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겨울전쟁 [1] - 약소국 저항의 상징이었던 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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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987회 작성일 16-02-0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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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결과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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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3월 체결된 강화조약에 따른 새로운 국경선. 핀란드는 국토를 상당 부분 강탈당하고 주권의 일부도 빼앗겼다. <출처: (cc) Jniemenmaa at Wikimedia.org>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에서 벌인 5일간의 협상 끝에 소련 외상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와 핀란드 수상 리티(Risto Ryti)는 양국 정부를 대표하여 평화협정서에 서명하였다. 다음날 오전 11시까지는 교전 상태를 유지하기로 하였기에 아직 전선에서 포성이 멈춘 것은 아니었고 정식으로 3월 21일부터 조약이 발효될 예정이었지만, 지난 105일간 두 나라가 벌인 전쟁은 여기서 일단 막을 내렸다.

그런데 말이 강화조약이지 단지 침략 행위를 멈추는 대가로 핀란드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강도 짓이나 다름없었다. 핀란드는 국토 중동부의 살라(Salla)와 인구의 12퍼센트에 해당되는 42만 명이 살고 있는 산업중심지 카렐리야(Karelia)를 강탈당하였다. 더불어 북부의 바렌츠 해(Barents Sea)에 접한 칼라스타얀사렌토(Kalastajansaarento) 반도와 핀란드 만에 산재한 여러 섬들도 빼앗겼다. 이때 강제로 내쫓긴 핀란드인들에게 이주할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은 단 열흘뿐이었다.

또한 공업 생산량의 8할 정도를 담당하던 엔소(Enso) 공단과 수력발전시설의 30퍼센트를 강탈당하였고 상당한 수량의 열차, 화차, 차량, 선박까지 배상 명목으로 빼앗겼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협정에는 핀란드의 주권을 무시하는 내용까지 포함되었다. 추후 소련군이 방해받지 않도록 핀란드군의 배치에 제한이 가해졌고 수도 헬싱키 남서쪽 외곽 요충지인 항코(Hanko) 반도를 30년간 해군 기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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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30년간 군항으로 조차하기로 한 항코. 이곳에 소련군이 주둔하려면 핀란드 영해와 영토의 자유왕래도 보장해주어야 했다. 한마디로 국권 침탈 행위였다. <출처: (cc) J-E Nyström at Wikimedia.org>



핀란드 내부에서 전쟁보다 강화로 잃은 것이 훨씬 많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처럼 단지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놓고 본다면 분명히 핀란드는 굴욕을 당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전쟁을 보아왔던 세계인들은 핀란드가 결코 패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승자인 소련도 두고두고 악몽으로 남을 만큼 심하게 곤욕을 치러 승자의 기쁨을 누릴 형편이 아니었다. 바로 약소국 저항의 상징이었던 겨울전쟁(Winter War)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레닌, 항복을 선택하다



1917년 11월 7일, 레닌(Vladimir Lenin)은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잡았지만 붕괴된 러시아의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권력도 공고하지 못한 상태였다. 현실을 직시한 그는 내우(內憂)를 확실히 잡기 위해서는 먼저 외환(外患)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제1차 대전에서 발을 빼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런데 혁명의 혼란 중에도 러시아인들의 독일에 대한 적개심은 여전히 높았고 그동안 함께 전쟁을 하여온 연합국 측도 러시아의 이탈을 방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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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망명지에서 귀국한 후 대중을 향해 연설 중인 레닌. 그는 무장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제1차 대전에서 러시아의 이탈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냉정한 레닌은 외무인민위원인 트로츠키(Leon Trotsky)에게 강화협상을 지시하며 본격적인 종전 행보에 들어갔다. 너무 이상에만 치우쳤던 트로츠키는 최초 협상에서 "전쟁도, 강화도 하지 않는다"며 그냥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는 독일에게 씨도 먹히지 않는 궤변이었다. 왜냐하면 1917년 말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오스만투르크의 동맹국이 러시아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로츠키의 주장은 싸움에 지고 있던 이가 승자처럼 행동하는, 한마디로 개념을 상실한 어이없는 주장이었다. 1918년 2월 10일, 장기간의 교섭은 중단되고 곧이어 독일의 대공세가 재개되어 러시아의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Petrograd,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까지 동맹국 군대가 진격하여 왔다. 다급해진 레닌은 독일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여 러시아의 일부 영토와 우크라이나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던 상당 지역을 양보하고 전쟁에서 발을 빼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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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장에 도착하여 독일군의 영접을 받는 트로츠키. 그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주장만 남발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동맹국의 반발을 불렀다.



