리 이래 일본은 내부정치 문제를 외부 침략으로 해결한다는 ‘아주 쉬운 방법’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또 전쟁 기간 내내 정치인들보다 주도적으로 움직이며 영웅 대접을 받았던 군인들은 정치 자체를 자신들의 손으로 이끌어야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병들의 복지를, 나아가 생명을 도무지 존중하지 않고 ‘정신주의’로만 몰아붙였던 만주와 요동에서의 싸움 방식이 ‘성공적’이었다는 학습 효과 때문에, 이후 일본은 모든 전쟁을 그런 식으로 수행해 나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일본이 군국주의의 광란으로 치달아, 수많은 동아시아인들뿐 아니라 자국민까지 불행의 늪에 빠트리며, 결국 잿더미와 버섯구름 속에서 침몰하는 결과를 낳고야 만다. 그리고 둘째, 청일전쟁에서 그런 광기의 촉수를 처음 목격한 중국, 한국과 서구 국가들은 일본에 대해 지워지지 않는 의심과 혐오감을 품게 되었다. 그런 부정적 인상은 군사대국에서 경제대국으로 변신한 뒤에도 쉽게 사라질 수 없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청일전쟁으로 이전의 숙제를 보기 좋게 풀었지만 그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숙제를, 일본은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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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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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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