레닌은 전쟁을 계속하다가는 어렵게 이룬 혁명은 차치하고 독일에게 러시아가 점령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독일의 요구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던 소비에트 위원회에 만일 결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즉시 사임하겠다는 배수의 진을 치며 설득하였다. 그는 항복과 다름없을 만큼 굴욕적인 강화협상을 3월 3일 마무리 짓고 전선에서 마침내 러시아를 이탈시켰다.




겨울 고슴도치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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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거 러시아가 영향력을 상실한 지역. 이후 독일이 패전하며 조약이 자동파기되었지만 소련은 이때 잃은 영토를 반드시 되찾아야 할 실지라고 생각했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비록 보수파나 멘셰비키들은 물론, 지지기반인 볼셰비키들로부터 "독일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하였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1920년까지 러시아에서 내전이 벌어졌지만 레닌이 이처럼 굴욕을 감내하였던 이유는 그가 꿈꾸던 새로운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설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번 조약으로 빼앗긴 영토는 실력을 길러서 반드시 회복하여야 할 고토(古土)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휴전으로 독일의 영향권에 들어간 폴란드, 발트 해 지역은 러시아 고유의 영토라기보다는 제정 러시아가 점차 세력을 넓혀가면서 점령한 곳이었다. 비록 그곳에서 살던 이들은 러시아인과 같은 슬라브계였지만 종교나 민족의식이 확연히 달라서 러시아를 자신들을 탄압하는 외세로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들은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고 혁명의 혼란기가 닥치자 즉각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신생 독립국 중에는 핀란드도 있었다. 핀란드는 러시아가 지배하기 전까지 오랜 세월 스웨덴의 변경 정도로 여겨지던 지역이었다. 비록 고도의 자치를 누렸지만 식민지로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아 오고 있었다. 때문에 1809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체제가 바뀌면서 러시아의 영토가 되자 핀란드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오히려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호기로 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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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핀란드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자치 의회 개회식에 참석한 모습.



핀란드인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러시아의 제도 및 문물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실력을 기르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 결과 핀란드어를 공식 언어로 인정받는 데 성공하고 자치 의회를 구성하여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따라서 1917년 러시아가 혁명으로 크게 흔들리는 틈을 타 재빨리 독립을 선포했을 때, 핀란드는 이미 독립을 하여 국가를 세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완료하여 놓은 상태였다.




신생국을 노리던 외세들



그런데 바로 이때 독일이 도움을 빙자한 간섭을 하였다. 비록 핀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힘이 필요하였지만 독일도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었다. 독일은 헤센-카셀(Hessen-Kassel)가를 왕가로 책봉하여 핀란드를 형식상 왕국으로 독립시키되 속국처럼 간접 지배할 생각이었다. 이때 핀란드인들은 입헌군주제로 국가를 경영하면 명분은 물론 실리도 함께 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일단 간섭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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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는 제1차 대전의 혼란기를 틈타 독립에 성공하였지만 곧바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 당시 백군의 모습.





핀란드 내전 당시 적군(赤軍)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한 소련의 장갑 열차 파르티잔. 혁명의 혼란기에도 개입하였을 만큼 소련(러시아)에게 핀란드는 중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100년을 넘게 지배하였던 러시아의 잔영은 의외로 커서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하자마자 내전에 빠져들었다.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는 적군(赤軍)을 이끌고 1918년 1월 27일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다행히 장기화되지 않고 5월 15일 독일의 지원을 받는 백군(白軍)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양측 합쳐 20,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핀란드 현대사의 아픈 기억이 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후견인으로 자처하던 독일은 얼마 못 가 제1차 대전에서 패전하였고 핀란드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해 내전에 깊숙이 개입하였던 소련도 적백내전에 빠져들었다. 이는 핀란드에겐 외세를 완전히 배격할 결정적인 기회가 되어 1918년 공화국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혁명의 혼란기를 추스르고 거대 국가로 변신하면서 어려웠던 시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빼앗긴 옛 땅에 점차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언젠가 반드시 회복하여야 할 고토로 소련은 폴란드, 발트 3국과 더불어 핀란드도 그 명단에 올려 놓고 있었다. 수시로 이런 야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소련에 대해 핀란드도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소련을 자신들을 지배하던 제정 러시아의 승계국가로 보기도 했지만 독립 초기에 피를 불러온 간섭의 당사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전 이후 핀란드 내에는 반공의식이 강했고 이러한 불신관계는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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